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는 집안이나 경치가 좋은 곳에 짓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 그리고 그 용도는 대개 후학을 양성하거나 시를 짓고,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정자를 지은 주인의 심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건조물이기도 하다.


경북 영주시 영주1동 19-1번지에 소재한 영훈정은 현재 학교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원래 영훈정은 15세기 중반 군수 정종소가 사신을 맞이하고 배웅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후 조선조 인조 21년인 1643년에 신숙이 다시 세우고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을 모각하여 영훈정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관청으로 사용하였던 정자


영훈정은 군 남쪽 3리에 처음에 지었으나, 일제시대에 현 위치로 이건하고 관청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개의 정자가 가문에서 지어지는 것과는 달리 관용으로 지었다는 점이 색다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영훈정은 사방이 개방되어 있다.


이는 가문에서 짓는 정자들이 방을 마련하는 것에 비해, 사신을 영접하기 위한 정자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방의 경치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각 지역에 산재한 많은 정자들을 보면 가문에서 지은 정자는 방이 있다. 하지만 경치를 보기 위한 정자는 대개 사방이 트여있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

 

 


한 정자에 붙이는 여러 개의 명칭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한 정자 안에, 정자의 이름이 여러 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해가 뜨는 방향으로는 일출정, 달을 볼 수 있는 서편은 영월루, 그리고 바라다 보이는 경관을 향해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 그만큼 한 정자를 갖고도 나름대로 멋을 생각하고 명칭을 붙여 사방이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정자들도 있다.


영훈정 안에도 두개의 현판이 더 걸려있다. 이 현판들이 처음부터 이 정자의 또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방위를 따라 현판을 거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 편 벽에 모아놓은 것으로 보아서 딴 정자의 현판이거나, 아니며 또 다른 명칭으로 불렸을 때 걸었던 현판일 것으로 보인다.

 

 


정자를 찾아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사연도 많다. 그리고 정자 나름대로 한 가지 멋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중반에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지어진 영훈정도 처음에는 남정자라고 부르다가 영훈정이 되었다. 아마 이 정자는 이 위에서 질펀하게 술을 취해 놀았던 곳이었을 것이다. 사신을 맞이한다는 명목으로. 관의 정자는 가문의 정자와는 달리 이야기는 많지 않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14호로 지정이 된 영훈정. 학교 안에 있어서인가 깨끗하게 보존이 되어있다.


아이들이 오르면 낙서라도 할 것 같아서인지, 정자는 오르지 못하게 줄을 느려놓았다.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곳에 함께 아름다워지고 싶은 정자. 그런 정자들이 서 있어 길을 가는 나그네는 외롭지가 않다. 쉴 수도 있거니와, 정자에 올라 정자를 지은 주인의 마음을 함께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자를 찾는 길은 힘이 들어도 늘 즐겁기만 하다.

 

삼년산성, 3년간이란 시간을 들여쌓았다는 석축 산성이다. 신라 자비 마립간 13년인 470년에 처음으로 축조를 하였으니, 성을 쌓은 지가 무려 1,540년이 지났다. 그 뒤 소지 마립간 8년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의 장정 3천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했다.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 일대에 소재한 이 삼년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삼년산성은 5세기 후반 신라의 석축 산성을 쌓는 기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 초의 석축산성, 그 대단한 성 쌓기

이 삼년산성은 신라가 서북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소중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성의 총 길이는 1,680m 정도이고,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 등이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토기조각과 유물이 발견이 되어, 이 성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을 하기 위한 전쟁시에는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성을 공략하다가 크게 패전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삼년산성은 견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성의 높이는 최고 22m에 달할 정도로 지형을 이용해 높게 쌓았다. 성벽위의 폭은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빗길에서 삼년산성을 걷다

비가 뿌린다. 그치려니 생각했던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를 않는다. 성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들어섰다. 사적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삼년산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순간 그저 입을 벌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런 석축산성이 아니다. 마치 서구의 한 웅장한 고성을 방불케 하는 그런 성이다.




엇갈려 쌓기를 한 삼년산성과 서문의 문을 달아냈던 자리(아래사진 2장)

성이 터진 곳이 서문지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서문의 기둥과 문을 달아내었던 흔적이 있다. 그 오랜 세월 수많은 전화를 겪었을 삼년산성이다. 새롭게 복원을 한 성벽은 그저 놀라울 정도이다. 납작한 돌을 이용해 쌓은 성벽은 한 줄은 가로쌓기를 하였고 한 줄은 세로쌓기를 하여, 서로가 엇물려 튼튼하게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삼년산성은 남쪽과 북쪽은 성을 안과 밖을 모두 쌓아올려 철옹성을 만들어놓았다.

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걸어본다. 비는 계속 뿌려대지만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다, 수많은 산성을 보아왔지만, 삼년산성과 같은 성은 처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북치성을 비켜두고 보은사를 지난다. 성안에 쌓은 성벽의 높이가 이렇게 높다니. 당시 이 성을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일까?




삼년산성을 보고 그 위용에 놀라다
 
북동치성 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 걷는다. 여기저기 허물어진 성벽으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다. 조금만 건드려도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저만큼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돌출이 된 치성이 보인다. 남동치성 쪽으로 돌아가니 허물어진 성벽들이 산비탈에 덮고 있다. 무너진 곳의 성벽을 보니, 일반 성과는 달리 안에도 돌을 엇갈려 쌓기를 하였다.

잠시 멎었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미 천여m를 걸었는데, 뒤돌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사진을 찍느라 한 시간 남짓 걸어 다시 서문지 쪽으로 향한다. 복원이 된 이곳의 성벽을 바라보니, 그 장엄함이 눈에 보인다. 서문지 가까운 곳에 낸 치성은 둥근 원형에 가깝다. 치성 위로 오르니, 성벽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1시간 여를 조금 더 걸려 삼년산성을 돌아보았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비와 땀으로 젖은 옷이 차갑게 느껴진다. 서문지 안 암벽에는 암각화가 보인다. ‘아미지’라 쓴 이 글은 김생의 글씨라고 한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는 삼년산성. 그 장엄한 산성의 모습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다.




복원을 한 서문지 부근 성벽. 그 높이도 높지만 성 쌓는 방식이 특이하다. 치 위에 오르면 성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성을 범접 할 수가 없다.

서문지 안쪽에는 암각서가 보인다. '아미지'라고 쓴 글씨는 김생의 필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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