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촬영한 자료에서 만난 동북공심돈 내부

 

수원화성 창룡문과 연무대인 동장대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원형의 구조물이 있다. 지금은 안전문제로 출입할 수 없는 동북공심돈은 수원 화성의 또 하나의 작은 고성(古城)이다. 화성만이 갖고 있는 공심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층마다 개인 화기인 불랑기를 지참한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쏘아대는 화포만으로도 근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견고한 구조물이 바로 공심돈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모두 3개소의 공심돈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서북공심돈과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유실된 남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인 동북공심돈이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된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몇 년 전 개방을 했을 때 들어갔던 동북공심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나 병사들이 묵을 수 있는 온돌방으로 보인다.

 

화성의 전각에는 추위에도 병사들이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나선형의 통로 끝에는 계단으로 조성해 공심돈 위에 마련한 전각으로 오른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는 했다.

 

 

옛 자료 정리하다가 만난 동북공심돈의 모습

 

20, 일기예보에서는 수원에도 폭염주의보가 발령될 것이라고 한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몇 곳을 돌아보리라 마음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창룡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동북공심돈 앞으로 날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데도 몇 사람의 관광객이 지나치고 있다. 사진 몇 장을 촬영하고 장안문과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돌아와, 2004824,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촬영한 수원화성 자료를 검색해본다.

 

15년이 지났다. 15년 전에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촬영한 자료에는 서장대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기 전의 자료가 들어있어 나름대로 소중한 자료로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자료CD 안에 동북공심돈과 봉돈의 내부 등을 꼼꼼히 촬영해 놓은 자료가 들어있다. 15년 만에 다시 찾아보는 동북공심돈의 내부, 당시 무더운 복중에 땀 흘리며 돌아본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의 내부모습이다.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719일에 완공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심돈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재한하고 있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로 오를 수 있었던 동북공심돈. 개방을 했을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자료보관의 중요성을 깨닫다

 

15년 전의 소중한 수원화성의 자료가 담긴 CD를 보관하고 있는 것은, 30여 년 전부터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하면서 자료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관하고 있는 자료 CD3,000장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CD에 담을 수 없어 몇 년 전부터는 외장하드에 담아놓고 있다.

 

그렇게 자료를 보관하는 버릇을 들여놓은 것이 결국 지금은 소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 자료를 남겨놓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더 나이를 먹어 여행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조용히 앉아 책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하나가 수많은 자료를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겨놓은 많은 자료들을 보면 언제니 든든하다. “책을 써도 100권은 쓰겠네요.” 집을 찾아와 자료를 본 지인이 하는 말이다. 그런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새삼 자료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문화재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을 한다고 하지만 복원이란 자체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뿐 원형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돌아본 동북공심돈. 지금은 안을 들어갈 수 없지만 옛 자료로 만나본 동북공심돈의 내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과거에 기록해 놓은 지료는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조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 화령전 운한각에서 2512시부터 262주기 정조대왕 탄신제향이 거행되었다. 운한각 안에는 순조의 하교에 의해 현릉원 재실에 모셨던 정조의 어진을 1801년에 옮겨 봉안하였다. 순조는 이 화령전을 축조한 후 매년 장중한 탄신제향을 이곳에서 거행하였는데, 조선의 임금 가운데 어진을 모신 전각에서 탄신일에 제향을 지낸 것은 정조대왕이 유일하다.

 

 

원래는 새벽 1시에 맞추어 제향을 올려

 

화령전에서 정조대왕의 탄신제향을 올리던 시간은 새벽 1시였다. 하지만 정조대왕의 탄신기념일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를 바라고, 연례행사로 진행하기 위해 양력을 기준으로 삼아, 10월 네 번째 토요일에 올리기로 의견이 모아져 3년 전 복원한 탄신제향을 기본으로 현대적 요소를 가미해 지내게 되었다.

 

12시가 가까워지자 장용외영의 깃발을 든 장용영 무사들이 많은 유림의 인원을 대동하고 화령전 문안으로 들어섰다. 이날 제향은 행사안내를 시작으로 제관입장 - 망전례 - 초헌례 - 삼상향 - 독축 - 아헌례 - 종헌례 - 망료례 - 국궁사배례 - 예필례 - 음복례의 순으로 거행이 되었다.

 

 

이날 초헌관은 정조대왕 기념사업회 회장이 맡았으며, 아헌관은 염상덕 수원문화원장이, 종헌관은 김정수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가 맡았다. 창홀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이수자인 이상훈이 맡아 집례를 했다. 또한 여민락과 수제천 등의 의식음악은 수원국악예술단이 연주했다.

 

장중한 의식 볼 수 있어서 의미 있는 날이다

 

탄신제향을 찾은 한 시민은 올해 마음먹고 제향에 참석을 했다면서

말로만 듣던 궁중 제향을 이렇게 수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제향이라고 하면 성균관에서 열리던 문묘제향이나 종묘에서 역대 임금님들이 제를 지내는 종묘제례만 만날 수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화령전에서 정조대왕의 탄신제향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정말 수원시민으로서 자긍심을 느낀다.”고 한다.

