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때의 성으로도 알려진 남한산성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축성은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하였다.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작금에 들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남한산성. 연차적인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은 많은 구조물과 성벽 등이 옛 모습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남한산성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의 총 길이는 11.76km에 달한다. 본성은 9.05km이며 옹성이 2.71km이다.

 

 

남한산성 제1암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축성 때 승병들이 묵었던 9개소의 사찰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경사. 그 주차장 한편에 성 밑으로 내려가는 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은 본성에 11, 봉암성에 4, 그리고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하는 비밀통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적의 배후를 교란하거나, 식량을 은밀히 운반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장경사 암문이라고도 부르는 제1암문은 형태가 특이하다. 딴 암문들은 성곽을 돌출시키고 그 안에 암문을 숨겼지만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이 돌출되어 있지 않다. 성벽에 아취모양을 구성하고 그 안에 문을 달았다. 문의 기둥을 고정시키는 돌출부는 아래와 위 양편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 이 암문은 작지만 두 짝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암문은 성벽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진다. 이곳은 경사가 급하고 성벽이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주변의 성벽에는 몇 개의 수로가 나 있다. 바닥에는 돌을 깔았으며 천정도 커다란 장대석을 이용해 덮었다. 암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경사로 통하게 되어있어, 비상시에는 많은 승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와선정(臥仙亭), 신선이 누운 자리일까? 아니면 경치가 너무 좋아 신선이 내려와 이곳에서 잠을 잔 것일까?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골띠말. 좁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마을 끝 계곡가에 자리 잡은 와선정이 있다. 정자 건너편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쯤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와선정이 돌담에 둘러싸인 채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다보이는 와선정은 흡사 골짜기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와선정이라고 했을까? 날이 추워서인가,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 와선정은 사철 경계가 다 다르다고 한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여름철 이 노송들과 함께 주변의 느티나무가 어우러지면, 또 다른 풍광을 만들어 낼 것만 같다.

 

 

다리를 건너려고 보니 글이 있다. 2004년도에 이 다리를 축조하면서 곁에 세워둔 비다. 다리에는 오현교(五賢橋)라 적혀있다. 이 정자를 지은 태백오현(太白五賢)을 상징하는 다리다. '병자호란(1636)에 벼슬도 버리고 太白山下 춘양에 은거하면서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켜 온 태백오현의 덕을 기리고 교유회동의 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다리를 놓고 오현교라 이름 짓다'라고 적혀있다.

 

다리를 건너 와선정으로 다가간다. 와선정은  태백오현이라 칭하는 손우당 홍석(洪錫, 1604~1680), 두곡 홍우정(洪宇定, 1595~1654), 포옹 정양(鄭瀁, 1600~1668), 잠은 강흡(姜恰, 1602~1671), 각금당 심장세(沈長世, 1594~1660)가 이곳에 은거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와선정이란 이름은 주변의 경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사덕암이라는 바위는 덕을 기리고, 은폭이라 하여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은색인데, 그 밑 바위가 신선이 누운 것 같다고 하여 와선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며 와선정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

꾸미지 않은 간단한 현판도 태백오현의 심성을 닮았다

 

태백오현은 모두 이 와선정에서 10리~30리 거리 내에 은거를 하였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날마다 이곳 와선정에 모여 회합을 갖고, 풍류를 즐겼다.

 

와선정은 계곡 쪽만 놓아두고 돌담으로 둘렀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계단이 있다. 계단을 내려서면 와선정의 출입구다. 현판은 그저 퇴락한 옛것 그대로 걸려있다. 안은 문을 잠궈 들어갈 수가 없지만 누마루방이다. 아마 여름 한철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 정도로 지어진 정자는 사방에 문을 내었다. 문수산에서 발원한 초계천이 시원한 산바람을 몰고 들어올 수 있도록, 사방을 모두 열어젖히고는 했나보다.

 

와선정은 난간을 두르고 계곡물이 흐르는 쪽으로는 모두 뮨을 내었다.

  
방은 온돌을 놓지않고 누마루로 깔았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다. 사방에 난 문을 열면 은폭과 사덕암, 그리고 흐르는 물과 늙은 노송, 맑은 물이 흘러가는 모습.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자다. 태백오현은 이곳에 모여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경계에 눈을 떠 스스로 신선이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봉화는 군내에만 100여 개가 넘는 정자들이 있다. 와선정은 그 많은 정자 중 빠지지 않는다. 실록이 우거진 여름 철,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발길을 옮겨야겠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 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이 남한산성은 조선 왕조의 치욕과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슬픔이 함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조선조『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치욕의 아픔을 지닌 산성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였다. 이런 일로 인해 남한산성은 조선조 역사에 치욕의 성이 된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남한산성 내의 시설로는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등이 있다. 이 중 광주시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동문을 찾아보았다. 동문은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광주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문이다. 현재 동문 앞의 오르막길은 일방통행으로 갈라져 있고, 그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문이 서 있다.

 

 

수문, 제11암문과 함께 있는 동문

 

동문은 그 옆으로 수문이 나 있고, 수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 있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서 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하기에 이 문을 통해 우마차가 다닐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문의 편액에는 ‘좌익문’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좌측에 해당하므로, 좌익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 동문은 조선조 선조 때 보수를 하였고, 인조 2년인 1624년에 다시 건립을 하였으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를 하였다. 동문 밑으로 현재 길을 내느라 성곽이 터진 아래편으로는 수문이 숨어 있다. 남한산성은 해발 370~400m의 능선을 따라 축성을 하였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남한산성의 지형상, 산성 내의 모든 물은 대부분 이 수문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갔을 것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한의 문이 되어버린 동암문

 

수문의 바로 위편으로는 경사가 급한 성곽이 보인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라고 하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원래 군사들이나 물자를 적에게 발견이 되지 않게 운송하기 위하여 축조한 문이다. 암문을 통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 위한 성의 귀중한 요소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모두 16개소의 암문이 있다. 동문에 인접한 이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 5.6m에 달하는 것으로 암문 중에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 이 동암문이 이렇게 큰 이유는 동문이 계단식 축대위에 축조를 했으므로,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이 동암문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동암문은 문짝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틀이 남아있다. 이 동암문을 일명 ‘시구문’이라고 부른다. 시구문이란 시신을 내어보내던 문이다.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기해박해를 통해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르) 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많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그 요소요소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남한산성의 곳곳을 뒤돌아보게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한산성 전역을 돌아보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내는 것도,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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