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를 참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다. 요즈음 전국적으로 유명한 벽화가 어디 한 두 곳이던가? 수 없이 많은 벽화가 전국적으로 조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벽화를 많은 블로거 등 SNS를 하는 사람들이 찾아다니면서 소개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벽화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그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한다.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춘 마을이 있다. 아마 이곳보다 더 좋은 마을은 그리 흔치 않을 것 같다. 수원시 장안구 조원1. ‘대추동이마을이라고 한다, 조원동은 과거와 현대가 함께하는 곳이다. 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면 참 알지 못할 마을이란 생각이 든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저 언젠가 몇 생애 전에 어디서 본 듯한 생각이 든다.

 

 

그 많던 대추나무는 다 어디로 갔소?

 

광교산은 수원의 진산이다. 조원동은 이 광교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옛 명칭이 조원말이나 대추원혹은 주안말이라고 했다. 조원말은 조선조에 이 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벼슬이 이조참의에 올랐는데 그 사람의 호가 <조포>였단다. 호를 조포라고 쓰던 분의 함자는 이동일이다.

 

조원동은 대추나무가 많다고 하여 대추원, 조원말, 또는 조원, 주원말, 주안골, 주원, 주안말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한편 조원동은 백제 때 <우성위>라는 인색한 부자의 이야기도 전한다. 이 우성위라는 백제시대의 인물을 이야기 하면서 갑자기 지금의 조원동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도 조원공원의 땅 부자들 때문은 아닐까?

 

 

백제 때 임금의 부마인 우성위라는 사람이 조원동 갓모봉 아래 살았다. 현재 조원동이 모두 우성위의 땅이었단다. 하지만 그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우성위의 집을 찾았다. 시주를 부탁했으나 거절을 당하고 물이라도 한 모금 달라고 했으니 그도 거절당했다

 

전설은 늘 재미있다.

 

그 해는 유난히 가뭄이 들었다. 논밭이 다 타들어가고 있었던 터에 스님은 우성위에게 쫓겨나면서 마장산 너머 광교산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끌어오면 가뭄이 해결될 텐데...”라고 했다. 우성위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 스님을 잡고 물었다. 스님은 마장산 중간을 파면 절로 광교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이곳으로 모일 것이라고 대답하고 길을 떠났다.

 

 

우성위는 당장 물을 끌어올 수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원동은 광교산에서 흐르는 수원천보다 지대가 높았다. 그리고 조원동의 마장산 일대는 거문고 혈이라고 하는 명당 중의 한 곳인 탄금혈(歎琴穴)이었다. 스님이 복수를 하고 떠난 것이다. 우성위는 명당의 혈을 끊어 가산이 탕진되고 망하고 말았다. 우성위가 팠다는 수로의 흔적이 30여 년 전만 해도 영화동에서 조원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길가에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기와와 벽돌로 이렇게 벽화를 그리다니

 

조원시장에서 장안구청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좌측에 숲이 우거진 곳이 있다. 바로 맹꽁이 서식지라는 조원공원이다. 그 공원 산자락 밑에 도로를 따라 축대가 있다. 높이는 1m 안팎이다. 그런데 그 축대가 바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벽화길이다. 2014 마을르네상스 사업으로 완성한 대추동이 문화마을의 사업으로 완성을 했단다.

 

3월부터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벽화길. 그저 바라다보면 그 멋을 느끼기에 조금은 부족하다. 천천히 벽화를 둘러본다. 세상에, 붉은 적벽돌과 기와조각을 갖고 이런 벽화를 조성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 안에는 별별 것이 다 있다. 화성도 있고 수원도 있다. 당연히 조원동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마돈나도 있다.

 

이 벽화조성은 조원초등학교, 영화초등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체험학습으로 참여를 했다고 한다. 이런 벽화를 조성하다가 보면 지역이나 세대 간의 갈등은 소통과 나눔으로 해소하고 지역 공동체를 창출하게 된다. 그야말로 우리민족의 정서가 깊이 뿌리내린 이름다운 벽화길이 조성된 것이다.

 

한참이나 벽화길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데 지나던 한 분이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어머니들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그 기와와 벽돌을 깨고 붙이면서 정말 재미있어 했어요. 우리 조원동 좋은 마을예요. 많이 자랑 좀 해주세요.”

 

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3척 되는 곳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1척이다.

