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명의 여인들이 양 손에 채를 들고 신나게 북을 두드린다. 곁에서 보고만 있어도 절로 몸이 움찔거린다. 가수 박상철이 부르는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북을 두드리는 율동이 점점 다양해진다. 6개월 만에 인생이 달라졌다고 하는 사람들.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진 것일까?

 

살아가는 모습들이 다양해지면서 여인들의 생활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집안에서 살림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름대로 자신만의 생활을 즐길 줄 안다. 누구는 친구들과 어울려 등산을 다니기도 하고, 그중에는 낚시를 다니는 사람들도 있단다. 각 지자체에서도 주민센터마다 문화강좌라고 하여서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고 있다.

 

 

매주 화요일 오후 4시부터 한 시간 30분 동안 수원시 영통구 중부대로 339에 소재한 원천동(동장 변응호) 주민센터 3층에는 난타동아리들이 모여 신바람 나게 북을 두드린다. 얼마 전에는 전 원천유원지인 광교호수공원 마당극장에서 첫 공연을 하기도 했단다. 6개월 만에 공연을 했다고 자랑들이 대단하다.

 

그때 공연을 하고나서 많은 분들이 문의를 하세요. 보기에도 신이 났던 모양예요. 그 날은 가족들도 함께 와서 열렬히 응원도 했어요. 남편이 와서 사진도 찍어주고 며느리에게 꽃다발을 받은 회원도 있어요.”라고 한 회원이 귀띔을 해준다.

 

난타를 하면서부터 인생이 달라졌어요.

 

한 시간 정도 연습을 한 것 같은데 등에는 땀들이 흘러 옷이 젖어있다. 그만큼 열심히 북을 쳤다는 것이다. 원천동 주민센터에서는 문화강좌로 난타를 시작한지 이제 고작 6개월이라고 한다. 그런데 벌써 공연을 하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고 박은희 강사는 은근히 자랑을 한다.

 

 

이제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난타를 시작했는데 정말 즐거워요. 저는 건강을 위해서 시작을 했는데 난타를 정말 잘 시작한 것 같아요. 사는 것이 즐거우니까요.”

동아리 회장을 맡아본다는 강영옥(, 56)씨의 말이다.

 

요즈음 주부들을 상대로 개설하고 있는 문화강좌 중에 대세가 난타인 듯하다. 주민센터마다 난타동아리들은 빠지지 않는다. 일부 동아리들은 아마추어의 실력을 넘어서기도 한다. 전국을 다니면서 공연을 하는 동아리들도 수원에만 서너 팀이 있다. 주부들이 난타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북을 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기 때문인 듯하다.

 

난타를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을 했어요. 이렇게 화요일에 만나서 한 시간 반 동안 북을 두드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려요. 난타를 하면서 신이 나서 그런지 집안 분위기도 밝아진 것 같아요.” 동아리 총무를 맡아본다는 정미정(, 45)씨는 정말 잘 배운 것 같다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북을 치고 나면 모든 걱정이 다 사라져

 

연습을 할 때 중간에서 제일 신나게 북을 두드리고 있던 주부가 있다. 이영미(, 48)씨는 보는 사람들이 다 흥겨울 만큼 온 몸으로 북을 두드린다. 그렇게 흥겹게 두드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은 물론, 집안 걱정까지도 사라진다고 한다.

집안에 걱정이 있거나 할 때도 신나게 북을 치고 나면 정말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는 듯해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요. 그래서 살림을 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난타동아리에 들기 정말 잘한 것이죠. 그래서 목요일이 기다려지죠. 좋은 사람들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니까요

 

이곳에 모인 난타동아리회원 중 가장 연장자라는 조동석(, 60)씨는 지자체에서 이렇게 시민들을 위해 좋은 문화강좌를 마련해주어 고맙다고 한다.

지자체에서 이렇게 주민센터마다 문화강좌를 마련해 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주민센터에서 이렇게 좋은 강좌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주부들이 많은 듯하다 .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서 더 많은 분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일주일에 한 번 모인다는 연습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서둘러 인터뷰를 마친다. 기다렸다는 듯이 동아리회원들이 북에 달라붙는다. 1주일에 한 시간 반은 짧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은 연습이 끝나면 동아리 회원들끼리 모임도 갖는다고 하는 원천동 난타동아리. 땀을 흘리면서 즐거워하는 그녀들의 표정에서, 주부들이 문화강좌 중 난타동아리를 선호하는 이유를 알만하다. 세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북에 대고 두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77. 이 연세에 아직도 카메라를 둘러메고 수원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서민들의 삶의 모습과 농촌 풍경 등을 담아내는 작가가 있다. 이병익(,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141-3)어르신은 이제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이 자그마치 55년 세월이 지났다고 한다. 살고 있는 서둔동은 농촌진흥청과 예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있던 곳이다.

