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명창 노경미가 불교 범패(梵唄) 음반 깨침의 소리’(신나라 뮤직)를 발표했다. 음반에는 범패 복청게’, ‘천수바라’, ‘도량게’, ‘다게’, ‘향수나열’, 그리고 사다라니바라등 총 11곡이 실려 있다. 모두 홋소리로 부른 범패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21호 휘몰이잡가 이수자인 노경미는 경기소리꾼이다. 범패를 부르는 범패 소리꾼이 아니라 40년 넘는 세월 동안 민요와 잡가를 주업으로 해왔다. 그런데 그녀의 공연 무대에는 여타 경기 소리꾼들과는 다른 레퍼토리(연주곡목)가 늘 고정적으로 오른다. 하나는 범패이고, 하나는 휘몰이잡가다.

 

불교의 성음인 범패

 

범패(梵唄)는 불가의 성악을 말한다. 범패는 말 그대로 인도 바라문(婆羅門.브라만)의 소리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소리()를 의미한다.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함께 3대 성악곡으로 분류됐다. 홋소리, 짓소리, 화청으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 화청을 제외한 홋소리와 짓소리는 전문 범패승이 아니면 좀처럼 부르기 힘든 소리라서 범패승조차도 웬만하면 축약해 부르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노경미는 화청에 더해 홋소리 범패를 공연 무대에서 선보여 왔다.

 

그녀의 범패가 처음부터 대중들의 눈과 귀를 잡아맨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경기소리를 듣고자 했던 많은 청중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세속과 소통하며 대중화된 화청이나 소릿조 회심곡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원곡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한테 원곡은 때론 낯섦 그 자체였다.

 

하지만 노경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원곡이 갖는 가치와 중요성을 관객들한테 전했고, 이런 노력이 결국 관객의 마음을 열게 했다. 그녀가 부르는 범패는 종묘제례악, 가곡, 판소리 등과 함께 영산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원형 예술 보존과 창조적 계승에 대한 노경미의 남다른 열정과 고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경기소리꾼의 특징이 살아있어

 

노경미의 범패는 종교적인 원숙미, 불교적 신비감에 더해 수십 년 이상 지켜온 경기소리꾼만이 지닌 특유의 시김새에서 나오는 음악적 정갈함과 단아함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이유로 어쩌면 범패승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범패라고 할 수 있다.

 

노경미의 불교음악이 여타 불교음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음악성에 더해 국보급 반주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 때문이다.

 

노경미는 민요나 잡가와 달리 불교음악 연주만큼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연주자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연주자들의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를 태울 때 묘음(妙音)이 완성되고 그것이 사바(娑婆)의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다 믿고 있으며, 이러한 음악철학이 그녀의 불교음악에 내재해 있다.

 

이번 음반 작업에서도 그녀의 이 같은 음악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대금과 피리는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인 이생강 명인과 그의 아들이자 대금산조 전수교육조교인 이광훈이, 북과 태징은 김포 승가대학교 교수이자 쌍암사 주지인 성마 스님이 각각 연주했다.

 

또한, 장고 및 꽹과리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휘몰이잡가 인간문화재인 박상옥 명창이 반주했다. 이 밖에도 태평소에 김필홍, 장고에 이관웅, 가야금 오주영, 해금 신현석, 건반 김쥬리 등 중견급 명인들이 참여했다.

 

 

노경미가 소리꾼이 된 배경은 부친의 시조창이나 상엿소리, 할머니의 민요 가락 등을 들으며 자란 환경이 크다. 그녀는 이미 나이 20대에 대중가요 음반을 취입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20대 중반부터 김경희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박상옥 명창에게는 휘몰이잡가를 배워 이수자가 되었으며 이은주 명창에게는 경기12좌창을 사사해 경기민요 이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실기뿐 아니라 학구열도 높아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졸업하기도 했다.