 

옹의 높이는 9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각각 길이 85촌 직경 1]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매 첩마다 3개의 구멍 또 북쪽 끝 가로 첩에는 2개의 구멍] 14기를 뚫었다.

 

 

밤에 돌아 본 옹성, 이게 웬일이지

 

위에 설명은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의 옹성 설명이다. 19일 밤 8시부터 두 시간여 동안 화성 야경을 촬영하기 위해 장안문에서 창룡문을 거쳐 남수문까지 걸었다. 장안문에서 화홍문까지는 성 밖으로, 그리고 화홍문에서 창룡문까지는 성 안으로 돌았다.

 

그리고 창룡문에서 다시 성 밖으로 나와 남수문까지 걸었다. 그런데 창룡문을 촬영하고 옹성을 살펴보니 군데군데 벽돌이 깨어져 나갔다. 밤이라 음영이 생겨 보기에도 흉측한 모습이다. 옹성에서 성벽으로 오르는 적들을 위해 끓는물과 기름을 붓던 현안은 벽돌이 파여져 나가고, 오물까지 쌓인 곳도 있다.

 

지난 해 10월에 이곳을 돌았을 때보다 더 많이 쪼개져 나간 듯하다. 겨울동안 얼어 있던 것이 날이 풀리면서 벽돌이 쪼개져 나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에 밤이 되어 음영이 생기면서 더욱 심각해 보인다. 이제 곧 많은 사람들이 화성을 찾아올 텐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할까?

 

 

봉돈의 외벽 벽돌도 훼손돼

 

창룡문의 옹성 외벽 벽돌을 돌아본 후 천천히 걸어 남수문 방향으로 향했다. 19일의 계획은 남수문까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마치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가다가보니 밤의 광경이 마치 외국의 어느 고성처럼 보이는 웅장한 봉돈이 보인다. 전쟁 시에 봉화를 올려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봉돈 역시 외벽이 벽돌로 쌓여있다. 그런데 봉돈 외벽의 벽돌 역시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흉물스럽다. 곧 사람들이 화성을 관람하기 위해 수원 화성으로 몰려들 계절이다. 그런데 이렇게 벽돌이 떨어져 나간 모습들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이요, 수원의 대표적인 관광 동선이 아니던가?

 

훼손이 된 이유가 어려가지가 있다. 화성 창룡문의 옹성 외벽이나 봉돈 외벽의 벽돌의 훼손은 풍화작용에 의해 자연적인 훼손이다. 하지만 보기에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들이 보기에도 흉하다. 하루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화성이기도 하지만, 수원의 상징인 화성이기 때문이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에 소재한 미륵당.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미륵당집은 그동안 몇 번이고 찾겠다고 하던 곳이다. 답사라는 것이 멀리 있는 곳은 계획을 세워 가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곳은 바로 보지 못한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평생 오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참 답사란 것이 가끔은 사람을 곤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코앞에 당집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양 돌아다녔으니... 애초 첫 설명이 잘못됐었다. 미륵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고 조금 산길로 걸어간다는 이야기에 애꿎은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잘 아신다는 분이 이렇게 알려주었으니, 주변만 맴돌 수밖에.

 

 

주변을 돌면서도 당집을 발견 못해

 

몇 번을 파장동 직원들과 통화를 하고 난 후에야 바로 눈앞에 있는 당집을 발견했으니, 답사를 하면서도 이런 경우는 또 생전 처음이다. 당집 앞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편에 한 칸으로 지어진 당집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당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집의 앞에 걸린 현판은 미륵당이 아닌 '법화당(法華堂)'이었다.

 

아마도 마을의 주민들이 미륵당이라고 부르던 것을, 누군가가 미륵당을 법화당으로 바꿔 부른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959년과 그 이듬해에 보수와 증축을 하고 법화당으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굳게 닫힌 문, 까치발로 보다

 

그런데 문제는 미륵당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는 것이다. 안을 들여다 보아야하는데, 문엔 조그마한 공간도 없었다. 위를 보니 문의 상단이 살창으로 되어있다. 까치발을 딛고 위로 들여다보니, 커다란 거구의 미륵이 보인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조성을 했다고 하는 미륵은, 온통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 미륵당은 원래 조선 중기에 건조된 건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석불은 '미륵부처'란다.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는 219cm, 흉부가 107cm, 두부의 높이가 114c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이 석불은 소발이며, 머리 위에는 넓게 육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보개를 얹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미륵당 석불은, 희게 회칠을 해놓아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미륵님 미륵님, 선이라도 보세요?