 

태어난 곳이 서둔동이고 아직도 집이 그쪽이다 보니 자연 시골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담아냈어요. 이제 서울농대도 딴 곳으로 옮겨갔고, 거기다가 농촌진흥청까지 전라북도로 옮겨가고 나면, 제가 기록으로 남긴 사진들은 추억이 돼버리는 것이죠.”

 

 

담담하게 말씀은 하시지만, 옛 기억의 한편이 사라진다는 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영동시장 2층에 자리한 작가들의 공방인 아트포라 갤러리 아라 앞 공간에 진열이 된 사진은 모두 21점이다. 대개는 농촌풍경과 서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

 

고등학생 때 흑백카메라부터 시작 해

 

어떻게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하셨는지가 궁금했다.

예전에 6,25 한국동란 때 매형이 군에 계셨는데, 그때는 그렇게 학벌들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사포부대에 있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서 교육을 받았데요. 돌아오실 때 흑백카메라 한 대를 들고 오셨는데, 그것을 갖고 사진 찍는 것을 취미로 시작했어요.”

 

 

그렇게 1950년대 중반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때 건설업에 종사를 하느라고 사진에서 멀어져 있기도 했지만, 늘 사진을 잊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다가 나이가 먹으면서 이제는 운동을 삼아 다시 카메라를 둘러메고 수원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렌즈에 담아내고 있단다.

 

지난해에는 수원의 4대 하천인 황구지천, 수원천, 서호천, 원천리천을 모두 걸어서 답사를 하고 기록으로 남겼어요.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서 걸어 다니니 운동이 되어서 건강에도 좋고요. 또 기록으로 수원의 모습을 남길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죠.”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병익 작가

 

이병익 작가는 권선구 서둔동에서 출생하여 환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대학교를 수료했다. 20118월에는 70을 훌쩍 넘긴 나이로 사진전문지인 월간 생활영상에 입문하여, 20134월에 월간 생활영상 추천작가 및 사진취재 기자로 활동을 하고 있다. 20125월에는 경기도 교육청 평생학습관에서 사진으로 말하기, 201312월 아주대학교 평생교육원 디지털 예술 사진학과를 수료할 정도로 사진에 대해서 욕심을 내고 있다.

 

전시실이 아닌 쉼터인 공간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이병익 작가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 서민들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있다. 진흥청 설경, 향미정 설경, 벼 연구 관찰, 병충해 방제, 삼남길 개통식, 누에고치에서 실뽑기, 잠업에 사용하던 기구들, 고추밭 매기, 모내기, 옥상정원, 파 추수 등 우리 실생활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아름다운 경치 등은 많은 사진작가들이 담아내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런 사진은 자주 접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의 모습도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모습들은 쉽게 변하기 때문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만날 수가 없는 모습들이죠.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렇게 담아내고 있어요.”

 

사진작품을 전시한다고 해서 남들처럼 커다랗게 뽑아내지도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높이와 크기로 제작하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이 그대로 덤겨 있다. 525일까지 영동시장 2층 아트포라에서 만날 수 있는 이병익 작가의 추억을 그리는 사진 전’. 시간을 내어 옛 모습들을 만나보기를 권한.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 1332번지 신흥사에 가면 기형목(奇形木)이란 기이한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삼척시 제51호 보호수로 지정이 된 나무인데, 수령이 200년 정도라고 한다. 단지 수령 200년 정도 된 나무가 무엇이 그리 기이하기에 호들갑을 떠느냐고 핀잔을 주시는 분들도 있겠으나 내막을 알고 보면 누구나 수긍이 갈 것이라고 본다.

