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이란 조선조 사헌부에 속해있던 정6품의 관리를 말한다. 감찰은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정원은 24명으로 지방관의 비위를 규찰하기 위한 파견도 나갔으며, 각 관서에서 회계감사 등을 위해 사헌부의 검찰을 요청하는 청대에도 파견되었다. 감찰은 원래 고려시대 어사대의 감찰어사직을 계승한 직책이다.

 

집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그저 평범한 듯 하지만, 어느 한 곳은 딴 집과는 다른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는 집들이 있다. 감찰댁이 바로 그런 집 중 하나이다.

 



 

아산시에 있는 외암민속마을에 가면 이러한 '감찰댁'이란 택호가 붙은 집이 있다. 외암민속마을이 동씨족의 마을이기 때문에 택호를 붙일 때 평소의 직책이나, 그 집의 동족 내에서의 위치 등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감찰댁을 찾아갔을 때는 한창 보수공사를 하느라, 한편이 부산하다. 눈이 온 뒤에 질척거리는 땅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본 감찰댁, 정리를 다 마치고 나면 나름 아름다운 고택일 것이란 생각이다.

 

일각문과 어우러진 돌담

 


관리들을 규찰하는 업무를 보았던 감찰댁은 의외로 조촐하게 꾸며져 있다.


일각문 옆에는 돌담 앞에 작은 연못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

 

감찰이란 직책은 비록 높지 않으나 나름대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직분으로 만일 이들이 비리를 저지른다고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많은 재물을 축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찰을 선정할 때는 명망이 있는 자들로 선정을 했으며,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위를 보장 받기도 했다.

 

이러한 감찰이 살던 집이었던 감찰댁은 한 마디로 크지는 않으나,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는 문도 솟을대문이 아닌 일각문이다. 일각문 우측에는 연못을 파고, 돌담을 둘렀다. 일각문이 닫혀있어 공사를 하는 곳으로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우측으로는  작은 못이 있고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 정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된 정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안채를 바라보고 우측에도 연못과 정자가 서 있다. 소탈하지만 멋을 낼 줄아는 집이다.

 

일각문과 어우러진 돌담이 참으로 정겹다고 느껴지는 집이다. 외암민속마을의 대개의 집들이 이렇게 돌담으로 꾸며져서, 돌담길의 운치가 좋은 곳이기도 하다.

 

한편에 누정을 올린 안채

 


감찰댁에는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다. 안채 앞에 작은 정원 등과 주변의 숲이 잘 어울린다.


안채 한편에 자리잡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당. 뒤로는 대숲이 우거져 있다.

 

현재 외암리 민속마을 안에 자리한 감찰댁은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지어진 것인가는 확실치 않으나, 너른 앞의 정원 등으로 보아 행랑채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ㄱ 자 집으로 지어졌으며, 일각문을 들어서면 작은 동산으로 조성한 정원의 뒤편에 자리한다.

 

안채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방을 서쪽으로는 마루방을 들였다. 아래쪽으로는 안방이 있고 이어서 부엌과 작은방을 꾸몄다. 집은 크지 않지만 단아한 품위를 지키고 있어, 이 집 주인의 심성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안채의 한편 끝에 마련된 누마루방. 아래로는 아궁이를 내고 담벽을 까치구멍으로 둘렀다. 위로는 누마루방을 내어 누정과 같이 꾸몄다.
 
 
이 감찰댁의 안채의 특징은 대문을 들어서면서 바라볼 때 오른쪽 끝에 낸 마루방이다. 아래로는 아궁이를 두어 벽을 까치구멍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위에 누정과 같은 효과를 낸 방을 꾸몄다. 기단을 장대석이 아닌 네모난 돌을 이용해 쌓은 것도 이 집이 주는 느낌이 검소하다는 것이다.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는 감찰댁. 그저 마음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정겨운 집이다.

 

굴뚝과 우물의 여유로움

 


납작한 돌로 쌓아올린 굴뚝. 네모난 곳에는 그림을 그린 도판이 있던 자리로 보인다.


