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이가 없다. 이 정도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만하다. 도대체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를 쓰레기통 취급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한 마디로 참담한 심정이다. 831,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았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귀부와 이수가 그동안 몸돌을 복원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신라 때 창건한 혜목산 고달사지 석조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저만큼 새로 몸돌을 치장한 원종대사 탑비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가려는데, 중간에 보이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된 석조 안에 무엇인가가 널려있다.

 

 

이 석조는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 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석조는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형문화재를 쓰레기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이 석조 안에 무엇인가를 담은 봉지와 종이박스, 음식을 조리하는 휴대용 열기구 등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누구인가 이곳에서 컵라면 등을 끓여먹고 그 쓰레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것이다. 라면박스 안에는 라면도 몇 개 들어있고, 휴대용 조리기구와 그 케이스도 있다.

 

담배꽁초도 보인다.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라면 등을 끓여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처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먹고 난 것들을 하필이면 유형문화재인 석조 안에다 놓은 것일까? 마침 일요일을 맞이하여 고달사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경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은 어이가 없다면서 혀를 찬다.

참 대책 없는 사람들이네요. 어떻게 문화재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먹고 난 것들을 이렇게 문화재 안에다가 버젓이 쌓아놓을 수가 있는 것인지. 이 현장에도 문화재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게 무슨 짓거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창피하네요. 고작 이정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다니.”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 안에다 모아놓은 쓰레기들과 조리기구.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관리자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문화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하기 짝이 없다.

속이 비어버린 서낭나무 아래 부부가 나란히 섰다. 합장을 하고 난 뒤 남편은 무릎을 꿇고 부인은 잔에 술을 따른다. 그리고 맨 땅에서 삼배를 한다. 서낭할머니에게 드리는 마지막 예를 올리는 것이다.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335번지에는 화가 부부가 산다. 남편도 부인도 모두 화가이다. 하지만 생활을 하기 위해 남편이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작가마에 구워내는 도자기의 색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도자기를 구워 팔아도 생활이 되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생활자기를 만들라고 조언을 해보지만, 굳건히 자신의 길을 지켜간다.

 

단종이 울며 지나던 길 가에 선 서낭나무

 

이 부부가 사는 집은 상교리 중에서는 맨 끝 집이다. 이 집을 해우재라고 부른다. 해우재는 남편인 김원주(54)의 호이다. 아래채는 도자기 전시관과 손님맞이 방으로 사용을 한다. 20여 년 전 부부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곳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 터전을 내리면서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삶이 이 부부가 우리 것들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집에서 흙길을 따라 뒤편으로 돌아가면 여주 고달사지로 나가는 길이다.

 

그 길가 구부러진 곳에 6.25 한국동란 때 폭탄이 떨어져 한 편이 잘려나간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다. 속은 텅 비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늘 잎을 달고 있다. 이 나무가 바로 서낭할머니로 불리는 나무이다. 나무의 밑동으로 보아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것 같다. 이 나무가 서 있는 길은, 예전 단종임금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울면서 영월로 향하던 소로 길이라고 한다.

 

 

이포에서 배를 내린 단종임금은 지금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에 소재한 블로헤런 CC 안에 자리한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북내면 소재 고달사지 곁을 지나 이 좁고 낮은 고개를 넘어 서원리로 행했다는 것이다. 그 때도 이 서낭나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고속도로 공사로 나무를 자른다고

 

이곳이 제2영동고속도로 부지로 들어갔단다. 13일 이른 시간부터 굉음을 내는 중장비들이 일대를 시끄럽게 만든다. 전날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들을 하느라 늦잠이 들었다. 하지만 이른 시간부터 중장비 소음이 잠을 깨운다.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집이 울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밖으로 나가보니 7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주변에 중장비들이 여기저기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서낭할머니 나무는 상교리 주민들이 위하는 나무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김원주 부부가 사는 집에 사시던 할머니 한 분이 이 서낭나무를 지극히 위했다고. 하지만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반이 잘려나간 후 마을의 섬김이 끊어진 듯하다. 서낭나무 뒤편에는 옛날 제를 올리던 제단 터의 흔적이 보인다.