 

태백산 신흥사는 신라 때의 고찰이다.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3년에 범일국사께서 창건을 하였다고 하니, 벌써 2천년이나 된 고찰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담선사께서 중건한 후 몇 차례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흥사를 찾는 길은 삼척시에서 동해고속화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보면 근덕 해수욕장을 지나 동막(東幕)이라는 마을에 다다른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 계곡을 따라 4가량 올라가면 양평중학교가 있고, 여기에 신흥사 입구가 나온다. 우측 개울에 걸린 좁은 다리를 건너 200m 정도를 가면 신흥사가 되는데 일주문을 보면 너무나 작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개산 자락에 자리한 신흥사

 

태백산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에도 사격이 이어져 규모 있는 사찰로 유지되었는데, 요사인 심검당과 설선당은 중요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신흥사가 자리한 곳은 태백산의 줄기가 뻗어 내린 곳으로, 안개산(707m)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지명은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지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근덕면과 노곡면의 경계에 걸쳐 있는 신흥사는, 안개산이 거의 끝나는 곳에 자리하여 사역이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편이다. 그러면서도 산사의 정취가 듬뿍 배어있는 절집으로 아름드리나무가 주변에 가득하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칠 줄을 모른다. 몇 번인가 망설임 끝에 길을 나서기로 작정을 했으니 장비를 챙겨들고 차에 올랐다. 미리 주지 스님께 연락이 되었기에 서둘러 신흥사를 찾았다. 지역에서 봉사를 많이 하시는 스님은 출타를 하셔야 한다는 기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선당에 있는 스님의 방으로 가서 차를 대접받으며 담소를 나눈 후 여정이 바쁘신 듯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님은 이것저것 하나라도 챙겨주신다. 책이며 달력이며 하나하나 주시다가 그것도 부족했는지 스님이 드실 고구마까지 주신다. 산사 살림살이를 아는 나로서는 그러한 스님의 마음씀씀이에 오히려 죄스럽기만 하다. 절집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고 있으려니, 스님은 보호수가 참 대단한 나무라고 알려주신다.

 

배롱나무가 소나무를 품었다

 

200198일자로 삼척시 보호수로 지정이 된 배롱나무를 보는 순간 입이 벌어진다. 세상에 어찌 이런 나무가 있을 수가 있을까? 안내판에는 수령이 200년에 높이 5m, 둘레 1m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수종에는 배롱나무(소나무)라고 기록을 했다. 배롱나무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소나무라는 소리일까? 아래 설명을 보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신흥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 배롱나무에 소나무가 자연적으로 생육공생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나무를 찬찬히 살펴본다. 아무리 보아도 그 해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배롱나무에서 소나무가 자란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린 것도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나무가 생육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해보아도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무의 형태를 보면 배롱나무 위에 소나무가 얹혀있는 형태다. 아래는 배롱나무인데 그 중간에서 소나무 줄기가 솟아나 자라고 있다.

   

나무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것이 이 절집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가 숙여진다. 더불어 사는 삶, 어떠한 어려운 난관이 닥친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서로가 더불어 삶을 살수만 있다면 이렇게 기이한 모습으로도 살아갈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아마 세상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나무인 것 같다. 빗속에 길을 나서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몇 번인가 배롱나무 주위를 돌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한다.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자고.

 

114일과 15일의 내 일정표를 공개합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물 흐르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114일과 15일 제 일정표를 돌아보다가 저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인가가 정말 궁금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 2~3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정말 분초를 다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늘 자신에게 그래도 이렇게 찾아갈 곳이 있고,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행복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짜여진 일정표에서 숨 도릴 틈도 없다는 생각이 가끔은 답답함으로 밀려오고는 합니다.

 

 

114일 일정표

 

새벽 3시 취침

오전 6시 기상과 동시에 블로그 점검

오전 8시 조식

오전 9시 집 나섬

오전 11시 경기도의회 민주당 당대표 수석대변인 면담

오전 1130분 화장실 문화공원 해우재. 영원한 수원시장 심재덕 5주기 추모예술제 취재

오후 1230분 해우재 관계자들과 오찬

오후 130분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 김용국 원장 대담

오후 230분 남문로데오 상가 거리 촬영

오후 330분 남문 로데오 상가 취재

오후 5시 귀가

오후 6시 석식

오후 7시 자료정리

오후 8시 기사 작성 및 송고

오후 9시 불교문화신문 기사 작성

오후 10시 블로그 관리

오후 1115일 일정표 예비 작성

 

 

115

 

새벽 330분 취침

오전 630분 기상과 동시 블로그 관리

오전 8시 조식에 이어 다시 블로그 관리

 

