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51호 파사성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해발 235m 정상을 중심으로 5각형 모양의 둘레로 경사가 가파른 곳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성 둘레는 약 943m로, 높이 4 -5m 견고한 암반층을 기반으로 하여 쌓았다. 잘 다듬은 직사각형 돌을 이용한 초축성벽과 부정형의 쪼개진 돌을 이용한 추축성벽이 있는데, 이는 여러 시기에 걸쳐 축조되어 오늘날 구조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 구조물로는 치 3개소, 문지 2개소, 우물지 1개소, 수구지 1개소 등이 있다. 파사성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성벽 발글조사중 출토된 삼국시대 유물은 대부분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류였으며, 축성기법 또한 신라 산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파사성은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여주, 이천, 양평으로 가는 길목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 여주에서 양평을 흐르는 남한강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어 이 파사성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다.

 

  
아직은 복원이 끝나지 않아 군데군데 무너진 곳을 볼 수 있다.

  
성위로 오르면 양평방향의 남한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고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여주 북방 53리에 있으며, 둘레가 3만8825척의 석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95년(선조28) 3월에 비변사의 요청으로 승 의엄을 도총섭으로 임명하여 수축하도록 하였다. 의엄은 성안에 집을 짓고, 성밖의 구릉과 평지는 둔전을 마련하고 군사의 양식을 마련하였으며, 무너진 성벽은 승인을 동원하여 수축하여 1597년에 공사를 마치었다"고 했다.

 

이 파사성에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파사왕 때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했다. 남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중국을 다녀오고, 여장군은 파사성을 쌓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장군이 성을 다 쌓기전에 남장군이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여장군은 마지막으로 성을 쌓을 돌을 양평군 개군면 석장리에서 날라오다가 놀라는 바람에 치마가 찢어져, 그 마을에 돌담이 쌓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파사성은 미완의 석축산성이라는 것이다.

 

  
파사성은 뚜벅이 여행족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복원이 된 성벽. 견고한 석축산성임을 알 수 있다

전설이야기를 생각하며 천천히 성벽 안으로 난 길을 걸어본다. 아직은 복원이 다 되지 않아 여기저기 널부러진 돌무더기가 오히려 정감이 간다. 잘 복원된 동문지 성벽들이 단단한 석축산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 밖으로 걷다보면 어느새 파사산 정상에 도착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절경이라고 칭찬을 늘어놓는다.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본다. 이 곳은 주변이 모두 30~40m 낮은 구릉지대이기 때문에, 사방 어디를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중요한 전략지라는 것이다.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도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다.

 

  
정상에 오른 뚜벅이 연인들

  
파사성의 정상에 서 있는 안내표지목

  
성 위에서 바라본 여주방향의 남한강.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아이들 손을 잡은 젊은 부부들도 성내를 걷는다. 한 쌍의 연인들은 정상에 올라 밑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환호를 한다. 신라 때부터 수차례 축성을 해 온 파사성. 산 높이나 성벽 길이나 걷기에는 적당한 것 같다. 뚜벅이족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는 최적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정리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할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역사와 건강이 함께하는 파사성. 전설이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산성을 한 바퀴돌아 산성 밑에 자리한 막국수촌에 들려,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에 산성의 가을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곳이기도 하다. 

삼년산성, 3년간이란 시간을 들여쌓았다는 석축 산성이다. 신라 자비 마립간 13년인 470년에 처음으로 축조를 하였으니, 성을 쌓은 지가 무려 1,540년이 지났다. 그 뒤 소지 마립간 8년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의 장정 3천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했다.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 일대에 소재한 이 삼년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삼년산성은 5세기 후반 신라의 석축 산성을 쌓는 기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 초의 석축산성, 그 대단한 성 쌓기

이 삼년산성은 신라가 서북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소중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성의 총 길이는 1,680m 정도이고,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 등이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토기조각과 유물이 발견이 되어, 이 성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을 하기 위한 전쟁시에는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성을 공략하다가 크게 패전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삼년산성은 견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성의 높이는 최고 22m에 달할 정도로 지형을 이용해 높게 쌓았다. 성벽위의 폭은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빗길에서 삼년산성을 걷다

비가 뿌린다. 그치려니 생각했던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를 않는다. 성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들어섰다. 사적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삼년산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순간 그저 입을 벌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런 석축산성이 아니다. 마치 서구의 한 웅장한 고성을 방불케 하는 그런 성이다.




엇갈려 쌓기를 한 삼년산성과 서문의 문을 달아냈던 자리(아래사진 2장)

성이 터진 곳이 서문지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서문의 기둥과 문을 달아내었던 흔적이 있다. 그 오랜 세월 수많은 전화를 겪었을 삼년산성이다. 새롭게 복원을 한 성벽은 그저 놀라울 정도이다. 납작한 돌을 이용해 쌓은 성벽은 한 줄은 가로쌓기를 하였고 한 줄은 세로쌓기를 하여, 서로가 엇물려 튼튼하게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삼년산성은 남쪽과 북쪽은 성을 안과 밖을 모두 쌓아올려 철옹성을 만들어놓았다.

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걸어본다. 비는 계속 뿌려대지만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다, 수많은 산성을 보아왔지만, 삼년산성과 같은 성은 처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북치성을 비켜두고 보은사를 지난다. 성안에 쌓은 성벽의 높이가 이렇게 높다니. 당시 이 성을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일까?




삼년산성을 보고 그 위용에 놀라다
 
북동치성 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 걷는다. 여기저기 허물어진 성벽으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다. 조금만 건드려도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저만큼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돌출이 된 치성이 보인다. 남동치성 쪽으로 돌아가니 허물어진 성벽들이 산비탈에 덮고 있다. 무너진 곳의 성벽을 보니, 일반 성과는 달리 안에도 돌을 엇갈려 쌓기를 하였다.

잠시 멎었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미 천여m를 걸었는데, 뒤돌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사진을 찍느라 한 시간 남짓 걸어 다시 서문지 쪽으로 향한다. 복원이 된 이곳의 성벽을 바라보니, 그 장엄함이 눈에 보인다. 서문지 가까운 곳에 낸 치성은 둥근 원형에 가깝다. 치성 위로 오르니, 성벽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1시간 여를 조금 더 걸려 삼년산성을 돌아보았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비와 땀으로 젖은 옷이 차갑게 느껴진다. 서문지 안 암벽에는 암각화가 보인다. ‘아미지’라 쓴 이 글은 김생의 글씨라고 한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는 삼년산성. 그 장엄한 산성의 모습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다.




복원을 한 서문지 부근 성벽. 그 높이도 높지만 성 쌓는 방식이 특이하다. 치 위에 오르면 성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성을 범접 할 수가 없다.

서문지 안쪽에는 암각서가 보인다. '아미지'라고 쓴 글씨는 김생의 필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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