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는 1660년 경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섯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물이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고개를 숙인 자세의 목조여래좌상

 

쌍계사 극락보전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인 쌍계사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92cm로 좁은 어깨에 머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나발이 촘촘하고,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이마 위에는 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에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은 이마가 넓고 귀가 어깨 위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눈두덩이와 양미간이 각이 져 조선후기 제작된 불상의 전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두터운 법의자락은 오른쪽 어깨에 짧게 늘어져 반전하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일부 대의자락이 왼쪽 어깨로 넘어가게 조형하였다. 왼쪽 어깨의 법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법의자락과 겹쳐져 유려한 U자형을 이룬다. 하반신을 덮은 법의자락은 중앙의 S자형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짧게 늘어져 있다.

 

법의 안쪽에는 복견의를 입고, 가슴을 가린 승각기를 끈으로 묶어 윗부분에 5개의 앙연형 주름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법의자락이 목 주위와 등을 V자형으로 덮어 조선후기 불상의 후면에 나타난 표현과 차이를 가진다. 따로 제작한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이지만, 이와 같은 손의 자세는 조선후기 제작된 아미타불을 비롯한 약사불과 지장보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좌는 연꽃이 위를 향한 앙연의 연화좌와 삼단을 이룬 팔각대좌가 한 쌍을 이루고, 팔각대좌 중단에 하늘을 날고 있는 용과 천인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봄기운이 느껴지는 쌍계사 다시 돌아보고 싶어

 

절은 그 그곳에 있다. 산이 있어 산에 오르듯 절이 그곳에 있어 절을 찾는다. 문화재 답사를 하기 위한 순례지만 절을 찾아가면 꼭 한 가지 서원을 하고 다닌다. 하다보면 한 가지가 넘을 수도 있지만, 우리 주변의 모든 아픈 사람들. 그것이 몸이 되었던지 마음이 되었던지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가시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날도 여래좌상 앞에 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서원한 것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가진 자들의 끝없는 욕심 속에서 민초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 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서원한 것이다. 봄이 오는 길녘에서 찾아간 대부도 쌍계사. 그리고 극락전에 좌정하고 있는 마애여래부처님.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소식이 전하는 날 다시 한 번 찾아가고 깊은 곳이다.

 

4일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오랜만에 답사를 하리라 마음을 먹었기에, 모든 일을 젖혀두고 길을 나섰다. 오늘의 일정은 안산시 상록구 초지동에 위치한 조선 초기에 쌓은 평산성인 별망성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수원 화성을 늘 돌아보면서 전국에 있는 성곽을 다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그래도 4~5년 전에는 한 해에 5곳 이상의 성을 돌아보았으나, 이제는 고작 1년에 한 두 곳 밖에는 돌아보지 못한다. 그만큼 하는 일이 바빠진 것인지, 아니면 게으름을 떠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매일 바쁘게 사는 것을 보면 게으름을 떠는 것은 아닌 듯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74호인 별망성지는 새로 복원을 한 곳이다.

 

 

바다에 근접해 있는 평산성

 

예전 별망성이 있던 곳을 여곶또는 초지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별망성은 바다에 근접해 있는 야산의 능선을 연결하고, 남쪽으로는 해안에 닿아 평지를 감싸 안으며 축성이 되었다. 별망성은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축성한 해안 평산성이다. 별망성은 15세기 이전에 이미 축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별망성은 조선 초기 남양만을 거쳐 해안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그렇기에 높지 않은 산에서 바닷가까지 성을 잇대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초기의 기록에 이곳에 수군만호영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초자양영은 효종 7년인 1656년에 강화도로 옮겨 가면서 폐지되었다.

 

 

1988225m를 복원 해

 

별망성지라는 안내판에 보인다. 별망성을 오르는 입구 주차장에는 차 한 대 댈 공간이 없다. 근처에 공사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의 차인 듯하다. 차를 피하여 계단을 오른다. 그저 얼마 오르지 않아 성벽의 안에 쌓은 토축이 시야에 들어온다. 둘레가 1,040m에 성벽의 높이는 1.2~2.1m이었다고 기록에 보인다.