 

노경미의 소리는 언제 들어도 높고 시원한 발성이 인상적이며 긴 호흡으로 다이내믹을 살려 나가는 역동성이 가히 일품이다. 25회 전주대사습놀이 민요부 장원, 전국국악경연대회 대구국악제 종합 명인부 대상, 그리고 그의 이름을 걸고 꾸준히 개최해온 개인발표회 등을 통해 그의 공력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어느 한 분야에 푹 빠져 일생을 그 길로 가면서 앞뒤를 안돌아다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프로 근성을 갖고있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흔히 쟁이라는 표현을 한다. 쟁이는 장인(匠人)의 비속어다. 장인은 어느 분야에 우두머리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대를 살면서 명인(名人)이니 명장(明匠)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쩐지 쟁이가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김포 통진두레놀이 상쇠인 윤덕현옹(68, 김포시 통진면 옹정리)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옹정리에서 태어난 윤덕현옹은 어려서부터 곡창지대로 유명한 김포의 소리를 듣고 자랐다. 통진은 여주, 이천과 함께 질 좋은 진상미를 생산하는 곳이다. 너른 평야에서 농사를 주로 짓던 마을에서 태어나 자연히 많은 소리와 두레 풍장 속에서 성장기를 거친 운덕현옹은 군 제대를 하고 나서 바로 마을의 풍장패를 규합해 옹정농악대를 창단했다. 이미 그때부터 쟁이의 길로 들어선 윤덕현옹은 집안을 돌보는 일은 모두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당시 남사당의 마지막 잽이들로 구성된 남문영, 송순갑, 이돌천, 최승구 등이 함께 조직한 걸립패에 가담을 했다.

 

좋고도 또 좋구나 금실금실 잉어들아 오염의 감바위 어디다 두고/ 너만 홀로서 에루화 여기 왔느냐// 에헤 에헤이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방아가 좋소//

 

마을에서 듣고 자란 소리에 쇠가락까지 익힌 윤옹은 몸에 배인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마을을 떠나 전문 잽이들과 한판 어우러져 전국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1982. 1958년부터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와 정착을 한 것은 20여년이 훌쩍 넘어서였다.

 

 

걸립패에서는 소고를 치면서 버나를 돌렸다. 남사당패의 버나는 걸립패들의 기예 중에서도 고난이도를 자랑한다. 지금처럼 제작된 버나를 돌리는 것이 아니고 마을에 들어가 물을 한 대접 얻어 마신 대접을 그대로 담뱃대에 말아 올려 돌린다. 가히 그 재주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게 유랑을 하다가 집에 들어오니 그나마 고향에 있던 농사도 다 사라졌다.

 

집을 나서 유랑을 하는 동안 집안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큰아이는 21세 때 간경화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금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았다. 부인이 아들을 잃은 슬픔과 힘든 생활로 인해 중풍이 와서 현재도 수년째 거동을 못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한다.

 

부인은 어렵게 일어나 앉아 취재에 응하고 있는 윤덕현옹을 보다가 정확치도 않은 말로 참견을 한다. “집은 아예 거들떠도 안보고 미쳤었어요. 아이는 오늘 내일 하는데 그 때도 학교에 가서 아이들 농악을 가르치고 있었으니아직도 그 서러움이 마음에 앙금 져 있어서인가 남편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가 않다.

 

윤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오직 한 길로 달려 온 40년 넘는 세월이 참으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오랜 동안 집안일을 소홀히 해서 아내에게 미안해 할말이 없다고 한다. 옹정2리 마을회관 옆에 붙어있는 살림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윤옹은 그동안 자신의 발자취가 배인 사진이며 각종 물건들을 꺼내 놓는다. 한 짐은 될 것 같은 그 수많은 빛바랜 사진이며 상장 등이 한 인간이 한 분야에 온갖 정신을 쏟은 역사를 말해주고는 있지만 그로 인해 가족이 받은 대가가 너무 컸을 것 같다.

 

 

소리를 하라고 하면 어려운 것이 집사람이 저렇게 되고나서 기억이 많이 없어졌어요. 저 사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제가 항상 곁에 붙어있어야 하거든요. 걱정이 많다보니 예전에 그렇게 부르던 방아타령도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중추절에 적막하야 다자춘에 넋이로다

불탄 자리에 에루화 새 속잎 난다

에헤 에헤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니나노 방아가 좋소

좋고도 또 좋구나 모가지 길쑥 황새들아

논길밭길 어데다 두고 너만 홀로서 에루화 여기 걷느냐

에헤 에헤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니나노 방아가 좋소

 

