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는 열녀와 효부, 효자각 등이 서 있어 더 엄숙해

 

마을에서는 이 나무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누구는 천년이라고 하고, 누구는 1,200년이라고 한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어 우리나라 최고령 은행나무라고도 한다.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76영월 하송리 은행나무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수백 년만 되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입을 벌린다. 그 세월이 가늠이 되질 않아서이다. 그런데 1,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는 소리에, 나무가 그렇게 신령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나무의 높이는 29m, 가슴높이의 둘레가 14.5m에 밑동의 둘레는 13.8m에 이른다, 가지는 동서로 22.5m에 남북으로 22m나 된다고 하니 가히 일품이다.

 

답사 길에서 만난 영월 은행나무. 지나는 길에 이정표를 찾아들어간 마을에서 만난 은행나무는 한 마디로 대박이었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문화재 등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흡사 로또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다. 영월의 은행나무를 보았을 때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하송리 은행나무는 처음에는 이곳에 대정사(對井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 은행나무의 원래 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새롭게 난 줄기가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험한 은행나무로 마을에서 신목으로 제사를 지내

 

이 나무에는 옛날부터 커다란 뱀이 살았어.”

뱀을 보신 분이 있으세요?”

어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줄로 알고 있지

이 나무는 얼마나 살았다고 해요?”

천 이백년도 더 되었다고 하네. 아마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지도 모르지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워낙 영험한 나무라, 음력 712일에 이 나무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인가 나무 주변에는 가급적이면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은행나무에게 불경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나무 주변을 축대를 쌓고 보호를 하고 있다.

 

신령한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그 나무의 수령조차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을주민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로 기억을 하고 싶어 한다. 잎이 떨어지기 전의 모습은 어떠할까? 내년에는 여름철 은행잎이 무성할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그것도 음력 712일에. 아들을 점지하는 나무라면, 그보다 더한 것도 치성을 드리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주변에 효자와 열녀각이 자리하고 있는 뜻 깊은 마을

 

이 나무가 더 신령스러워 보이는 것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하송리 한편에 작은 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온양방씨 열녀각, 경주이씨 효부각, 그리고 김지룡 효자각과 엄윤 효자각이다. 은행나무의 수령만큼이나 오래도록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오랜 세월 효자와 열녀가 없었겠는가?

 

열녀 온양방씨는 17세에 엄병수에게 시집와 4달 만에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까지 보양하면서 살았다. 고종 10년인 1873327일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4달만에 남편과 사별했으니 자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부모까지 조양했다고 하니 가히 그 효성을 어찌 칭찬하지 않겠는가?

 

효부 경주이씨는 김지학의 처로 가족들이 출타 중에 시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무는 단지요법으로 시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다. 효부각은 고종 4년인 1867420일에 정문이 새워졌다. 요즈음을 살아가는 우리네들에게는 단지 옛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그 정성이 갸륵하다.

 

효자 엄윤과 효자 김지룡 역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들이다. 답사길에서 우연히 만난 은행나무와 열녀, 효부, 효자각. 이런 뜻 깊은 것들을 만나면 피곤함이 가시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아 아니라, 아름다운 인물들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덕사는 신라 문무왕 8년인 668년에 의상조사가 지덕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조선의 비운의 왕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유배당할 때, 절 이름을 노릉사(老陵寺)’로 고쳤기도 했다. 후에 단종의 능인 사적 제196호인 장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영조 2년인 1726년에 보덕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덕사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절이다. 영월읍내서 찾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장릉을 찾아가는 길에 들릴 수 있는 절이기 때문에, 큰 불편을 겪지 않아도 좋은 곳이다. 이 보덕사에는 수령 600년 이상이 된 느티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긴 역사의 질곡을 그대로 받아들인 곳이란 생각이다.

 

 

화려한 공포가 돋보이는 극락보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10이 소재하고 있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인 극락보전은 고려 의종 15년인 1161년에 운허선사와 원경국사가 늘려 지었다고 전한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면 가운데 칸은 5개의 빗살문, 양 옆칸에는 각각 3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며 현판은 김규진이 썼다. 현재 보덕사의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건축물이다. 아마도 고려 때 지은 극락보전은 유실이 된 듯하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원래 아미타불은 법장비구였다. 아미타불을 다른 명칭으로 무량수여래불이라고도 부른다. 아마타불은 서쪽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며, 석가모니가 살아생전 그의 부친인 정반왕이 아미타불에 의지하여 극락세계를 가실 것을 권고한 일화는 유명하다.

 

보덕사, 왜 슬픔이 일까?