 

이마의 백호와 입술을 붉게 칠을 하고, 눈썹과 눈을 그려 넣었다. 머리도 검게 칠을 해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가 힘들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작은 편이며 어깨도 좁게 표현을 하였다. 손은 가슴께에 표현을 한 듯한데, 까치발을 딛고도 밑까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현재는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서 마을의 향민을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 미륵을 위하고 살던 토착민들이 다 마을을 떠난 듯하다. 매일 수백 대의 버스가 앞으로 지나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미륵당 석불. 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모처럼 틈을 내어 찾아간 수원 파장동 미륵당 석불. 생긴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 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섬겨왔다던 미륵은, 이제는 외롭게 혼자서 굳게 닫힌 당집을 지키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영험한 미륵조차도 버려두는 것인지.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또 하나의 사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 훼파가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운한각(위)과 현판

 

생전에 어진을 가장 많이 그린 정조

 

어진이란 역대 왕들의 모습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을 말한다. 어진제작은 모두 세 종류로 도사(圖寫)와 추사(追寫) 그리고 모사(模寫)가 있다.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린 것을 말한다.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이다. 모사란 이미 그린 어진이 훼손됐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때 원본을 범본(範本)으로 해 신본을 그린 것을 말한다.

 

왕의 모습을 지칭하는 어진은 진용(眞容), 진(眞), 진영(眞影), 수용(晬容), 성용(聖容), 영자(影子), 영정(影幀), 어용(御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 다양하게 불렸다. 모두 왕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숙종 39년인 1713년 숙종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것을 이이명(李頤命)의 건의로 ‘어진’이라 했는데, 이후 이 명칭을 따라 어진이라고 주로 일컫는다.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운한각의 내부

 

정조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어진을 그렸다. 정조의 어진은 즉위년과 즉위 5년, 즉위 15년에도 어진 제작이 이어졌다. 하지만 현존하는 정조의 어진은 선원보에 있는 간단한 스케치 말고는 남아있지 않다. 현재의 어진은 최근에 새로 그렸는데 할아버지인 영조와 닮았다고 하여, 경복궁에 남아있는 영조의 어진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한다.

 

화령전 둘러보기

 

원래 화령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비롯하여, 일이 있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이안청과 풍화당, 그리고 제정과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래 건물 그대로 남아있던 운한각과 풍화당, 그리고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조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인 운한각의 멋

 

사람들은 운한각을 단순히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어진봉안각’으로만 알고 지나친다. 하지만 운한각을 자세히 돌아보면, 이 전각을 지을 때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쓴 것인지 알 수 있다. 운한각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명장들이 모여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살창으로 꾸민 외삼문과(위) 운한각 앞에 마련한 넓은 월대(아래)

 

11월 3일과 4일 수원에는 8도에서 파워소셜러들이 모였다. 미디어 다음의 주관으로 1박 2일 수원 팸투어에 참가한 소셜러들은, 둘째 날인 4일 오전 행궁을 돌아본 뒤에 화령전으로 향했다. 운한각은 우선 외삼문부터가 남다르다. 외삼문은 솟을삼문으로 판자문을 달고 있지만, 그 위편은 살창으로 꾸몄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외삼문을 왜 살창으로 꾸몄을까? 그것은 순조가 아버지인 정조의 효심을 따랐기 때문이다. 즉 어진을 모셨지만, 평소 살아있는 정조를 대하 듯 한 곳이 바로 운한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이 곳 운한각에서 길 밖으로 지나는 백성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월대를 넓게 하고, 외삼문의 위를 살창으로 꾸민 것이다.

 

  위는 운한각 조성 당시 걸어 놓은 방로 200년이 지났다. 아래는 제향 때 차일을 치기 위한 도르래(붉은 원 안)

 

운한각, 이래서 아름답다

 

아버지 정조대왕의 효심을 어려서부터 보아 온 순조임금은, 운한각을 정조가 살아계신 처소 처럼 꾸며 놓았다. 평소 백성들을 생각한 정조가 달을 보고 거닐 것을 생각해, 악사들이 앉는 월대를 넓게 꾸몄다. 그리고 어진봉안각이긴 하지만 정조가 그곳에서 생활을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생전의 기억을 더듬어, 방에는 아궁이를 놓아 늘 불을 때고는 했다.

