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수많은 승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구도자의 글을 모색하며, 사시사철 변하는 구룡령의 모습을 눈 안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속초에서 옛 속초비행장 앞을 지나 구룡령을 향해서 가다가보면 구룡령 초입 못 미쳐 좌측으로 선림원지 이정표가 보인다.

 

사람들에게는 ‘미천골’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곳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속한다. 미천골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가족들이 휴양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여름과 가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하루를 즐기고는 한다. 미천골에는 선림원이 있던 사지가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 흥성한 선림원

 

선림원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의 발굴에서 나타난 많은 유물유적들 발견이 된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선림원은 804년경에 순응법사 등이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대에는 선림원에서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씻은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흘러 미천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선림원이 10세기를 전후해 산사태와 대홍수로 매몰되었다고 추정한다. 요즈음 강원도에 내린 집중호우로 근동이 홍수와 산사태가 나서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것으로 보아도 선림원의 산사태의 매몰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선림원지에는 현재 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4점이 남아있어, 9세기 후반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돋을새김한 팔부중상은 곧 걸어 나올 듯

 

선림원지에서는 1948년에 명문이 적힌 신라 범종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선림원이 얼마나 큰 절이었나는 가늠할 수가 없다. 다만 지금 남아있는 문화재를 보고 유추할 뿐이다. 축대를 쌓은 계단을 오르면 보물 제444호로 지정이 된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2층으로 되어있는 기단은,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2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두기씩 8부중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장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며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5단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화려한 장식을 한 석등, 특별한 미를 지녀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 보물 제445호 석등은 선림원지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 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파편이 된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 탑비 귀부 및 이수는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이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의 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와 몸돌, 이수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비머리가 올려져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몸돌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파편을 본을 삼아 재현된 몸돌이라도 현장에 있었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귀부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기법이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몸돌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이수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은 용

 

보물 제447호인 선림원 부도는 일제시대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신라의 전형적인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정사각형으로 조성된 받침돌 위로 기단의 하단, 중단, 상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도는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부도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쌀뜨물이 계곡을 메웠다는 선림원. 그런 이야기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대웅전의 초석으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 이야기다. 이곳을 벗어난 인근 어디에 또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맑은 물이 흐르는 미천골 계곡. 도대체 얼마나 쌀을 씻어야 저 계곡을 다 뿌옇게 물들일 수 있을까? 지난 역사 속의 선림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역사는 그렇게 스러져가도, 그 역사의 흔적은 이리 남아있는 것을.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는 옛 사지인 선림원지에 소재한 네 기의 보물 중 보물 제445호인 석등은 사지 안에 자리한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선림원은 발굴 당시  출토된 신라 범종에 의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기단과 상,중, 하대석을 놓는다. 위로는 덮개석인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올리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보물 제445호인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 팔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받침돌과 머릿돌에 귀꽃을 장식해

선림원지 석등은 아래받침돌과 머릿돌에 같은 형태의 귀꽃을 장식하고 있다. 받침돌인 지대석은 4매의 네모난 돌을 받쳐놓고 그 위에 팔각의 하대를 올려놓았다. 하대의 각 면에는 안싱을 음각하였으며,그 위의 복련에는 팔각에 앙증맞은 귀꽃이 돌출되어 아름답다. 그 위로는 가운데 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이 허리가 잘록해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렀다. 간석의 아름다움 만으로도 이 석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석등의 간석과 화사석은 색깔이 달라 보는이로 하여금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에 파손된 부분을 보수 한 것은 아닌지.


받침돌의 뛰어난 조각과 음각한 안상(아래)

귀꽃이 조형미의 극치

전국에 있는 많은 석등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팔각으로 조형을 한 석등에 받침돌과 머릿돌에 함께 귀꽃을 장식한 예는 흔하지가 않은 듯하다. 화사석은 사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장방형의 액을 마련하고 그 안에 한 구씩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형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지닌다.


장고통처럼 조성한 간석

화사석을 덮은 몸돌은 팔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일부가 깨어져 나간 지붕돌의 귀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다는 인도감 때문인가 보다. 처마의 선은 부드럽게 굴곡을 이루고 있으며, 귀꽃조각과의 만남이 자연스러워 이 석등의 조각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석등의 맨 위에 올린 상륜부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일 이 파손이 된 귀꽃과 상륜부만 온전하다면, 아마도 국보로 지정이 될만한 걸작이다. 장고통처럼 조형한 간석 상, 하의 권운문이나 상대석에 조각한 겹잎앙련 또한 이 석등이 갖는 아름다움이다.


귀꽃을 장식한 머릿돌과 화시석

신라 시대의 석조미술 품 중에서도 뒤쳐지지 않는 훌륭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림원지 석등.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나라의 뛰어난 예술세계를 느낄 수가 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일부의 문화사대주의자들이 우리 문화를 폄하하는 일만 없다면.


양양군 서면 황이리, 양양에서 출발을 하여 구룡령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선림원지는, 미천골이라는 계곡 곁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선림원지에는 4종의 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선림원지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446호는, 홍각선사의 탑비 귀부 및 이수이다. 이 탑비는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이다.