15일에는 오전 10시에 사람을 만나고 난 뒤 오전 11시 팔달문 시장 문화센터와 방송국 취재. 팔달문 상인회장과 오찬 후 인터뷰를 합니다. 오후 3시에는 구천동 공구상가 취재를 합니다. 오후 530분 영동시장 아트포라 작가와 인터뷰를 마친 후, 오후 7시에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틀간의 일정표입니다. 이렇게 바삐 살아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늘 시간이 모자라 쩔쩔맵니다. 과연 이것이 세상을 잘 사는 일일까요? 솔직히 요즈음은 회의가 느껴지고는 합니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고 제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후회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오늘도 최선을 다해 달릴 뿐입니다. 그나마 육신이 아직은 강건하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열심을 낼 수 있을까? 오늘은 돌아다니면서 이 생각을 화드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한다. ‘글을 쓰고 싶어도 잘 못 쓰겠다.’ 이런 말은 공감이 가는 말이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다. 글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다. 하기에 그 글을 보는 사람들이 당시의 분위기에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남들이 공감을 하는 글을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을 써야 하는데 마땅한 소재가 없다’는 것. 이 말에 대해서는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이해가 되지만, 글을 쓸 소재가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블로거들의 글재간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글을 쓰는 모든 블로거들이 존경스럽기도 한 것이고.


파종과 결실의 즐거움

남들이 물어보면 난 ‘문화블로거’라고 서슴없이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가끔은 ‘진정한 문화블로거’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내 욕심은 언제까지라도 문화블로거로 남고 싶다. 그래도 가끔은 문화가 아닌 글을 쓰기도 한다. 그것은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나게 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삼기 때문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때로는 남들이 참 재미없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절집 마당 뒤편에 양파를 심었다. 겨우내 자란 양파가 잎이 시들해진다. 장마가 곧 닥친다고 하는 소식에, 양파수확을 한다고 서두른다. 절집을 찾은 신도 몇 분이 양파 밭으로 달려가 양파 수확을 시작한다. 단단하게 잘 여문 양파들이 흙속에서 나와, 밭고랑에 늘어서 있다. 그 잎을 잘라내고 손수레에 담는다.



그것을 찍으려고 하니, 양파를 수확하던 사람들이 한마디 한다.

“저 처사님은 날마다 사진만 찍네.”
“제가 원래 하는 일이 그래서요”
“사진은 그만 찍고 얼른 양파부터 날라다 주세요”
“다 담으면 이야기 하세요. 걱정하시지 말고”

손수레에 하나 가득 담겼다.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이 직접 그 손수레를 끌어다 양파를 그늘에 펴 놓는다. 그래야 썩지 않고 오래도록 보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날이 따가운데도 밭고랑을 옮겨 다니면서 양파 수확을 하는 사람들이나, 손수레에 담아 나르는 스님이나 모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수확의 기쁨이란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나는 다음 생애에도 문화블로거이고 싶다.

어떤 것이나 글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남들처럼 화려한 글 솜씨를 갖지 못했기에, 이 이상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문화재에 재한 글을 쓰라고 한다면, 조금은 더 잘 쓸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도 내 생각이다. 평가는 보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생애에는 힘자라는데 까지 문화블로거로 살고 싶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애에서도 문화블로거를 하고 싶다. 그만큼 블로거라는 것이 매력이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글 소재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 소재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를 한다는 것 또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블로거로써 살아온 세월이 벌써 7년이 지났다. 남들처럼 계속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블로거로써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이다. 때로는 속이 상한 적도 있고, 모든 글을 삭제시켜 버리기도 했다. 문화를 대우하는 것이 허접하기 때문이다. ‘문화연예’를 같은 분류 안에 넣어놓고, 연예가 모든 글의 대부분인 것도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이지만, 이제는 그런 것조차 초연해졌다.


그저 내가 좋아 택한 블로거 생활이다. 그리고 ‘바람이 머물 듯’ 전국을 다니다가 문화재가 보이면 그곳에서 발을 멈춘다. 블로그를 운영하기 전부터 돌아다닌 세월이 벌써 3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런데 아직 전국의 문화재를(개인이나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를 제외하고) 아직 그 절반도 찾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생애에서도 난 문화불로거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 글쓰기가 어렵다고 하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다음 생애까지 들썩여야만 했다. 글을 감칠 맛나게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런 ‘양파’의 소재 하나도 귀하게 여긴다. 그런데 하물며 문화재랴. 그저 글을 이렇게 쓸 수 있고, 남들이 보아준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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