 

우여~ 서낭할머니 이제 떠나신다.

 

이제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이 서낭할머니 나무가 잘려나간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제를 올렸다고 하지만, 이 부부의 마음은 아직도 편치 않은 듯하다. 그 서낭할머니 나무에 대해 늘 마음속으로 정성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후 빗방울이 떨어진다. 막걸리 한 통과 북어 한 마리를 들고 서낭나무를 찾아갔다.

 

 

마침 이 집에 모임 때문에 들린 스님 한 분이, 서낭할머니께 마지막 축원을 해준다고 자청을 한다. 막걸리를 따르고 삼배를 한 후, 스님의 독경이 시작되었다. 서낭할머니를 마음속으로 떠나보내는 절차이다. 폭탄을 맞고도 살아남은 서낭할머니는 고속도로로 인해 댕강 잘리게 되었다.

 

스님의 독경이 끝 난 후 막걸리 잔을 손에 든 김원주의 피 토하는 소리가 즘골을 울린다. 통곡의 소리이다. 일제 때는 문화말살 정책으로, 그리고 그 뒤에는 우상이라고 떠들어 대는 광신도들에 의해, 그리고 새마을운동 때 무수히 잘려나간 서낭나무들이다. 이제 고속도로 공사 때문에 잘려나갈 상교리 즘골 서낭할머니. 마지막으로 막걸리를 늙은 나뭇가지 위로 냅다 쏟아낸다.

 

서낭 할머니 편히 가시오. 아무쪼록 무지한 것들이 할머니의 몸을 잘라도, 사고나 없게 해주시오.”

 

음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맛이 있는가? 보다는, 얼마나 낫이 있게 먹느냐가 중요하다는 개똥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음식은 정성이라느니, 아니면 손맛이라는지 하는 말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음식을 먹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얼마나 맛있게 먹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어릴 적 아이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저 녀석은 참 복스럽게 먹네, 이다음에 잘 살거야’라든지 ‘어째 밥을 그렇게 깨작거리고 먹느냐, 복 달아나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음식은 먹는 사람이 얼마나 복스럽게 잘 먹어 주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평소 소식을 하는 습관

 

난 평소에도 소식을 하는 편이다. 어디를 가나 밥을 한 공기 이상 먹어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소식을 한다고 하루에 끼니를 늘리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에 세 끼 식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그 체격에 그것 먹고 버티느냐’고 말을 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렇게 먹어왔기 때문에, 별 지장은 없는 듯하다.

 

그런 내가 아주 오랜만에 뼈다구탕 한 그릇과 밥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물론 산행을 하고 난 후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딴 때 같으면 그저 얼만 큼은 남기고 했으니 말이다. 함께 식사를 한 사람들도 그런 나를 보고 이상한 듯 쳐다본다. 아마도 그렇게 바닥이 보이도록 그릇을 비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난 이렇게 맛집을 소개한다.

 

난 맛집 블러거가 아니다. 하기에 맛집 블러거들처럼 이것저것 모든 것을 찍어대지도 않는다. 내가 맛집을 소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은 내가 먹었을 때 맛이 있어야 한다. 화학조미료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음식을 제일로 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식당을 들어가면 우선은 상차림을 한 장 찍어 놓는다. 그리고 반찬이며 이런 것들을 세세하게 찍는다. 이렇게 찍는다고 해서 그 다음으로 진척이 되지는 않는다. 우선은 찍어놓고 음식 맛을 보는 것이다. 음식이 맛이 있으면 그 다음에 차림표 등을 찍고, 그리고 나오면서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한다.

 

일단은 내가 명함을 달라고 하면, 그 집을 소개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맛이 있고 없음은, 순전헤 내 주관임을 밝혀둔다. 하기야 음식을 소개하는데 있어, 몇 사람의 입맛을 들어보고 난 뒤 소개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내 입에 맞으면 우선은 소개하는 절차를 거치니까. 전문적인 맛집 블로거와 나와의 차이가 바로 이런 점이다.

 

 

뼈다구에 잔뜩 붙은 고기, 바닥보인 그릇.