 

겨울철에도 따듯한 곳에서 쉬시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 아궁이는 장마철에도 운한각이 눅눅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또한 정면의 문 위에는 발을 늘일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현재 문 위에 있는 발은 운한각 조성 당시 것이니, 이미 200년이란 세월이 지난 것이다.

 

위는 운한각 측면에 있는 아궁이. 그 위로 통풍장치가 보인다. 아래는 운한각의 뒷벽. 특이하게 벽돌로 쌓았다

 

운한각의 정면 기둥 위를 가로지른 부분에는 도르래가 달려있다. 이것은 제를 지낼 때 차일을 치기위한 것이다. 그만큼 이 운한각은 하나하나 세심한 신경을 써서 지은 전각이다. 측면으로 돌아가면 바닥이 눅눅치 않게 환기를 시키는 통풍구가 있고, 운한각의 뒷벽은 벽돌담으로 조성을 해 멋을 더했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고 돌아보는 운한각은 그저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단순한 전각으로만 보일 뿐이다. 우리문화재에는 그것을 조성한 이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문화재를 대할 때 언제나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는 것은, 그런 정신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다

검은 벽돌로 성에서 돌출시켜 쌓아올린 포루. 포를 쏘는 구조물인 포루는 성의 몸체에 凸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그 위에 포사를 3층으로 지은 구조물이다. 포루는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며, 그 안에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게 하였다.

 

이런 설명만 갖고는 포루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화성에는 모두 5개의 포를 쏘는 포루가 있는데, 관리를 위해서 모두 잠가놓았다. 하기에 포루의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포루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포루의 형태는 같게 생겼지만, 크기는 조금 다르다.

 

 

 포루는 성안에서는 맨 위에 전각만 들어나지만, 성 밖에서 보면 3층으로 된 구조물이다.


 

3층으로 된 포루, 위용이 대단해

 

화성의 포루는 3층으로 되어있다. 맨 위에 총안을 낸 문은 판문(板門)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포루의 책임자가 있어, 적을 향해 공격을 지시하게 된다. 포루는 성 안에서 보면 맞배지붕이지만, 성 밖에서 보면 팔작지붕으로 그 형태가 다르다. 성 밖에서 보면 3층의 구조로 되어있지만, 성 안에서 보면 맨 위의 전각만 들어난다. 이 포루 안에는 몇 명의 군사들이 들어가 있었을까?

 

화성박물관 이달호 관장은 포루의 병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포루 안에 병사들이 몇 명이나 들어가서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포루는 3층으로 되어있는데, 그 규모 등으로 볼 때, 한 층에 대략 5~6명 정도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2층 상설 전시관에는, 화성문화실에 포루의 한 면을 절개한 조형물이 있다. 이곳에는 포루 안의 생김새와 그 안에 병사들의 모습이 모형이로 만들어져 있어, 포루의 대략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과거 성벽 위에 있는 여장의 한 타에 5~6명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던 것을 보면, 아마도 포루의 한 층에 그 정도 인원이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모형을 보면 맨 위층인 전각에는 포루 안에서의 전투를 지휘하는 무장과 총수들이 있고, 1층과 2층에는 불랑기를 가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임진왜란 전부터 사용한 불랑기자포

 

홍이포, 신기전, 녹로 로 등과 함께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이 많이 사용했던 불랑기자포는 현재 보물 제86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 861-1호는 육군박물관에 3점이 있으며, 861-2호는 서울역사박물관에 1점이 지정이 되어있다.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시키는 화기로는 조선시대 유일한 후장식 화포이다. 불랑기는 15세기 포루투칼을 포함한 서구제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는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졌었으나, 이미 그 이전인 명종 때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인 불랑기자포에는, 자포 포신 표면 우측에 <가정계해 지통중칠십오근팔냥 장김석년(嘉靖癸亥 地筒重七十五斤八兩 匠金石年)>이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자포가 1563년에 제작되었으며 중량이 75근 8냥이고 장인 김석년에 의해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랑기로 무장한 장용영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던 화성과 포루. 아마 당시 이들의 화력은 막강했을 것이다. 그러한 포루를 돌아보면서 과거 ‘정조의 꿈’이라는 화성이 더욱 달라져 보인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만난 포루 하나로만도 가슴이 벅찬 이유이다. 역사 속의 산물이라는 존재는, 늘 그렇게 세월이 지나도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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