막돌로 쌓은 우물이 정겹다. 감찰댁은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았다. 관리를 규찰하는 업무를 보는이답게 검소하게 지어진 집이다.
 
 
안채 뒤로 돌아가면 납작한 돌로 쌓아올린 높은 굴뚝이 하나 서 있다. 이 굴뚝의 가슴 높이정도에는 사방에 네모난 공간이 보인다. 무엇을 떼어낸 듯하다. 아마 이곳에 도판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 도판에 무슨 그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사방에 있는 떼어낸 자국으로 보아 멋스러웠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비어진 부분을 할 빨리 채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뒤편으로 돌아보니 안방의 뒤편에 우물이 보인다. 막돌로 쌓은 우물은 덮개가 다 부수어졌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정원과 정자 연못 등이 아우러져 있다. 간결하면서도 깨끗한 집이다. 집 주인은 감찰이란 직책에 알맞게 살아온 듯하다. 집은 비록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주변에 대밭과 정원 등과 어우러지는 외암민속마을 감찰댁. 이런 여유로움에 파묻혀 지내는 시간이 정말 즐겁다.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5호 윤민걸 가옥은, 윤민걸의 고조부인 윤양계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양반가 한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다. 안마당에 있었을 행랑채는 유실이 되었다고 하며,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초가로 지은 광채와 뒷담을 벽으로 삼아 꾸민 사당이 있다.

충주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윤양계는 <병마절제도 위 연길현감 도청부도사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고종 2년인 1865년에 이 집에 살았다고 안내문에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집을 지은 지는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윤양계가 이 집에 살았다는 고종 2년에 연길현의 현감이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연일현의 오자로 보인다. 승정원 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고종 3(1866)년 5월 16일. 경상 감사 이삼현(李參鉉)의 장계에서 진휼하여 구호한 각읍 가운데 베풀어 도와준 것이 뛰어난 수령들의 별단을 등문(登聞)한 것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하양 현감(河陽縣監) 류치윤(柳致潤)은 오고(五考)를 기다리지 말고 군수에 승천(陞遷)시키되 별천(別薦)의 예로 시행하고, (중략) 연일 현감(延日縣監) 윤양계(尹養桂)와 고성 현령(固城縣令) 윤석오(尹錫五)는 모두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고, 우병사(右兵使) 이주응(李周應)은 가자하고, 대구 영장(大邱營將) 서형순(徐珩淳)은 방어사의 이력을 허용하라.‘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 윤민걸 가옥의 조성연대가 언제인지는 좀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고종 2년에는 윤양계는 연일현감으로 재임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연일에 있었다고 해서 충주에 집을 짓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사랑채의 뛰어난 미적 감각

안담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별채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평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중앙의 전면1칸은 튼 마루로, 그리고 좌측의 한 칸을 툇마루로 조성을 하였다. 뒤편으로는 온돌방을 놓았으며, 우측의 1칸은 마루를 높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랑채 같은 형태인 듯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난 곳이 많다. 우선 우측의 마루방을 높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창호가 색다르다. 이 방은 일반적인 사분함 여닫이문이 아닌 중방 위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중앙에 툇마루는 앞을 터놓았는데, 좌측의 툇마루는 방처럼 꾸몄다는 것도 이 사랑채의 특징이다.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벽에 새인 듯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지난해에 보수를 하면서 그린 것인지, 아니며 오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재미있다.



안채와 아래채의 단아함

안채는 ㄱ자형으로 꺾여있다. 좌측으로부터 부엌과 두 칸의 방, 대청이 있고 안방의 꺾어진 부분에는 큰 방을 드렸다. 큰 방의 끝에는 판자로 벽을 막은 한데아궁이를 두고 그 위에 다락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 안방의 뒤편에 마루로 놓은 돌출된 부분이 있다. 안채의 우측 벽면에 돌출을 시킨 이 부분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던 '안 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뒤편의 툇마루 끝에 출입문을 달아 놓은 마루방과 안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마루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안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부엌에서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큰 집이라면 까치구멍이 양편으로 나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윤민걸 가옥은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이 뒤편의 문 옆으로만 있다. 연기 등이 안마당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다.