 

10일(토) 산행은 정말 악조건이었다. 천둥과 번개, 거기다가 들이붓듯 쏟아지는 장대비. 그 속에서 몇 시간을 산속을 헤맸으니 말이다. 그리고 찾아간 식당이다. 일부러 먼 길을 달려 맛이 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간 것이다.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215에 소재한 ‘주암삼거리식당’. 이 집이 바로 뼈다구탕을 먹으러 간 집이다.

 

식당은 주암리라는 크지 않은 시골의 구석에 있다. ‘이 촌구석에 무슨 맛집이람?’하고 생각을 하면 오산이다. 식당 앞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 차 있다. 그 비가 쏟아지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다. 삼거리식당의 앞으로는 금장천이라고 하는 큰 네가 흐른다. 이 물이 여주 신륵사 쪽에서 남한강과 합류를 하는 것이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뼈다구탕을 시킨다. 일행들도 모두 같은 것을 시켰다. 그런데 바로 나오지를 않는다. 오는 사람마다 뼈다구탕을 시켜 순서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밑반찬이라야 별 것이 없다. 김치, 깍두기, 야채(오이, 당근, 고추)와 양파, 그리고 된장이 다이다. 그리고 질그릇 안에 팔팔 끓는 뼈다구탕을 놓아준다.

 

그런데 이 집은 뼈다구가 좀 다르다. 고기가 많이 붙어있다. 그리고 뼈다구의 양도 만만찮다. 도심에서 먹던 뼈다구탕 보다는 양이 많은 듯하다. 뼈다구는 앞 접시에 건져내고 밥을 말았다. 뼈다구에 붙은 고기를 골라먹으면서도 양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먹다가 보니 맛이 담백하다. 오래도록 끓인 국물 맛이 일품이다.

 

결국엔 탕 그릇이 바닥이 보이고 말았다. 이렇게 깨끗하게 식당 음식을 먹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특히 탕 종류에서는. 한적한 시골의 작은 마을에 있는 ‘주암섬거리식당’. 다음에 이곳을 찾아간다면 한 번 또 먹어보아야겠다. 그 때도 지금처럼 맛이 있을 것인지를.

 

주소 :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215 주암삼거리식당

전화 : 031-882-0157

가격 : 뼈다구탕 6,000원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바로 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숙소야 어디를 가든지 시설 좋은 숙박업소가 많아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먹거리는 다르다. 자칫 잘못 찾아 들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정말 좋은 식당을 만나면 그날은 운수대통한 날이란 생각이다.

 

6월 17일(월), 평소 같으면 지역에서 땀 흘리며 취재를 하겠지만, 오랜만에 도시를 벗어났다. 마침 함께 동행을 할 사람이 있어, 여주군으로 향했다. 이번 여주군의 여행은 문화재 답사도 중요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남한강의 보 주위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남한강에는 강천보, 여주보, 이포보 등 세 곳에 보가 설치되어 있다.

 

 

시간 늦은 점심, 답사 때마다 제 시간을 못 맞춰

 

답사를 하다가 보면 언제나 제 시간에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날 답사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천년고찰이라는 신륵사부터 들렸다. 신륵사는 언제보아도 좋은 절이다. 앞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기 때문이다. 이런 절을 찾아가면 그야말로 횡재를 한 기분이다.

 

오래 묵은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보물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보물만 6점에 보호수 2그루, 거기다가 지방문화재 등이 널려있는 곳이다. 신륵사는 매년 한 번 정도는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강에 세 곳의 보가 들어서고 주변이 직강하천으로 정리가 되면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제일먼저 찾아갔다.

 

여기저기 불사를 하느라 부산하기도 하다. 평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은 찾아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사람들이 찾아오는 절집이기도 하다. 신륵사에서 나와 때 늦은 밥집을 찾아들었다. 신륵사에서 북내면 소재지로 찾아가다가 우측 다리를 건너 북내면 신접리로 들어섰다.

 

 

시간은 벌써 오후 2시 가까이 되었다. 아침을 일찍 챙겨먹은 것도 이럴 때는 탈이다. 동행을 한 분도 많이 시장 끼가 돌았을 텐데, 내 생각만 나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하다. 경치 좋은 곳을 찾다가 보면 너무 시간이 오래일 듯해 길가에 있는 집을 찾아들었다. ‘돈정’이라는 식당이다.