통진에서는 모를 한 움큼씩 찌면서 하는 소리와 모내기, 김매기 소리가 있다. 너른 평야에서 농사를 주로 짓는 이곳에서는 자연 그 소리도 환경적인 특징을 갖는다. 논배미가 좁은 곳에서는 소리가 유장하고 길게 끌며 나타난다. 그러나 너른 평야에서는 작업을 몰아 하다가 보니 소리가 흥겹고 빠르게 나타난다. 통진의 김매기는 그래서 흥겨움을 더하고 있다. 타령으로 흥을 더해 농사를 짓는 피로를 잊어가면서 풍년을 구가하는 소리다. 김매기에도 신바람을 낸다. 소리는 자진방아로 넘어간다.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내 말을 들어보소/ 에헤널널 상사디여/ 한소리는 높이 받고 또한 소리는 가만히 살짝/ 에헤널널 상사디여/ 일심전력 상사하면 곁에 사람 보기 좋고/ 에헤널널 상사디여/ 먼데사람 듣기 좋아 엉덩춤이 절로 나네/ 에헤널널 상사디여/

 

그 소리가 좋아서 그 소리에 미쳐 장단을 익히다 보니 평생 업이 되었고, 그 업으로 인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혼자 감당하며 집안 식구들에게까지 대접을 못받고 있지만 윤덕현옹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본인이 그 일이 좋아 그 길로 한 평생을 살아왔기에 자신이 그동안 닦은 기량을 전해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1982년도에 마을로 돌아온 윤옹은 그동안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 및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개인상과 최우수상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김포군의 각 학교를 다니면서 3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통진의 두레풍장과 소리를 전수했다. 1990년도에는 자신이 창단한 옹정농악대를 통진두레놀이로 개명, 1995년 경기도민속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년 뒤인 1997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한 길로만 정진한 결과였다. 1998년에는 통진두레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 기능보유자로 인정이 되었다.

 

지금도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집사람이 저렇게 되고 부터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집사람 때문에 놀란 뒤에 기억이 점점 떨어지고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요

 

젊어서 유랑의 길로 집을 나서 제대로 간수를 못한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 곁을 한시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윤덕현옹이 다시 짐을 꾸린다. 서울 놀이마당에 가서 정초 두레놀이를 한바탕 펼쳐야 해서 다음 날 일찍 서울로 올라가야 한단다. 한평생을 두레의 쇠가락에 미쳐서 모든 것을 그 곳에 쏟은 대가가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윤옹이 있었기에 급격히 변해가는 통진의 고층 빌딩 사이로 한가닥 흥겨운 소리가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200234일자 경기일보 게재. ·사진/ 하주성(민속연구가)

 

2002219일부터 1년이 넘는 시간을 경기, 인천 지역을 돌아다녔다. 지난 자료를 정리하다가 만난 경기 옛소리 기행자료라는 파일을 찾아낸 것이다. 이 파일에는 1년이 넘는 시간을 매주 경기, 인천 지역에 거주하는 소리꾼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생활을 하고 소리에 젖은 사연을 소개를 한 것이다.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경기일보에서 매주 1회씩 문화면 한 면을 통째로 내주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는 동안 55회에 걸쳐 소개를 한 자료가 고스란히 보관이 되어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이렇게 정리를 했지?’ 싶을 정도로 정리를 한 것이다. 55회에 걸쳐 만난 소리꾼만 해도 근 100여 명에 이른다.

 

 

사진과 자료, 신문까지 스크랩

 

사실 이 자료 속에 소리꾼 중 많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2002년이면 벌써 10년이 지난 세월이고, 당시에 소리꾼들의 연세가 70세가 넘은 분들이 상당수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 자료를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당시에는 참 피곤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매주 지면을 채우기 위해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소리꾼을 찾아 길을 나서야 했다. 그 이전에 이미 방송에서 10여년 가까운 세월을 옛소리 소개를 했기 때문에, 소리꾼을 찾아 길을 나서는 데는 이미 이골이 나 있던 참이다. 하지만 정해놓은 기간 동안 빠트리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자료를 하나하나 들추어본다. 지금 같으면 사진을 찍어 외장하드에 보관을 하고, CD에 정리를 하면 끝이 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찍은 사진을 모두 현상을 해야 하고, 자료를 모두 받아 와 파일에 저장을 해 놓았다. 그리고 신문까지 빠트리지 않고 저장을 했으니, 자료치고는 완벽한 자료가 되었다.