2004년 10월에 선림원지를 답사 갔을 때는 비 받침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남아있었다. 이번 11월 14일 답사를 할 때는 새롭게 조성을 한 비가 새워져있어 완전한 옛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문이 파편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재현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홍각선사 탑비의 재현된 비는 가로 94cm, 세로 173.5cm 정도로 1,340자 내외가 있던 것 중, 710자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새로 몸돌인 비를 세운 이번 답사 때의 모습과(위) 지난 2004년 10월 귀부와 이수만 있을 때의 모습(가운데와 아래)

통일신라 때 세워진 홍각선사 비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 비는 통일신라 때인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탑비는 비받침인 거북이인 귀부와 몸돌, 그리고 머릿돌인 이수로 구분한다. 홍각선사 비의 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넘어가는 시대에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이 거북이는 땅에 납작 엎드린 형태이며,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네 발은 모두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어, 거북이의 발톱이라고 보기보다는 용의 발톱에 가깝다. 이 거북이의 또 하나 특징은 바로 네발에 있는 수염 같은 형태이다. 발에서 나온 이 수염 같은 형태의 조각은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 수염 같은 것은 날개를 대신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리에 붙은 저 조각은 수염인지? 혹은 날개를 상징한 것인지 궁금하다.

특징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예술

귀부의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의 몸돌을 세우는 자리이다. 이곳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소라형의 무늬 위에 안상이 새겨져 있다. 비머리인 이수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는 네모난 안에 ‘홍각선사비명’이라는 전액을 양각하였다. 그 주변에는 온통 운용문을 새겨, 신라 하대 석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비 머리에 보면 두 마리의 용은 서로 마주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두 마리의 용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양편에 자리하고 있다. 비명을 사이로 대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형태이다.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힘찬 조각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새로 조성된 몸돌인 비와 머릿돌인 이수의 앞과 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홍각선사는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이라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비명과 비문의 찬술 관련자, 홍각선사의 생애와 선사가 입적 후 비를 새우게 된 내력 등을 적고 있다.

처음 찾았을 때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한편에 엎드린 듯 보이 던 홍각선사 탑비. 새롭게 조성을 한 탑비로 인해 제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국에 이렇게 비문이 사라진 수많은 문화재들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선림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했기에, 쌀을 씻은 물이 앞을 흐르는 내를 모두 쌀뜨물처럼 만들었을까? ‘미천(米川)골’이란 명칭은 바로 쌀 한 끼 밥을 하기 위해 쌀을 씻은 물이, 하류까지 흘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오대산 자락을 깊숙이 들어가는 곳에 자리한 선림원지. 이곳은 흥각국사가 804년경에 창건한 선림원이 있었던 곳이다.

선림원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선수련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는 대규모의 절로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10세기 경 홍수와 산사태로 매몰이 되었다고 한다. 11월 14일 양양군을 한 바퀴 돌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미천골로 향했다. 몇 번을 들른 선림원지다. 선림원지는 매몰이 되었던 곳인 만큼, 지금도 금당지의 주추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선림원지에 있는 보물 제447호 부도의 기단부와 금당지(아래)

보물로 지정된 부도 안타까워

선림원지를 오르는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한 기 서 있다. 그 뒤편에는 금당지가 있고, 여기저기 석물들이 널려져 있어 이곳이 대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금당지 동편 산 밑에는 부도의 기단이 한 기 서 있다. 원래는 북쪽으로 50m 정도 위편에 서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있는 부도의 기단은 정교한 조각과 함께, 화려한 문양 등을 자랑하고 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나 정교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 부도의 건립연대는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부도는 지대석 위에 상중하로 구분된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석,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는다.




일제의 훼파로 사라진 부도 몸돌

일제는 침략기에 무수한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하고 훼파를 시켰다. 요즈음 문화재 반환운동을 하면서 일부가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들이 강탈해 간 우리의 문화재는 30여 만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도 거의 국보급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 선림원지 부도 역시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이다.

1965년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복원한 것으로 겨우 기단부만 남아있다. 이 부도의 지대석을 훑어보면서 만일 이 부도가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 지대석만 보아도 상당히 걸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재를 훼파한 일제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다.


연화대석에 조각이 된 용은 금방이라도 돌을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

운문룡의 조각은 상상을 초월해

기단부만 남아있는 선림원지 부도. 보물 제447호로 지정이 될 만큼 대단한 걸작이다. 이 기단부는 네모난 지대와 팔각의 하대까지 같은 돌 2매로 구성되었다. 지대석은 땅 위에 들어난 부분만 다듬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하대 8각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상 안에는 교대로 사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하대 위에는 둥근모양의 연화대석을 놓았다.

연화대석 위에는 간주모양의 중대석과 원형의 상대석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위에 부도가 놓여 있어야 하나, 일제에 의해 조각이 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연화대석 표면에는 서로 다투듯 조각을 한 운문룡이 있다. 구름과 함께 조각을 한 용은 발을 힘차게 뻗치고, 금방이라도 연화대석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이렇게 대단한 기단부였다면, 그 위에 올려 진 부도는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사라진 부도가 아쉽기만 하다. 수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선림원지의 부도가 주는 안타까움이,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또 한 번 통곡을 한다. 아직도 그치지 않는 문화재의 훼손이 마음이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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