왜 바깥담을 아름답게 했을까?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3칸의 마루방을 드린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초가로 지은 광채가 있다. 그런데 뒷담에 나 있는 사주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바로 바깥 담장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광채와 사당채의 뒷벽이 그대로 바깥담이 되어있는 윤민걸 가옥의 특징이다. 사당과 광채가 떨어진 ㄱ자형으로 되어있는데, 이 바깥담인 벽을 모두 심벽으로 처리를 했다. 왜 이렇게 바깥담을 아름답게 치장을 한 것일까? 이런 바깥담에 대한 꾸밈은 집의 전체가 그렇다. 솟을대문부터 바깥담을 모두 심벽처리를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까? 두고두고 고민을 해야 할 문제인 듯하다.



고택은 아름답다.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숨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 집을 지을 때는 자신들이 가장 사용하기 적합하게 꾸민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개성을 강조한 것이 우리 고택의 멋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변해가는 서구식의 가옥들. 그런데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버티어 낸 나름대로의 고집 때문이다.

한국민속촌 양반가 안초당과 사당

수원 남창동에서 민속촌으로 이건 복원을 한 99칸 양반집. 중부지방 양반집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이 집은, 한 마디로 입이 벌어진다고 밖에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2월 18일 찾아갔던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둘러본 집이다. 이 집의 답사기 중 다섯 번째로 안초당과 사당을 소개한다.

99칸,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인 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99칸이라고 소개를 하는 전북 정읍의 김동수 가옥 등을 둘러보았으나, 이 남창동 양반가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 남창동 가옥은, 앞으로도 이 만한 집을 만나기가 힘이 들 것이란 생각이다.


 



시집을 가기위한 수업을 하는 안초당

‘안초당’이라는 이름은 양반가의 안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지붕을 초가로 엮어 안초당이라고 부른다. 안초당은 내당을 바라보고 좌측에 낸 작은 문을 들어서면 초가로 된 집이다. 안초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된 작은 건물이다. 안초당을 바라보고 좌측 한 칸은 방이고, 남은 두 칸은 마루방이다.

그러나 이 한 칸은 앞뒤로 구분을 하여 두 개의 방을 드리고, 남은 두 칸을 마루를 깔았다. 이 안초당은 시집을 가기 전의 집안의 딸들이 거처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서예, 자수 등을 배우면서 시집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모든 집들이 와가인데 비해, 왜 안초당을 초가로 꾸몄을까? 안초당 뒤편에는 연못을 마련하고, 마당은 비교적 너르게 배치를 하였다. 집은 겨우 세 칸 밖에는 안 되지만, 한 마디로 시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꾸민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고래 등 같은 집에서 겨우 세 칸의 초가로 엮은 안초당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 것만 같다.


집의 맨 위에 자리한 사당

사당은 어느 집이나 규격이 비슷하다. 대개는 정면 세 칸에 측면 한 칸으로 마련한다. 이 사당은 집의 크기와 관계없이 이런 구조로 나타난다. 양반집의 사당도 예외는 아니다. 99칸 양반집의 사당은 초당을 끼고 좌측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협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자리한다. 대개의 사당은 정침인 안방의 후원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당은 조상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하기에 집안에서 가장 조용하고 신령스러운 곳을 선택한다. 양반집의 사당은 바닥을 모두 마루방으로 처리를 하였으며, 앞으로 세 짝의 문을 달아냈다. 안에는 항상 제물을 차려놓아 이곳이 제를 지내는 사당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99칸 양반집을 돌아보고

모두 다섯 번에 걸쳐 양반집을 소개했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웬만큼 큰 집도 한 번에 끝냈는데, 이 남창동 99칸 집은 그런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선 줄행랑이나 회랑, 안초당, 내별당, 외별당 등,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각들의 명칭도 다양하다. 그만큼 이 집의 넓이나 전각들이 대단하다.