 

 

중국에서 수원 화성 관광을 왔다가 이곳에서 정조대왕 탄신제향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한 관광객은

중국에도 많은 의식이 있지만 이렇게 국왕의 제향을 지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번에 한국에 나와 의미 있는 행사를 보게 되어 정말 기쁘다.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중국으로 돌아가면 지인들에게 자랑을 해야겠다,”며 웃는다.

 

제향이 시작되기 전에 화령전을 찾은 한 시민은 삼문 앞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다가

안내판에 정조대왕의 어진초상화리고 기록해 놓았다. 초상화는 일반인들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대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어찌 어진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초상화라고 적고 있는가?”라고 뼈 있는 소리를 하기도.

 

어진이란 역대 왕들의 모습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을 말한다. 어진제작은 모두 세 종류로 도사(圖寫)와 추사(追寫) 그리고 모사(模寫)가 있다.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린 것을 말한다.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이다. 모사란 이미 그린 어진이 훼손됐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때 원본을 범본(範本)으로 해 신본을 그린 것을 말한다.

 

 

왕의 모습을 지칭하는 어진은 진용(眞容), (), 진영(眞影), 수용(晬容), 성용(聖容), 영자(影子), 영정(影幀), 어용(御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 다양하게 불렸다. 모두 왕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숙종 39년인 1713년 숙종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것을 이이명(李頤命)의 건의로 어진이라 했는데, 이후 이 명칭을 따라 어진이라고 주로 일컫는다.

 

한편 이날 독축에서 올린 정조대왕 탄신제 축문은 다음과 같다.

이제 단기 4347년 서기 2014년 갑오년 1025. 감히 조선국 제22대 국왕 정조 경천 명도 흥덕 영모 문성 무열 성인 장효 선황제께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장엄하고 근본 된 사당의 의절이 있으므로 화령전 운한각에서 제향을 올립니다. 얼굴색을 바로잡고 보시는 것과 같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을 정갈하게 베풀어 밝게 올리니 삼가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벌써 해미읍성을 다녀온 지 20여 일이 지났다. 답사를 하면 그때그때 바로 기사를 올려야하지만 현장 취재에 늘 뒷전으로 밀려버리고는 한다. 해미읍성은 벌써 수십 번은 더 다녀온 곳이다. 대전에 있을 때부터 이곳은 자주 찾았던 곳이라 어느 성보다도 눈에 익은 곳이다. 그런 해미읍성을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가보니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번지에 소재하는 사적 제116호이다. 해미읍성은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평산성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그 중 북문은 암문으로 조성하였다. 읍성의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는 했는데,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인 1417년부터 세종3년인 1421년 사이에 5년간의 세월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 곳으로 옮기려고 쌓은 성이다. 효종3년인 1652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다. 이 성은 적이 침입을 하지 못하도록 성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 시간 반 만에 성을 두 바퀴 돌아

 

해미읍성을 답사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다. 그 시간 안에 꼼꼼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뛰어다녀야 할 판이다. 1.8km의 성을 돌아보는 데야 길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의 이모저모를 일일이 촬영하고 기록하려면 그 정도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남문인 진남문으로 들어가 위 문루로 오른다. 북쪽으로 곧게 난 길 끝에 아문과 동헌, 내아, 객사 등이 보인다.

 

 

아문으로 행하던 중 만난 회화나무와 옥사 등을 둘러보고 난 뒤, 발걸음을 재촉해 동헌과 내아, 그리고 객사 등을 일일이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서문 밖으로 나와 순교지를 돌아본 후 바로 성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장은 복원되지 않았지만 잘 정리가 된 성곽을 따라 걸으며 여기저기 꼼꼼히 살핀다.

 

북암문 쪽으로 난 성벽은 낮은 구릉으로 오르는 길이다. 복원을 한 해자 위에 나무다리가 걸려있다. 북암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으로 성문 주위를 견고하게 쌓았다. 복원을 한 해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른들도 빠져 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해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성을 돌아 동문으로 향한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군관으로 있었다.

 

북암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져있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동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동문 역시 굳게 닫혀있다. 남문과 서문만 개방을 한 것이다. 성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안만 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성 밖을 돌아보는데 이렇게 문이 닫혀 있으면 이럴 때는 조금 난감하다.

 

답사를 하는 날은 기온이 꽤 높았다. 날씨가 쾌청해 성을 촬영하기에도 제격이다. 동문 문루 양편에 꽂아 놓은 깃발들이 가을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동문을 보고 난 뒤 다시 성을 거슬러 돌아본다. 혹시 지나친 곳이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서문을 지나니 두 곳의 치성이 있다. 왜 이곳에만 이렇게 치성을 쌓은 것일까?

 

 

선조 11년인 1578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 간 이 해미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현감이 이 성으로 옮겨와 겸영장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고 한다. 호서좌영인 해미읍성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243년 동안 내포지방 12개 군현을 군권을 지휘하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의 순교지로 더 알려진 해미읍성. 잘 복원된 성을 돌아보면서도 왠지 가슴 한편이 싸하다. 아마도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가 보다.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진남문 앞에 거리도 말끔하게 단장을 하였다.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 가을 풍광에 젖어보아야겠다.

