대문 밖에 아궁이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집을 짓다가 보니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두게 되었겠지만, 우리들의 집을 짓는 방법으로 따지면 조금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 하나가 오히려 이 집을 더욱 기억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마 전체적인 분위기가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고택과는 무엇인가가 다른 면이 있다. 양평군 용문면 오촌리 18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5호인 김병호 고가. 용문면소재지에서 용문사가 있는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오천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 좌측 샛말로 들어가면, 마을의 중앙 언덕 위에 자리한 김병호 고가가 있다. 조선조 말기인 고종 30년인 1893년에 지어진 집으로, 전체적인 집의 형태는 튼 ㅁ 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건넌방을 경계로 삼은 안채

 

이 집은 조선조 말 내시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연못을 3년간이나 터를 닦아 지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99칸의 큰 집이었으나 모두 타 버리고, 현재는 안채만 원래의 집이라고 한다. 김병호 고가를 돌아보면 그 말에 수긍이 간다. 그만큼 집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김병호 고가의 안채는 남서향을 하고 있다. 마루문을 달아낸 두 칸의 대청이 있고,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는 안방과 날개로 꺾어 달아낸 두 칸의 부엌이 있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건넌방이 있는데, 이 고가의 특징은 바로 건넌방이다. 건넌방이 앞으로 돌출이 되어, 그 다음에 달아낸 두 칸의 방과 안방의 경계로 삼고 있다.

 

덧달아 낸 두 칸의 방은 한 칸은 마루방으로 문을 달아내고, 그 다음은 온돌방을 놓아 그 북측에 감실을 만들어 조상의 위폐를 모셔놓았다. 앞으로는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아 사랑방의 구성을 한 것이다.

 

결국 이 건넌방을 앞으로 돌출을 시킨 것은, 안방과 사랑방의 경계를 건넌방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일반 고가에서는 보기가 힘든 구성인데, 조선조 말에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중인계급이 신분상승을 하면서, 나름 안채와 사랑채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택한 가옥의 구조이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건넌방이 돌출이 되어 안방과 사랑방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넌방을 지나 두 칸으로 꾸며진 사랑은 한 칸은 마루방으로 하고, 끝의 방은 북쪽에 감실을 낸 사당으로 사용한다.

부엌에 벽에 낸 쪽문은 냉수문

 

김병호 고가를 주의 깊게 보면 두 칸 부엌의 위로는, 두 칸의 다락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엌은 전면은 판자벽으로 했으나 옆으로 돌아가면 심벽으로 구성하였다. 나름대로 전체적인 집의 구성을 사대부가의 집에 걸맞게 꾸몄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엌의 까치구멍 위에 판자로 문양을 내고 쪽문을 하나 내었다. 이 집을 소개하신 어르신의 말은, 이 쪽문이 '냉수문'이라는 것이다. 즉 안방에서 부엌을 드나들 때, 번거로움을 피해 이 구멍을 통해 냉수그릇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용도로만 꼭 사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나름대로 멋을 더하고 생활의 편리를 생각한 쪽문이다.

 

안방에서 날개채로 달아 낸 두 칸의 부엌은 위에 다락을 두었다. 앞은 판바벽으로 막고 옆과 뒤는 심벽으로 꾸몄다.

부엌의 까치구멍 위에 낸 쪽문. 이런 것 하나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대문 밖 아궁이를 둔 대문채

 

김병호 고가의 특징은 대문채의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6·25 동란으로 불이 타버린 대문채는 다시 복원을 하였다고 하는데, 대문채와 행랑채가 붙은 ㄱ 자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은 행랑채로 구성해, 길가로 툇마루를 냈으며, 우측으로는 대문채를 두었다. 대문채는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광, 그리고 한 칸의 헛간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문채의 밖으로 한데아궁이를 내고, 그 위로 다락을 둔 점도 특이하다. 원래 이렇게 밖으로 아궁이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으로 자리를 잡은 김병호 고가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이곳에서 음식을 하고 행랑채의 툇마루를 이용하여 급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문채를 사랑채라고 하기도 하지만, 아마 후에 이곳을 사랑으로 사용했기 때문인가 보다.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면 사랑채가 별도로 있었을 텐데, 안채에 건넌방을 막아 사랑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이 구조는 대문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문의 우측에는 한데 부엌을 내고 그 위에 다락을 꾸몄다. 그리고 좌측의 행랑채는 밖으로 툇마루를 내었다.

뒤태가 아름다운 김병호 고가

 

김병호 고가를 둘러보다가 보면, 이 고가의 뒤태가 참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대문채의 밖을 판자벽으로 둘렀는데, 기단의 돌이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이 무늬가 있는 돌로 사용을 했으며, 주추는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집을 소개하신 분께 이 돌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잘 모르시겠단다. 

 

기단을 모두 이렇게 무늬가 있는 돌로 꾸민 것으로 보면, 김병호 고가의 처음 모습은 범상치가 않았을 것 같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이 용문사를 지은 대목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보아도 그렇다.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나 툇마루 등에 목재를 사용한 치목도 뛰어나 보인다.

 

김병호 고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니 기와를 교체하면서 내린 흙 기와를 담장에 붙여 쌓아 놓았다. 기와의 형태로 보아 가마에서 구운 기와다. 이러한 기와는 적어도 100년 이상 된 것들이다. 이 뒤뜰이 이 가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뒷벽과 굴뚝의 조화다. 굴뚝을 강돌로 쌓아 담벼락과 쌍으로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

 

벽과 강돌로 조형한 굴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담장에는 오래된 기와가 가득 쌓여있다.

대문채에 붙은 광과 헛간의 뒤는 모두 판자벽으로 처리해 멋을 더했다. 그리고 기단은 무늬가 있는 장대석을 사용했다.