수원 팔달산 기슭에 있었다는 중부지방 양반가. 어찌되었거나 수원으로서는 대단한 문화재 하나를 잃은 셈이다. 이 양반가가 있었던 자리에 다시 재현을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명물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양반가를 돌아 나오면서 못내 아쉬웠던 것은, 이 집이 팔달산을 배경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함이다.

우리는 흔히 큰 대궐 같은 집을 ‘99칸집’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99칸이란 궁을 뺀 일반 가옥에서는 가장 큰 집으로, 이런 큰 집을 가졌다는 것은 집 주인의 세도를 알만한 것이다. 한국민속촌 안에 가면 흔히 ‘중부지방 양반가’라는 22호 집이 있다. 이 집이 바로 99칸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는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철종 12년인 1867년에 유학자인 이병진 선생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수원 화성내에 팔달산 아래 지은 이집은 (현 수원시 남창동 95번지 일대) 1973년에 원형 그대로 민속촌으로 옮겨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사당 앞에서 바라다 본 한국민속촌의 99칸 양반집



중부지방의 양반가옥을 대표해

이 99칸 집은 당시 중부지역 민간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 규모로 지어졌다. 우리나라의 전통 양반가옥을 대표하는 남창동 가옥은, 1910년대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근택(1865~1919)이 사용했던 집이기도 하다. 이 가옥의 사랑채는 지난 1950년 한국동란 때 9, 28 서울을 수복 후에는, 수원지방법원 지방검찰청의 임시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여인천하' '대장금' '다모' 등 역사 드라마물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고 있으며, 민속촌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꼭 들리고는 하는 집이다. 남창동가옥을 보면 솟을대문을 둔 대문채, 줄행랑채, 바깥사랑채, 안행랑채, 안사랑채, 내당, 초당, 내별당, 큰사랑채, 외별당, 정각, 사당, 전통정원 등 큰 집 살림에 필요한 모든 공간이 규모 있게 갖추어진 전형적 대가이다.


22호 집인 수원 남창동 99칸 집의 솟을대문(위) 와 행랑채 앞마당


건물 전체에는 마루공간이 많이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굴뚝을 건물에서 떨어져 설치하여 난방의 효율과 함께 조형미를 살린 점은 전형적인 중부 상류층 가옥의 형식이다. 2월 18일 찾아간 이 99칸 집을 한 번에 소개하기는 어렵다. 모든 건물은 각각 독립건물로 구성되어 있어 몇 회로 나누어 소개를 하고자 한다.

바깥사랑과 행랑으로도 규모에 놀라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줄행랑이 좌우로 펼쳐진다. 우측의 행랑과 바깥사랑채 사이에는 후원인 뒤편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ㄷ 자로 된 줄행랑은 모두 19칸이며, 그 안에는 마굿간을 비롯하여 마부방, 측간, 하인방과 부엌, 곳간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 대문과 연결이 된 줄행랑만 보아도 이 집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ㄷ 자로 꺾인 행랑채가 있다. 이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어 '줄행랑'이라고 부른다. 맨 아래는 큰 사랑이 있는 후원으로 나가는 문이다. 


바깥사랑은 이 집을 찾아 온 손님들이 머물거나 유숙을 하는 곳이다. 사랑채가 공간이 부족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는 이 바깥사랑은 다섯 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후원으로 나가는 문을 사이에 두고 행랑채와 연결이 된다. 하지만 이 바깥사랑은 엄연히 독립된 공간으로, 행랑채와 구별이 되게 하였다.



바깥사랑채. 행랑채와 문을 사이로 이어져 있으며 손님들이 유숙하는 곳이다.



