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법흥동에 가면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이 있다. 임청각은 중종 14년인 1519년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 이씨인 ‘이명’이 지은 고택이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있다. 70여 칸이 남은 현재의 집안을 둘러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집이다. 과거에는 과연 어떠했을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임청각은, 독립 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1858 ~ 1932)의 생가이다. 석주 이상룡은 아들과 손자가 모두 독립운동을 했던 집안으로, 삼대가 독립운동을 한 유공자다.

 

 

주거공간이 구분된 임청각

 

임청각은 흔하지 않게 보물로 지정이 된 집이다. 우리나라에 고택 등이 보물로 지정이 된 경우는 경주 안강읍에 소재한 보물 제413호인 독락당 등 몇 채에 불과하다. 그만큼 임청각은 독특한 구성과, 오랜 세월 원형을 잘 보존한 고택임을 알 수 있다.

 

이 임청각은 남녀의 주거공간이 매우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건물의 위계질서가 명확함을 알 수 있다. 별당형식인 임청각의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은 사랑채로, <정(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하는 군자정은, 임청각의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좁은 지하통로를 통해 다가선 군자정

 

지금은 앞으로 철로가 지나고 있어서, 좁은 지하통로로 들어가야 하는 군자정.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정자로 오를 수 있는 돌계단이 있어, 나그네들이 들어오기에 편하게 만들었다. 안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또 하나가 나 있어,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기에 불편함이 없이 만들어 놓았다. 문은 나무로 짜서 양편으로 열리게 만들었으며,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계단이다.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쌓아 기단을 놓고, 그 위에 한편은 담으로 둘러 온돌을 놓았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장초석을 이용해 높임 누마루를 놓아 운치를 더했다. 높임마루 앞으로는 작은 연못을 두어, 주변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임청각의 주인이 남다른 건축미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자나 누각은 대개 하나의 개별 형태로 떨어져 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는 사랑채로 사용하는 누정은 사랑채 한편을 돌출시켜, 누정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가독의 경우이다. 하지만 임청각의 군자정은 집 안에 사랑채를 정자를 지어, 사람들과 교류를 통하게 하였다는 것이 의미가 크다.

 

요즈음 사람들 군자정에서 소통의 의미를 배웠으면

 

요즈음 어느 계통에 사는 사람들이나 서로 소통이 안 되는 바람에 목소리들을 높이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이 군자정의 지어진 형태를 보면서 주인의 마음을 읽어본다. 밖에서 들어오는 과객들조차 마음 편하게 오를 수 있도록 꾸며 놓은 군자정. 지금은 철길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지만, 그 예전에는 앞으로 흐르는 도도한 물줄기를 바라다보면서 시흥에 취했을 것 같다.

 

 

수많은 정자들이 서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군자정은 세상 속에서 스스로 군자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주인의 여유 있는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더 멋진 정자라는 생각이다. 오늘 군자정을 기억하면서, 세상을 사는 지혜 한 자락을 배운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을 나와 안동 쪽으로 가는 큰길을 벗어나, 마을 안으로 난 작은 길로 접어들면 우측에 우뚝 선 전탑이 보인다. 보물 제57호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이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소재한 이 전탑은 통일신라 때의 작품이다.

 

조탑리 전탑은 안동 동부동의 전탑과 같은 양식으로 축조가 되었다. 탑은 흙으로 쌓은 기단 위에, 화강석으로 몸돌을 만들었다. 탑의 높이는 8,65m이고, 기단의 너비는 7m이다. 남면에는 감실을 내었고, 감실 양 편에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다. 인왕상은 아직도 힘이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조각 기법이 뛰어나다. 천년 세월을 이 인왕상이 전탑을 지킨 것인지도 모른다.

 

돌과 벽돌로 쌓은 희귀한 전탑

 

1층 지붕돌부터는 한 변이 27cm에 두께가 5,5cm가 되는 벽돌을 사용하여, 어긋나게 쌓아올렸다. 몸돌은 1층의 높이에 비해,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보존 상태는 깨끗하다. 다만 조선시대에 수리를 거치고, 1917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전탑들은 일반 석탑에 비해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공을 들였을 것 같다. 국보 제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을 보더라도, 그 탑을 세우기 위한 공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밭 가운데 쓸쓸하게 서 있는 이 전탑을 보면서 우리의 문화재들이 참 수난을 많이 당했음을 느낀다.

 

이곳을 찾았을 때 누군가 주변에 똑 같은 크기의 고무 통에 연꽃을 수도 없이 심어놓았다. 커다란 불심이라도 작용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쓸쓸히 서 있는 보물인 탑이 너무 한적해 보였기 때문인가.

 

 

 

뛰어난 전돌 쌓기로 조성한 탑

 

이 조탑리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1층의 몸돌은 화강암을 이용했으며, 위로는 전돌을 사용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6~7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한 마디로 조탑리 5층 전탑은 일반적인 전탑의 형태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조성을 해 눈길을 끈다.

 

아무리 열변을 토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문화재를 사랑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리 문화재 역시 남다른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온전히 보존할 수가 없다.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 주변에 놓인 고무 통 속에 연꽃이 만개를 할 때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