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대원사. 이 절은 천년하고도 수백 년이 지난 고찰이다. 우리나라에 고찰 중 차로 들어갈 수 없는 몇 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에 소재한 대원사는 지난 세월이나 요즈음이나 유명하다. 지난 세월은 술을 '곡차'로 불러 유명한 진묵 스님이 이 절에서 20여 년간을 머물렀고, 요즈음은 국민토종 축제라는 '모악산 진달래화전축제'로 유명하다.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니 산은 베개로다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니 바다를 술통으로 삼는도다

거나하게 취해 일어나 춤추려하니 곤륜산에 소맷자락이 걸리누나

 

 

대원사에 배인 진묵대사의 체취

 

석가여래의 후신이라 일컬어지던 진묵대사께서 대원사에 머무를 때 읊었다는 시다. 진묵대사의 기이한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전한다. 진묵대사는 대원사에서 밑 마을로 내려가시어 늘 곡차를 즐겨 드셨나보다. 초의스님이 지은 <진묵조사유적고>에 나와 있듯이 대자유인 진묵대사는 늘 자연이셨다.

 

대원사는 증산교의 강증산이 도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대순진리회나 증산교의 신도들의 성지로 여겨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또한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도 한 때 이곳에서 수도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모악산 대원사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으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낸 길지 중의 길지라고 평한다. 종교를 달리한 큰 스승들이 머무르며 수행한 성지이기도 하다.

 

 

모악산 대원사는 현재 금산사의 말사이다. 현재 당우로는 삼존불을 모신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심검당, 향적당, 적묵당, 종각 등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는 용각부도와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이 있으며, 봄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는 산 벚꽃이 있어 아름답고, 가을이 되면 단풍터널을 이루는 곳이다.

 

사계절 아름다움이 그치지를 않는 대원사에는 11일 촛불타종맞이와 4월에 열리는 화전축제, 그리고 단풍철에 이루어지는 각종 문화행사들이 있어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만큼 대원사는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 높지 않은 모악산 중턱에 자리해 누구나 쉽게 오를 수가 있다.

 

눈길에 오른 대원사 절경이로고

 

모악산에 눈이 쌓인다. 사람들은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에도 모악산에 오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만큼 모악산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산행을 하는 곳이다. 모악산은 어머니의 품이라고 한다. 그 종턱에 자리하고 있는 대원사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이다. 모악산을 가운에 두고 김제에는 금산사가, 완주에는 대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원사는 한 때 금산사보다 더 많은 산중 암자를 갖고 있는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언제 그 많은 전각들이 다 사라진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현재의 전각들은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근자에 들어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 뒤편 높은 축대 위에 새워진 삼층석탑만이 이 절이 고려 때도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눈이 가득 쌓인 모악산 대원사. 바라보는 곳마다 절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악산을 오르고, 대원사에 드려 따듯한 차 한 잔을 마시는가 보다. 심검당 앞에 축대에서 흘러나오는 물도 눈에 추위를 타는 것인지, 흐르는 소리조차 얼어붙은 듯하다. 수배격 묵은 마당 한 가운데 노송에도 눈이 하얗게 쌓였다.

 

대원사에서 바라보는 모악산 정상 부근에는 설화가 하얗게 피었다. 그 모습만 바라보아도 언제나 어머니의 품 같다는 모악산 대원사. 그렇게 눈 속에 소리 없이 파묻히고 있다. 마치 어느 동화속에 나오는 한 폭의 그림처럼.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산성 내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와 그 외에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위봉산성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산성 성문지 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위봉산성 의 성문지. 비교적 잘 보존이 되어있다

성문지 위에 누각이 소실되 구멍이 뜷려있다

 

도로가 성벽을 끊고 있는데 건너편에 보면 성벽위로 여장, 총안을 둔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 안으로 찬찬히 훑어보면 다른 성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성벽을 쌓은 돌이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를 쌓아놓았다. 자연미가 풍기는 성벽은 오히려 다듬은 성벽보다 아름답다. 울퉁불퉁한 성 돌을 그대로 맞추어 쌓아놓은 성벽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성이다.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옹성은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옹성 안으로 적이 들어오면 사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위봉산성은 전투에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과 패 등을 옮겨 보호하기 위한 성이기도 하다. 또한 변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피신시키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위봉산성은,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이 되자 태조의 어진을 옮겨 모셔 제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성 안에는 위봉폭포와 위봉사가 있어 늦가을 바람 따라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역사를 따라 길을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숱한 문화재를 찬탈해간 일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에 어지간히 욕심을 내었던 것만 같다. 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예, 조선 전체를 들고 가지 그랬어!”라는 말이다. 그런 말이 하고 싶을 정도로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수도 없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서 있는 보물 제276호인 발산리 오층석탑. 지금은 오층은 사라지고 사층만 남아있다. 이층의 기단위에 세운 이 오층석탑은 원래는 완주군 고삼면 삼기리 봉산사 터에 남아있던 석탑이다. 이 석탑을 군산 개정면에 농장을 갖고 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오층석탑