 

극락보전으로 들어가 참배를 한다. 그저 습관적으로 절을 찾아가면 제일 먼저 중심 전각을 찾아보는 것이 일이 되었다. 20년 넘게 다닌 답사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서원을 할 수밖에. 그런데 갑자기 슬픔이 말려온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도. 아마 이곳이 단종의 원찰이기 때문이었나 보다.

 

 

사실 보덕사를 찾아가기 전 먼저 장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청령포며 관음성, 자규루까지. 그 모든 곳에 단종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모습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참이나 그렇게 맥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는가 보다. 인기척에 놀라 정신을 차린다.

 

밖으로 나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신신각, 사성전. 해우소까지 한번 들러보지만 쉽게 아른 가슴이 가시질 않는다. 산자락 밑에 보이는 작은 부도 하나가 마음을 더 쓸쓸하게 만든다. 도대체 누구의 부도일까? 부도란 그 절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입적하신 분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 부도는 어느 스님의 것인데 이리 초라한 것일까?

 

 

올 봄에는 영월로 가고 싶다.

 

영월은 서너 번을 답사를 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찾을 때마다 비가 뿌렸다. 왜 그리도 철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찾아갈 때마다 비가 뿌렸는지 모르겠다. 영월을 들어설 때까지도 말짱하던 날씨가 영월만 들어서면 이상하게 비가 왔다는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영월은 늘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올 봄에는 영월을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이미 다녀온 지가 수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날을 잡아 영월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싶다. 눈만 감아도 여기저기 돌아볼 곳들이 눈에 삼삼하다. 그곳에 가면 또 어떤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해가 지나며 그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으려는지.

강원도 영월군 북면 문곡리 산3번지 일대에는 천연기념물 제413영월 문곡리 건열구조 및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있다. 영월군 문곡리 연덕천 가 절벽에 있는 건열구조 및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약 45억 년 전에 생긴, 오르도비스기 하부고생대 지층에 형성되어 있다.

 

지구는 생성된 이래 지금까지 많은 멸종을 겪어왔다. 지구가 멸종할 때마다 생명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면, 자연은 놀라운 치유력으로 그 멸종을 막아냈다. 그 첫 번째의 대멸종이 바로 오르도비스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5천 만 년 전에 고생대 대멸종인 오르도비스기가 있었는데, 오르도비스기는 48830만 년 전 캄브리아기 멸종으로 시작해 4460만년 동안 계속되었다.

 

 

오르도비스기는 지질 시대의 하나로, 고생대의 캄브리아기 이후 실루리아기 이전의 시대로 약 44천만 년 전부터 5억 년 전이다. ‘오르도비스(Ordovice)’의 음역어는 오도(奧陶)’이다.

 

희귀한 지질구조인 건열구조

 

영월군 문곡리 연덕천 변 절벽에 있는 건열구조 및 스트로마톨라이트는, 4~ 5억 년 전에 생긴 오르도비스기 하부고생대 지층에 형성되어 있는데, 당시의 퇴적환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학술적 보존가치가 매우 높아, 이를 보존하기 위해 이 일대 205,091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건열구조란 얕은 물 밑에 쌓인 퇴적물이 물 위로 나와 퇴적물이 마를 때, 퇴적물이 줄어들거나 오그라들면서 생긴 틈이 그대로 굳어져 형성된 지질구조이다. 이는 이 지역이 과거에 물 밑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학술자료가 된다.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는 이 지구상에 출현한 최초의 생물 중 하나인 단세포 원시 미생물(남조류) 위에, 작은 퇴적물 입자들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퇴적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선캠브리아기(7억년~10억 년 전)와 중생대 백악기(1억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에서 아주 드물게 발견되고 있는 희귀한 지질자료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지금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계속 생성되고 있는데, 특히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의 샤크베이에서 많이 자라고 있다. 이들 구조가 발견된 암석은 돌로마이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돌로마이트 내에는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형성된 증발암 광물인 석고 결정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퇴적층은 현재 서해안의 조간대와는 매우 다르다. 이 퇴적층의 형태는 저위도(적도근처) 지역에서 매우 건조한 기후의 영향을 받으며 퇴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보면 화성을 본떠 조형한 ‘수원화성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을 바라보고 우측 도로 쪽으로 보면, 비와 함께 탑의 형태로 조형한 구조물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누군가 조각이라도 해 놓은 듯하지만, 사실 이 조형물은 정조의 태를 묻은 태실을 그대로 모사하여 만든 구조물이다.