고가를 돌면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만난다. 후일 이 특별한 부분만 따로 모아 책으로 쓴다고 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 고택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갈까? 나는 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질문을 해왔다. 그러다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찾아간 작은 정자에서, 흐르는 땀을 씻어주는 바람을 만났다. 그래서 난 정자를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고 표현을 한다. 바람은 정자 곁을 흐르는 물을 따라 불어온다.

 

그 물길을 따라오면서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주고, 그 바람은 정자를 치받쳐 오른다. 그래서 정자가 더 시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국을 답사하면서 만난 아름다운 정자들. 그 정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암벽 위에 걸터앉은 정자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350에 소재한 초간정. 내를 끼고 선 암벽 위에 지어진 초간정은 멀리서도 사람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녔다. 행여 누가 뒷덜미라도 낚아챌 것 같아 한달음에 달려간다. 정자는 아름다운 경관을 필요로 한다. 어디를 가서 보거나 정자들은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을 택해 자리를 잡고 있다.

 

정자는 민초들과는 거리가 멀다. 대개 반가의 사람들에 의해서 지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자를 바라다보는 내 시각은 다르다. 그것을 지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빼어난 경관을 택했느냐는 물음을 항상 하고는 한다. 그래서 이렇게 덥거나 춥거나 쉴 수 없는 여정에 만나는 정자가, 더 반가운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작은 정자의 출입문, 주인의 심성을 닮아

 

정자로 출입하는 문이 작고 좁다. 이 정자를 지은 권문해(1534 ~ 1591) 선생의 마음을 읽어낸다. 작은 문으로 겸손하게 들어오라는 뜻일 것이다. 도포자락을 휘두르며 거만을 떨지 말고, 두 손 공손히 모으고 다소곳하게 문을 통과하라는 뜻일 것이다.

 

 

 

양반가의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거들먹거린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금력이 있으면, 겸손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초간 권문해 선생은 그런 것을 싫어했는지. 작은 문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초간정을 지었다. 1582년인 조선 선조 15년에 처음 지어진 이 초간정은 그런 마음을 담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화려하지 않은 정자다. 정자의 뒷편과 우측은 절벽이다. 그 밑으로 맑은 물이 감돌아 흐른다. 마루 벽 한편에 문을 내어 난간으로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난간 밑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작은 소를 이루고 있다. 맑고 찬 물애 발을 담구면, 오장육부가 다 맑아질 것만 같다.

 

 

 

빈 낚싯대 늘이고 바람을 낚아

 

위를 보니 석조헌(夕釣軒)이란 현판에 걸려있다. 저녁에 낙시를 하는 마루란다. 이 현판을 보고 무릎을 친다. 정자 주인의 마음이 거기있기 때문이다. 아마 초간 권문해 선생은 실은 물고기를 잡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낚시를 드리우고, 눈을 감고 세상 시름을 끊는 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해가 설핏한 저녁에 낚시를 한 것이 아닐까?

 

 

정자를 둘러보고 주인인 초간 권문해 선생의 마음을 느낀다. 참 소탈하다. 참 그 마음에 자연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정자문을 나서 새로 놓은 철다리를 건너려는데, 초간정을 감돌아 흐르는 내에서, 천렵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참으로 한가한 정경이다. 사람이 사는 멋이 바로 저런 것은 아니었을까?

 

바람이 감돌아 쉬어가는 정자. 그 정자에는 사연도 많겠지만, 그 보다는 그 주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래서 바람 길을 따라나서는가 보다.

 

 

봉황정,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정자가 서 있는 밑으로는 물이 흐른다. 저 멀리 내 건너 보이는 사람들은 그 물에 발을 담구고 앉아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님 두 사람이 주변 시선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까? 봉화정에서 내려다보는 냇가에는 손 장난을 치는 연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봉황정은 용문면 소재지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횡성군 방향으로 3.5㎞ 지난 오른쪽 길가에 서 있다.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 물이 맑고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 봉황이 춤을 추는 형상이라고 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봉황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일반 정자와는 달리 담이 처져있고,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면 정자가 서 있다. 대문 입구에는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비가 한편에 서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자 안편에는 람휘정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그리고 밑으로 흐르는 내 흑천 쪽으로 정자를 돌아가면 구성대라는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있다. 한 정자에 세 개의 이름을 붙인 봉화정.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기야 한 정자에 네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정자도 있다.'九成'은 태평성대가 아홉 번 이루니 봉황이 와서 춤추는 형상을 뜻하고, '覽輝(남휘)'는 봉황이 천리 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앉았다는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한다.

 

봉황정이 처음 건립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이조참의 양응청과 의해 건립되었다. 그 후 정조 14년인 1791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철종 1년(1850)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다시 1967년에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봉황정은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지평에 은거하였던 이식, 명시인 유희경, 김창흡, 이중하 등이 봉황정에 올라 봉황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봉황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암긴 사람들은 이항복, 유희경, 김창흡의 시가 전한다.  봉황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 건물로서 내부에는 누마루를 놓았다. 규모는 정ㆍ측면 각각 3칸으로 정방형이다. 정자 안에는 '봉황대남휘정중수기'부터 최근에 만든 시문현판까지 모두 7개의 글을 적은 게판이 걸려있다.

 

  
▲ 현판 정자 안에는 람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시 한 수 적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선조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잊고 산지 오래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도 '아름답다'라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의 날들이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다. 누군가 이 봉황정에 올라 스스로를 시인이라 했다면, 글 한 수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속 좁은 사람도 정자에 오르면 저 아래 흐르는 광탄에 세속에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버릴 수 있을텐데, 그저 덧없는 세월만 탓한들 무엇하리. 오늘 이 봉황정에 올라 엣 선인들의 마음을 읽어본다.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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