 

참 어이가 없다. 이 정도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만하다. 도대체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를 쓰레기통 취급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한 마디로 참담한 심정이다. 831,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았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귀부와 이수가 그동안 몸돌을 복원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신라 때 창건한 혜목산 고달사지 석조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저만큼 새로 몸돌을 치장한 원종대사 탑비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가려는데, 중간에 보이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된 석조 안에 무엇인가가 널려있다.

 

 

이 석조는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 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석조는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형문화재를 쓰레기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이 석조 안에 무엇인가를 담은 봉지와 종이박스, 음식을 조리하는 휴대용 열기구 등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누구인가 이곳에서 컵라면 등을 끓여먹고 그 쓰레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것이다. 라면박스 안에는 라면도 몇 개 들어있고, 휴대용 조리기구와 그 케이스도 있다.

 

담배꽁초도 보인다.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라면 등을 끓여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처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먹고 난 것들을 하필이면 유형문화재인 석조 안에다 놓은 것일까? 마침 일요일을 맞이하여 고달사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경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은 어이가 없다면서 혀를 찬다.

참 대책 없는 사람들이네요. 어떻게 문화재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먹고 난 것들을 이렇게 문화재 안에다가 버젓이 쌓아놓을 수가 있는 것인지. 이 현장에도 문화재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게 무슨 짓거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창피하네요. 고작 이정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다니.”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 안에다 모아놓은 쓰레기들과 조리기구.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관리자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문화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하기 짝이 없다.

 

화성의 주변이 정리가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는 가운데, 유독 남수문에서 창룡문 구간인 지동구간이 가장 늦은 듯하다. 이미 장안문 외곽부터 창룡문을 거쳐 동일치 사이는 주변이 모두 정리가 되어, 화성을 찾는 관광객들이 성의 외곽을 따라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탐방로가 생겼다.

 

지난 해 4월에 문화재청은 관보에 문화재법 제 27조 및 제34조 규정에 따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0-66번지 등 167필지 13,520를 사적 제3수원 화성의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는 사항을, 같은 법 시행령 제11조 제4항의 규정에 따라 예고한 바 있다.

 

예고사항을 보면

. 대상문화재 : 사적 제3호 수원 화성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번지 일원

. 보호구역 추가지정 면적 : 167필지 13,520(지번별 면적조서 붙임)

. 추가지정 예고사유

성곽 연접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여 무분별한 개발을 방지하고, 지형을 회복함으로써, 수원 화성의 역사 문화환경을 보호하고자 함.

. 관리단체 : 수원시 등이다.

 

 

보호구역 안에 창룡문로 7길 폐쇄해야

 

문제는 일부가 문화재 보호구역 안에 들어가 있는 도로의 이용이다. 창룡문로 111번 길은 창룡문 주차장 위에 게이트볼 장부터 성벽으로 난 길을 따라 성벽 밑으로 지하도로가 있는 홍련사 까지다. 이곳부터는 창룡문로 7번 길로 바뀌어 봉돈, 동이포루 앞을 지나 동삼치 앞가지 이어진다.

 

문제는 이 도로는 일반 차도가 아닌 문화재 보수 등을 위한 차량들이 이동을 하는 도로로 알고 있다. 다만 그 도로에 인접한 거주자들은 이 도로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창룡문로 7번 길이 주변을 이용하는 많은 차량들의 주차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평소에도 30대가 넘는 차들이 이 길을 주차장으로 이용한다.

 

 

더구나 뻔질나게 이 길을 이용하는 많은 차들을 볼 수가 있다. 문제는 이 길이 차량에 소통되는 도로가 아닌, 한편이 막혀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지동 순대타운 앞에서 오르는 길은 막혀있고, 이곳을 이용하려면 창룡문 주차장부터 일부러 이곳까지 차를 끌고 들어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주차 공간으로 많은 운전자들이 시용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봉돈 외벽 균열 심각해, 차량 진입 막아야

 

현재 수많은 차들이 주차를 하거나 이동통로로 사용하고 있는 창룡문호 7번 길은 차도가 아니다. 지난 해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구역을 지정 고시 할 때 이 길은 빠져 있었다. 이 말은 이미 창룡문로 7번 길은 문화재구역 안(기 조경 공사가 끝난 외곽 산책길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에 포함이 되어있다고 버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차들이 주차를 하기 위해 이동을 하는 창룡문로 7번 길에는 화성의 봉돈이 소재하고 있다. 현재 봉돈은 외벽에 길게 균열이 보이고 외벽을 쌓은 벽돌은 부식되어 쪼개져 있는 상태이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도 해도 보기가 좋지는 않다. 아마도 이런 균열이나 부식된 벽돌의 형태가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차령들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화성은 사적이자 세계문화유산이다. 보수를 한지가 오래 된 시설물들이 지금도 상당수가 보수를 요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화성의 주변 정비를 소홀이 해 화성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다면 당연히 예방을 해야 함이 당연하다. 창룡문로 7번 길의 용도를 정확하게 알아본 후 거주자 외의 차량들은 출입통제를 함이 마땅하단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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