 

원래 정조의 태실과 비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에 소재한다. 강원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태실은 조선조 제22대 왕인 정조의 태를 모셨던 곳으로, 그 앞에는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한 비가 놓여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는 모형 태실과(위) 영월에 있는 강원 유형문화재 태실 및 비(아래) 

 

태실도 수난을 당한 정조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작은 돌방이다. 전국에는 태봉, 태재 등의 명칭이 붙은 수많은 태를 묻은 곳들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충청도 진천현의 태령산에 김유신의 태를 묻고 사우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태실의 풍습은 매우 오래된 듯하나, 조선시대 이전의 태실은 찾아볼 수 없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험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정조이산은 조부인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당론의 조화를 이루었고,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을 활발히 하여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정조의 태를 안치했던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영조 29년인 1753에 안태사 서명구에 의해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태봉에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국왕이 된 뒤 석물을 추가하는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민폐를 우려하여 후일로 미루었다. 그 뒤 정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순조 원년인 1800년에 가봉을 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현재 영월에 남아있는 정조의 태실은 1929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국의 태실을 창경궁 안으로 옮길 때, 태항아리를 꺼내 관리상의 이유로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태실과 태실비는 광산의 개발로 매몰되었던 것을 수습하여, 1967년 영월읍에 소재한 KBS 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원당형 부도를 닮은 정조의 태실

 

정조의 태실은 모두 2기가 남아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의 사찰 등에서 스님들의 사리 등을 모셔 놓는 팔각 원당형 부도를 연상하게 하는 형태로 조성하였다. 비교적 꽃무늬나 도형을 장식이 많은 태실을 안치하고, 석조난간을 돌렸다. 다른 한 점은 원통형의 석함 위에 정상부분에 원형대를 각출한 반구형 개석이 놓여 있다.

 

태실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귀부에는 귀갑문과 하엽문을 이수는 쌍룡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그사이에는 구름문양을 채웠다. 비의 몸돌은 이수와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전면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후면에는 ‘가경 육년시월이십칠일 건(嘉慶 六年十月二十七日 建)’이라 종서로 음각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앞뜰에 놓인 정조대왕의 태실과 비. 수원이라는 곳은 정조대왕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태실의 조형물에 대해 무관심한 듯하다. 곁으로 지나치면서도, 안내판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는 이들을 보기 어렵다. 왜 이런 것을 여기 세워야 했는지조차 모르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 역사, 특히 수원과 정조대왕의 역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이 짐승에게서 배울 것은 하나 둘이 아니다. 특히 농촌에서 사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소에게서 배울 것은 더욱 더 그렇다. 흔히 소선생, 혹은 우선생이라고 하는 소는, 옛 선인들은 사람에게 가장 많은 것을 준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소 한 마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저 짐승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다.

 

소에게서 배우게 되는 세상살이. 그리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말없이 따라하는 우직한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은 어리석게도 보이지만, 그것이 주인에 대한 충심인지도 모르겠다. 소와 동행을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세상을 배운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를 돌아보고,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소를 몰고 가는 여인'.  지금은 어디를 가도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더욱이 차도 한 편으로 걷는 소는, 절대로 포장이 된 도로 위로 올라오려고 하지를 않는다.

 

소는 절대로 포장도로 위로 올라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버티면서 땅만을 밟고 있는 소. 우직함일까? 아니면 생명을 지키기 위함일까?

저 멀리 굽이길을 돌아설 때까지 한 번도 도로를 밟지 않고 땅으로만 걷는 소

 

소를 끌고 가는 여인이 잡아 끌어보아도, 도로 위로 올라오지 않는 우직한 소. 한낱 짐승이지만 예의를 아는 것일까? 아니면 도로 위로 오르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저 멀리 굽이치는 길을 돌아설 때까지 한 옆으로만 걸어가는 소와 여인. 그 광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영월읍의 합수머리. 다리쪽에서 흐르는 물이 서강이다. 사진 밑에 우측으로 오르면서 동강이 된다.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이, 정선의 아우라지를 만나 조양강을 이룬다. 그리고 이 물이 오대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주천강, 서강)과 만나는 영월의 합수머리에서 남한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동강의 길이는 56㎞에 달하며, 서강은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 선암마을에서 시작하여, 단종의 첫 유배지인 청령포를 감싸 안으며 영월읍 합수머리에서 동강과 만나 남한강으로 흐른다. 

 

합수머리 동 서강이 모여 큰 물을 이루면서 강의 이름이 남한강으로 바뀐다.

 

물이 맑고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널려있다는 동강과 서강. 그리고 그 물이 합수머리부터 남한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어 흐르는 구간에도 아름다움은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찢기고 할퀴어진 남한강은 이제 그 옛 모습을 다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합수머리에서 바라보는 동, 서강과 남한강이 애틋하게 다가오는가 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