 

아마도 처음에는 이 석탑도 오층이었을 것이다. 그런 탑의 맨 위층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 들고 갈 수 없어, 그 위층만 가져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석탑은 신라 탑의 모양을 본 따 제작한 우수한 석조공예품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간결하게 정리가 된 고려 탑의 조형미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탑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옮겨 딴 곳에 터를 잡고 있지만, 이 석탑과 석등은 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소재가 분명한 것을 이렇게 엉뚱한 곳에 놓아둔다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옥개석의 아름다운 곡선에 반하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받침돌은 신라 석탑을 모방하였다. 네 개의 기둥을 새긴 몸돌인 탑신석과 머릿돌인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하였다. 삼단 받침으로 꾸민 지붕돌은 끝이 약간 위로 치켜져 있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백제탑의 양식이 화려하고, 신라탑의 모습은 장중하다고 한다. 고려 초기의 석탑의 형태를 보면 이런 백제탑과 신라탑의 형태를 모방해,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탑의 형태를 창출해 내었다.

 

 

그 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지붕돌인 옥개석의 추녀 끝이다. 마치 한옥의 처마가 치켜 올라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듯, 그렇게 엷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자칫 딱딱한 석조 조형물인 석탑을, 그 곡선하나가 여유로움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지붕돌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올라간 곡선이 고려탑의 특징이다.

 

투박한 이층기단을 몸돌이 살려내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을 올린 탑이다. 이층의 기단 중 아래기단은 삼단의 낮은 단으로 쌓았는데, 그 낮은 기단 안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였다. 고려의 석조물에서 보이는 안상은 보이지 않는다. 상층 기단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장의 돌로 표현을 하였다. 상층 기단의 몸돌에는 우주를 표현하고, 지붕돌인 덮개돌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그런 형태가 탑의 몸돌과 구분이 된다.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오층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 꾸밈새 안에는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자칫 기단의 투박함이 몸돌이 표현한 부드러움에 묻혀있다. 돌을 이용한 탑을 조성하면서도, 나름 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낸 고려탑. 그 처마 선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소재한 송광사. 김제 금산사의 말사이면서도 사세는 어느 고찰 못지않다. 송광사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돋보이는 것은 당연히 조선시대에 축조된 보물 제1244호 종루이다. 송광사 종루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종루이다. 중앙에 종을 매달고 동서남북 사방을 돌출시켜 열 십(十)자 모양으로 지어진 이층 누각을 말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고찰 송광사

 

완주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때의 승려 도의는 가지산파의 개조로 추앙을 받은 승려이다. 가지산파란 구산선문의 하나로, 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이 도의를 종조로 삼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풍을 말한다.

 

 

송광사는 그 뒤에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중건을 하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등이 중건을 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으며, 현재도 많은 불사를 하고 있는 절이다.

 

화려한 이층 누각으로 마련한 종루

 

송광사의 종루는 조선조 세조 때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것을 철종 8년인 18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조선조에 세워진 수많은 건조물 중 유일한 이층 십자형 종각으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조물이다. 이 종각은 중앙에 종을 매달고 돌출된 부분에는 각각 북과 목어, 운판을 걸어놓았다.

 

 

 

이 네 가지의 기물은 불당 앞에 위치하고 있어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고 하고 있으며, 아침과 저녁 예불을 올리기 전에 울린다. 북은 땅 위에 사는 네발을 가진 짐승을 위해서, 목어는 물속에 사는 생명체를 위해서, 운판은 창공을 나는 모든 날짐승을 이해서, 그리고 종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한 것이다.

 

송광사 종루는 화려하면서도 소박하다. 자연석인 정평주초 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다. 그 중에는 자연적인 목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어, 소박함이 느껴진다. 누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송광사 종루의 공포는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방 팔작집으로 마련한 종루는 지붕 중심 용마루의 장식 또한 색다르다. 이러한 종각은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이기에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볼수록 빠져드는 송광사 종루

 

요즈음은 참 일기가 가늠하기가 힘들다. 맑았다가도 비가오기도 하고, 여름 같은 날씨이기도 하다가 갑자기 가을이 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완주군 소양면 방향으로 일을 보러나갔다가 송광사를 들렸다. 사월 초파일 준비로 한창인 경내에는 수많은 등에 여기저기 걸려 그 화려함을 자랑한다. 대웅전 앞에 자리한 이층 종루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전국의 고찰을 다니면서 수많은 종각을 보았지만, 송광사 중층 종각과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용마루 중앙에 올린 장식도 아름답지만, 귀공포의 화려함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누마루 밑의 자연스런 기둥들. 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한 기둥의 형상들이, 마치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보는 듯하다. 그 많은 중생들이 서로가 불전사물을 받치고 예라도 올리는 듯한 모습이다. 송광사 종루를 볼 때마다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양을 하고 서 있지만, 볼 때마다 빠져드는 송광사 종루. 오늘도 온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사물에서는 저절로 소리가 울릴 것만 같다.