 

이렇게 남아있던 성벽도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을, 1988년에 일부 복원을 하였다. 현재의 성벽은 복원한 것으로 길이가 225m에 높이 1.45m 정도이며, 지형에 따라 높낮이가 약간씩 차이가 난다. 성벽은 바깥벽은 수직에 가깝게 쌓았으며 안쪽은 완만하게 흙을 다듬어 토축으로 쌓았다.

 

 

계단을 오르니 이곳에 별망성이 있었음을 알리는 비가 한 기 보인다. 앞으로 나아가니 치성이 돌출되어 있다. 성 위를 걸어 한편 끝으로 나가 성 밖으로 걸어보았다. 높지 않은 성벽은 그저 편안히 걸을만한 그러한 길이다. 복원한 성벽에는 두 곳의 치성이 보인다. 한편은 성이 해안으로 내려가는 곳에 있어 시야를 확보하기에 편하게 조성하였다.

 

250년 정도 존속했던 별망성

 

이 성 안에는 군대가 머물렀던 60정도의 편평한 터가 있었으며, 그 언저리에서 자기와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문헌 자료나 기록으로 볼 때 조선조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별망성. 17세기 중엽에 폐기되기까지 약 250년 정도 서해안의 방어를 담당하던 중요한 성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원의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이기도 하다. 수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 화성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비해, 수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러할까? 그 점은 늘 의문으로 남는다. 성벽을 돌아보면 주변에 산재한 쓰레기들과 반려견의 분비물들이 널려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아직 시민의식이 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쓰레기는 외지에서 찾아 온 사람들이 버리고 갔다고 쳐도, 반려견의 분비물은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심지어는 사적 안에 버젓이 반려견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저 정도면 시민의식이 아예 실종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침 일찍 찾아간 별망성지. 수원 화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참 어떤 때는 개들을 바라보다가 그냥 웃고 말 때가 있다. 아무래도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다가 보면, 이런저런 견공들을 만나게 된다. 절집에서도 만나고 산에사도 만난다. 언느 마을의 집 울안에서도 만나고, 그냥 싸돌아 다니는 녀석들도 만난다.

 

그렇게 만난게 되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하자면 참 끝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원래 짐승들의 마음을 아직은 헤아리지 못하고 답답한 인사이다보니, 남들처럼 그 녀석들에 대해 그리 살가운 글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저 보이는 그대로 적는 수 밖에.

 

 

실눈 뜨고 비둘기 감시하는 진돌이

 

안산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마당에 묶인 진돌이(이름은 순전히 내 마음대로) 한 마리를 보았다. 녀석 갑자기 날이 더워서인가 그냥 축 늘어졌다. 아마도 한 여름 '늘어진 개팔자'라는 것이 저런 모양인가 보다. 그런데 녀석의 밥 그릇에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바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든 것이다.

 

그런데 이녀석 하는 꼴이 웃긴다. 그냥 누워서 죽은 듯 한다. 그리고 슬그머니 실눈을 뜨더니 비둘기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비둘기가 조금 가까이 가도 그대로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비둘기가 가까이 가도 꿈쩍도 하지 않던 녀석. 막상 밥그릇 쪽으로 비들기가 발길을 옮기자 그때서야 고개를 조금 틀아본다.

 

비둘기는 기척에 놀라 날아가버렸다. 녀석 그래도 나와보지도 않는다. 꿈쩍도 않고 실눈을 뜨고 비들기를 바라보는 녀석. 아마 하도 많이 비들기들에게 밥을 뺐겨, 이제는 거의 도가 퉁한 듯하다.

요즘 하라는 문화재 답사는 하지 않고, 이런 짓만 하고 있다. 그러나 머 문화가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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