 

 

좋은 자료의 보관은 큰 재산이 된다.

 

자료 맨 앞에 보니 당시 썼던 기획서가 보관되어 있다. 그것을 들춰보니 기획의도부터 예산까지 일일이 적은 것이 보인다. 그 기획의도에 보니

경기 인천 지역은 오래 전부터 많은 소리가 전승이 되고 있는 곳으로 지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경기도는 과거 판소리의 한 유파인 중고제가 전승이 되던 지역이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속요(俗謠) 또한 중고제의 음률로 불러지고 있는 것이 상당히 있어 그 중요성을 알게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조 말까지 이 지역에 전해지던 재인청은 각 기예인들이 모인 집단으로 대단위 숭신조합(崇神組合)이었으며, 그들의 소리가 이 지역에 전승이 되고 있는 속요에 많은 영향을 끼쳐서 이 지역의 소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이하 하략)고 적고 있다.

 

기획의도 말미에는 한 지역에 전승이 되는 속요는 그 지역민의 심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그 지역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속요는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된다. (중략) 속요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도출시켜 경기도민의 전통예술에 대한 우수성을 고취시키고,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고 적고 있다.

 

 

10년이 지난 세월이다. 하지만 지금 보아도 참 자료정리를 잘했다고 스스로 감탄을 한다. 55회에 걸친 사진과 관련 사진, 그리고 신문기사까지 있으니 완벽한 자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료가 생명이다. 한 번 쓰고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사용해야 할 자료가 있는 밥이다. 이렇게 정리를 한 자료는 강산이 한 번 변한 세월, 지금은 더욱 가치가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된 셈이다.

 

자료정리의 중요성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자료가 생명이다라는 말은 그래서 명언이라고 생각이 든다. 오늘 이 소중한 자료 덕분에 경기도의 역사 한 페이지를 찾아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슴 뿌듯한 것은, 그 자료 속에 소리꾼들의 소리가 몇 개가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55회에 걸친 기사내용을 사진과 함께 틈틈이 게재하겠습니다)

‘평택이 판소리의 고장이다’ 라고 한다면 거개의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판소리사에서 평택이란 곳은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는 곳이다. 평택이 판소리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 이 곳은 판소리와 함께 예술적으로 뛰어난 경기시나위의 한 류파가 발생을 한 곳이며 풍물의 본거지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에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던 평택이기에 자연 많은 소리와 민속이 전승이 되었으며 그만큼 지금까지도 많은 민속이 전승이 되고 있기도 하다.

 

평양 능라도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명창 모흥갑의 그림 - 적벽가에 능한 모흥갑은 덜미소리를 내면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초기명창 모흥갑의 고장 평택

 

소리의 고장 평택. 일찍 우리는 조선 판소리사에서 평택 출신의 명창인 모흥갑을 만날 수 있다. 모흥갑(1822~1890)은 진위 출신으로 조선조 순조, 헌종, 철종 삼대에 걸쳐 전국의 소리판을 풍미한 명창이다. 모흥갑의 소리는 흔히 통상성이라고 하여서 고음처리가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강산제와 춘향가, 적벽가 등에 능하였다.

 

평양 모란정에서 덜미소리 한번을 내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며 모흥갑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중고제(中高制)는 판소리에서, 조선 헌종 때의 명창 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를 말한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띠며, 첫소리를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다시 낮추어 끊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성행하였다.

 

우표로도 발행이 된 모흥갑의 판소리그림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신위의 『관극시』, 송만재의 『관우희』,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나 ‘무숙이타령’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림속에 남아있는 모흥갑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는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리하는 광대가 모흥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하도 유명해서 판소리학회지인 『판소리연구』 표지를 위시해서 여러 판소리 관계 문헌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그림이 소리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른 시기에 명창들이 야외에서 소리를 할 때 어떻게 했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모흥갑이 어디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경기도 진위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주 난전면 귀동(지금의 구이 부근)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모흥갑은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던 모양이다.