전북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이곳에는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작은 정자 하나거 서 있다. 정자의 이름은 ‘삼기정’이라 하는데, 삼기정은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짓고, 삼기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지은 이는 하연으로 전해진다. 최득지는 세종 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당시 정몽주의 문인이었던 하연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관내를 순시하는 도중, 고산읍에 들렀다가 소풍을 나간 곳이 삼기리였다.

 

하연은 이곳이 앞으로 흐르는 만경강과 기암, 그리고 송림이 우거진 것을 보고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여 ‘삼기(三奇)’ 라 송판에 써주었다.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정자를 세우고 하연에게서 기문을 받아 정자에 거니 이것이 삼기정이다. 지금의 삼기리라는 명칭도 이 정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율헌 유허지에 서 있는 삼기정

 

삼기정을 축조한 최득지(고려 우왕 5년, 1379~ 단종3년, 1455년)는 본관은 전주, 호는 율헌이다. 태종 13년인 1413년에 장흥교수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환갑을 맞이하던 세종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현 삼기정 건물의 상량에는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三年庚午重建世宗己未創建'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고산현감 최득지가 삼기정을 축조한 것은 세종21년인 1439년이고, 그 뒤 오랜 세월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 오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처음에 이 삼기정을 세운지 벌써 520년이나 지났다.

 

삼기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씩이다. 정자 안에는 하연의 ‘삼기정기문’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이곳의 풍광에 얼마나 빠졌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고산현 동쪽 오리쯤에 자그마한 언덕이 있으니 절벽이 깎아질렀고 그 아래에는 긴 내가 맑게 굽어 흐르고 위에는 노송이 울창하여 푸르렀다. 그 서쪽에는 평평한 들이 펼쳐 있다. 임인년(1422년) 봄에 나는 고산읍에 간 일이 있어 이 언덕에 오르게 되었다. 연하 초목이 모두 아름답게 내 눈앞에 깔려 있는데 수석과 송림이 더욱 기이하게 보였다. 이에 삼기라 이름 하여 깎은 나무에 글씨를 써주었더니 이에 현감 최득지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가 처음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써 그러한 뜻에서 사양할 수 없이 되었다.

 

생각하건대 사람의 마음은 물건을 보고 감동되는 것으로 눈을 달리하여 보게 된 그 느낌은 더욱 간절했다. 맑은 물을 보게 되니 나의 천부의 본성을 더욱 맑게 하고 바위가 엄엄한 것을 보니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를 더욱 높게 하여 이 언덕의 세 가지 물건이야말로 어찌 경치가 아름답거나 찌는 더위에 재미있게 논다는 것 뿐이리요.

 

내가 다른 사람과 소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뒷날에 선비들이 이 언덕에 오르면 느끼고 뜻을 두게 될 것으로 생각 할진대 마음을 삼가 하고 뜻을 길러내는 기회가 족히 되어야 할지라. 또한 목욕을 하고 풍월을 하는 행락도 있을 것으로 전날에 내가 이름을 지은 뜻이 거의 같을지다.」

 

 

 

옛 선조의 마음을 읽어보다

 

정자에 걸려있는 삼기정이란 편액은 강암 송성용이 썼다고 한다. 작은 정자에 올라 주변을 들러본다. 옛날 선조가 느낀 삼기는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이곳의 풍광은 아직 옛 모습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바위가 있어, 아마도 과거에는 이곳이 꽤 큰 바위 등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크지 않은 정자 마루에 앉아 선조의 숨결을 느껴본다. 아주 오래 전 내 선대인 하연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이렇게 호흡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만, 이다음에 또 누군가 나의 후대도 우연찮은 기회에, 이렇게 나를 기억할 수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옛 말씀에 ‘후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라’고 하신 것인지. 오늘 또 삼기정이란 작은 정자에서 또 하나의 공부를 한다.


 

하연(1376∼1453)

선조 하연은 경상도 진주(지금의 산청)에서 태어났다. 고려왕조 최후의 충신이었던 정몽주(1337∼1392)로부터 학문을 사사한 하연은, 조선 태조 때인 1396년 과거시험 병과 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많은 요직을 거친 하연은 태종 이방원 시절에는 ‘사헌부 간관(諫官)’으로 일하면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한 태도를 보여 임금이 직접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로 인정받은 관료였다.

 

1423년 대사헌, 1425년 경상도관찰사, 1431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1436년 예조와 이조 판서를 거쳤다. 70세인 1445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영의정 황희(1363∼1452), 좌의정 신개(1374∼1446)와 함께 ‘조선의 빛나는 삼정승 시대’를 연 주역이기도 했다. 당시 세자 섭정을 하고 있던 문종의 스승으로도 활동한 하연은, 좌의정을 거쳐 세종 39년인 1449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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