 

푸짐한 밥상,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여주군 북내면 신접리 180-1에 소재한 두루치기 촌밥상 전문인 ‘돈정’.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넓지 않을 것 같은 식당인데, 안으로 들어가니 방과 홀이 큼지막하다.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골치고는 시설이 꽤 깨끗하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손님들이 방에 차 있다. 메뉴판도 나무에다가 써 놓았다.

 

 

시골스런 촌 밥상이 한 상 차려진다는 안내문구와 함께 촌밥상의 메뉴가 보인다. 두루치기 촌밥상을 주문했다. 1인 분에 15,000원. 그리 싼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음식을 시켰으니 우선 나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음식 운반차에 한 가득 실어 내오는 반찬들. 말마따나 반찬들이 시골에서나 만나 봄직한 것들이다.

 

음식이야 특별한 맛이 아니면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이 집은 자랑이 하고 싶다. 가격은 그런대로 싼 편은 아니라고 해도, 우선 벽에 걸려있는 문구들이 마음에 든다. 정성껏 내온 찬도 그렇지만, 하나라도 무엇인가 더 주고 싶어 하는 주인장의 마음이 따듯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시간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가 만난 촌밥상 한 상. 함께 동행을 한 지인도 좋았다고 한다. 하긴 음식 맛이야 누구나 비슷한 입을 가졌으니 말이다.

전화 / 031) 883-9975 / 010-3944-7051

여주읍에서 신륵사 입구를 지나 북내면 소재지를 지나면 양평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구불거리는 지방도를 따라가면, 우측으로 금당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석우리 선돌>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꺾어 장암리 방향으로 600m 정도를 들어가면, 양어장 안에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이 있다. 그 안쪽에 서 있는 것이 경기도 기념물 제 132호인 석우리 선돌이다.

 


 

석우리 선돌이 무슨 용도로 사용이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곳이 1895년도까지 도계(道界)였기 때문에 '경계석'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석우리는 1895년까지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에 속해 있었다. 1895년 여주군에 편입이 되고, 1914년 일제에 의해 실시된 대대적인 행정통폐합에 따라 석장, 입석, 장우동을 병합하여 석우리라 하였다.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행정통폐합은, 우리나라 마을의 고유한 이름을 모두 잊어버리고 뜻도 없는 마을이름으로 바뀐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지금도 안타깝다.

 

이곳이 1895년도까지 도계(道界)였기 때문에 ‘경계석’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짙다

  
선돌은 높이 2.45m, 너비가 0.8m, 두께가 0,6m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선돌이 서 있는 근처의 마을이름이 북쪽 마을은 '담모랭이' 라 하고, 남쪽 마을은 '돌담'이라 부르는 것도 이 선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 경계 표시로 선돌을 세우면 주변을 돌담으로 쌓기 때문에, 그 돌담 근처에 있다고 해서 담모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돌담은 아마 남쪽마을이 담을 끼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석우리 선돌은 양어장이 길 쪽을 제외한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선돌이 선 곳은 큰 나무들이 서 있으며, 마을에서는 최근까지도 정월 대보름에 선돌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선돌은 높이 2.45m, 너비가 0.8m, 두께가 0,6m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윗부분은 손질을 한 흔적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앞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금당천이 흐르고 있다.

 

  
윗부분은 손질을 한 흔적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최근까지도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위하는 마을의 ‘신석(神石)’의 기능을 가졌다.


예전에 이 선돌의 기능이 어떠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지만, 최근까지도 마을에서 위하는 마을의 '신석(神石)'의 기능을 가졌던 석우리 선돌. 대개는 경계표시로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신앙적 거석문화로 볼 수도 있다. 단순히 경계표시로만 세웠다면, 마을에서 굳이 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석우리 선돌의 주변에 있었다는 지석묘를 보아도,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물의 한 형태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여름철 주변 숲이 무성할 때 다시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지금보다는 좀 더 운치 있는 모습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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