바깥사랑은 사랑을 바라보면서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리고, 두 칸은 대청마루이다. 그리고 우측 한 칸 역시 방을 드려 손님들이 유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바깥사랑과 줄행랑의 앞으로는 너른 바깥마당이 있으며, 중문채를 가기에도 거리가 상당하다.

양반집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수원 남창동 99칸 집. 독립적인 전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우리 고택의 전형적인 미를 갖추고 있는 집이기도 하다.


동영상 제작은 한국민속촌 답사에 동행한 '수원 씨티넷'의 김홍범 부장이 제작했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456-1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2호인 이웅재 고가가 자리하고 있다. ‘아이패드2’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6월 7일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찾아간 집이다. 이웅재 고가는 현 소유자의 16대 선조이며 마을의 전주이씨 향조이기도 한, 춘성전 이담손(1490년생)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처음으로 이 집을 지은 것은 연산군 6년인 1500년경에 지었으니, 벌써 50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고택이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장방형으로 구성된 대지는 북에서 남으로 비탈져 있어서, 군데군데에 축대를 동남향으로 쌓고 그 기단 위에 집을 앉혔다.


대문과 효자정려. 이 사진은 모두 '아이패드2'로 촬영을 하였다.

대문 위에 걸린 효자 정문

밖에서 보기에도 집은 넓지 않은 터에 오밀조밀하게 건물들이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솟을삼문으로 구성된 대문은 이 집의 품위를 나타내는 듯하다. 조선시대 지방 사대부가의 일면을 알아 볼 수 있는 이웅재 고가는, 대문 위에 효자현판이 걸려있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이문주에게 내려진 이 현판에는, 「有明朝 孝子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李文胄之閭」라고 적혀있다.

문간채도 이 무렵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5칸 규모이며 가운데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 안을 들어서니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집안은 공사 중인지 여기저기 자재들이 널려있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린다. 대문을 들어서면 5단의 장대석 축대 위에 올린 사랑채가 보인다.




 

안 행랑채 동편에 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상량문에 의하면 1864년에 세워졌다. 기록에는 고종 1년인 1864년에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사사랑채는 동편으로 두 칸 마루를 놓고, 서쪽으로는 두 칸 방을 드렸다.

방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빼 난간을 둘렀으며,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쓰임새가 있게 지어진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안채와 안담으로 연결이 되어있으며, 뒤편으로는 안채를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을 내어 놓았다. 그 뒤편으로는 높게 축대를 쌓고 지은 사당이 있다. 사랑채의 서쪽으로는 높임마루를 놓아 책방을 꾸민 안 행랑채가 자리한다.



양편에 날개를 단 안채 공루가 특이 해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동서 양측에 날개를 달아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기단을 높이고 그 위에 앉혔으며, 날개채는 단을 낮게 놓았다. 하기에 날개채의 지붕은 안채의 지붕보다 낮게 조성이 되었다. 안채는 큰방의 동측에 머리방 대신 도장을 설치하고, 도장 남측에 마루를 두고 이어서 방을 드렸다.

안채 대청을 바라보면서 우측날개에도 방을 따로 두고 있다. 상부는 외부를 판벽으로 두른 공루이고, 하부는 아궁이를 둔 공간을 배치하였다. 큰방의 서쪽에는 찬방을 두어 부엌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현재는 실내의 공간은 조금 바뀐 듯하다. 이러한 가옥의 배치나 구성은 딴 집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이다.




안채 전면에는 ㄷ자형의 안 행랑채가 날개를 벌려 안채를 감싸고 있다. 이는 방아실, 안변소, 안광, 책방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방아실과 안광이나 책방 등은 사이가 떨어져 있다. 이러한 건물의 배치는 풍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안채로 불어드는 바람을 막지 않기 위함인가 보다. 방아실의 벽을 타고 바람이 안으로 불어들게 조성하였다.

넓지 않은 대지를 이용해 건물배치를 한 이웅재 고가. 나름대로 건물배치의 미학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사를 하느라 조금은 산란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독창적인 가옥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사가 마무리 되는 시기에, 제대로 된 답사를 다시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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