 

 

 

소리꾼들은 득음을 얻기위해 폭포독공이나 동굴독공 등 힘든 학습에 열중했다. 남원 운봉에 있는 '국악의 성지'에는 동굴독공을 익힐 수 있도록 조성을 해놓았다. 겉으로 본 동굴독공 학습장(위) 입구(가운데) 북 등이 놓여있는 동굴 안 학습장소(아래) 

 

그래서 모흥갑의 소리는 학이나 봉황의 울음소리에 비유되었다. 다만 모흥갑의 덜미소리나 그 청이 동, 서편제보다는 당대의 전해지는 중고제의 명창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모흥갑은 평택 진위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모흥갑의 소리를 ‘설상에 진저리친 듯’하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모흥갑이 고음을 잘 내어 그것으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잘했다고 하나,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하는 이별가 한 대목이다. 지금도 조상현이나 성창순 등이 부르는 보성소리 ‘춘향가’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는데,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를 반복하면서 점점 음정을 높여, 마지막에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평택은 명창들과 인연이 있는 고장

 

더욱 평택은 조선조 말 명창 이동백(충남 서천군 종천면 출생)이 이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다가 영면한 곳이다. 이동백은 판소리사에서 ‘전무후무한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록 광대의 족건을 완벽하게 갖춘 소리꾼이었다. 처가인 평택의 한 야산에 올라 소리를 한 후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동백명창.

 

이렇듯이 평택은 우리나라 판소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경기 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의 초기 대명창과 말기 대명창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영면을 했다는 것은 평택이 우리소리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에 평택 진위에 모흥갑 기념비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굿판에는 늘 해학이 넘친다. 예전에는 대감굿을 할 때면, 전문적인 ‘무기(舞技-춤추는 사람)’들이나 소릿광대들이 굿판을 찾아들었다. 대감굿은 지금처럼 한 거리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 거리마다 끝에 질펀한 대감놀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감굿에서 춤을 추고 소리를 하였다.

11월 2일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고성주(남, 55세)의 ‘진적굿(진적굿은 신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자신이 섬기는 신을 위한 굿을 말하다)’ 판은 흥이 넘쳤다. 춤을 추는 무희들과 소릿광대가 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소리를 듣고 자란 타고난 소리꾼

박종국(남, 57세)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어릴 적부터 마을에서 소리꾼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릴 때 시흥 읍내 탑골에 살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집을 지을 때 하는 지경닺는 소리 등 많은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참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요. 그 어린나이에 무엇을 알고 그랬는지. 한 번은 상여를 쫓아가 공동묘지에서 잠을 잔적도 있어요. 밤이 늦었는데도 아이가 들어오질 않으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경찰들에 의해 집으로 갈 수 있었는데, 집에 가서 혼도 많이 났죠.”

굿판에 초청이 되어 부채 하나를 손이 들고 신바람 나게 ‘변강쇠타령’을 불러대는 박종국씨.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의 이수자이던 박종국씨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0호 수표교다리밟기 소리부문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당시 큰 만신 집이 있었는데, 그곳서 구경을 하다가 늦게 들어와 혼도 많이 났다고 한다.

“아마 음악이 저에게는 팔자인가 봅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보컬을 조직해 공연도 하고, 무명가수로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어요."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소리판

그런 끼가 있어서인가 자신에게 맞는 소리를 찾다가 우리소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선소리 산타령의 보유자였던 고 정득만 선생과 현재 서울 휘몰이잡가의 보유자인 박상옥 선생께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 동안 수원에서도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온 박종국씨는 판소리를 마당극화 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하는 등, 많은 공연을 하였다. 언제나 타고난 소리꾼으로 자신의 소리를 잃지 않고 이어간 것이 오늘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인가 보다.

소릿광대는 재담이 뛰어나야만 한다. 판소리의 소리꾼만이 아니라, 어느 소리를 하든지 재담이 없으면 소리판이 영 밋밋해진다. 소리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좌중을 휘어잡는 재담이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박종국씨의 재담은 언제나 재미있다. 수많은 무대에 작품을 올리면서 직접 연출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함께 소리로, 박수로 굿판의 흥을 절정으로 오르게 한 소릿광대. 아마 이 날 장구를 대한민국 최고의 장구잽이라고 하는 장덕화 선생이 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굿판의 흥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우리 굿의 재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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