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이야기(3) - ‘민초들의 높은 굴뚝, 굴뚝이라도 높아야지'
처음에 굴뚝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일 먼저 궁궐의 화려한 굴뚝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사대부가의 기와집의 굴뚝에 대한 글을 적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대부가도 있지만, 주로 민초들이 살던 초가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궁궐의 굴뚝과 사대부가인 기와집의 굴뚝도 특징이 있지만, 초가의 굴뚝은 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초가는 지붕을 얹은 짚이 불에 잘 붙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비교적 굴뚝을 높게 올리거나, 멀리 떨어져 세운다. 대개의 경우는 높이 올리는 편인데, 이는 낮은 굴뚝을 통해 불똥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초가의 굴뚝은 높거나 멀거나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한 가지 답답한 일을 겪는다. 그것은 바로 복원이라는 허울아래 망가지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들이다. 전문적인 보수 기술자들이 복원을 한다고 믿고 있는데, 정작 돌아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괜히 겉멋을 부리려고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아프다.
초가의 굴뚝인 그 구조상 굴뚝이 지붕보다 높아야 한다. 아니면 연도를 길게 빼어 집과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이러한 이유는 불을 붙기 쉬운 지붕 때문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장작을 주로 때지만, 민초들은 삭정이나 검불 등을 주로 땐다. 그러다가 보니 불똥이 굴뚝을 통해 날아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짚으로 이은 초가는 불똥만 튀어도 불이 붙을 수가 있다.
(사진은 용인 한국민속촌에 있는 초가집 굴뚝이다. 하나는 지붕보다 높게 올라가고, 돌로 쌓은 굴뚝은 집에서 떨어져 있다)
그런 화재를 염려해서 굴뚝을 높게 올리는 것이다. 굴뚝이 높으면 그만큼 불똥이 튈 확률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높게 할 수가 없을 때는 굴뚝을 연도를 길게 빼서 멀리 놓는다. 이 또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어이없는 요즘 초가의 굴뚝, 아예 굴뚝이 없기도
초가의 굴뚝이 더 높은 이유는 민초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잘 마른 장작하나 제대로 땔 수가 없는 지난 시절, 그나마 나무 삭정이나 검불이라도 많이 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땔감들은 굴뚝을 통해 곧잘 시뻘겋게 불똥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서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에, 굴뚝을 높이거나 멀리 설치를 해야만 한다.
이런 초가 굴뚝의 특성은 복원이라는 허울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질이 되어버렸다. 굴뚝의 연도를 뺀 후 길게 연소통을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도 끝에 작은 통 하나를 박아놓는 것으로 그쳤다. 만일 그런 곳에 검불이나 삭정이들을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 지핀다고 하면, 그야말로 불조심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옛 집들을 돌다가보니, 더 가관인 집도 있다. 아궁이는 있는데 아예 굴뚝이 없다. 세상에 굴뚝이 없는 집도 있을까? 그렇다면 연소는 어떻게 할까? 그저 대충 집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엔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굴뚝은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런 굴뚝이 없이 집을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사는 집과 살지 않는 집의 차이
이런 오류는 사람이 살고있는 집과, 사람이 살고있지 않은 집이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제대로 된 굴뚝이 보인다. 문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들이다. 거의 제 몫을 못하는 보여주기 위한 굴뚝을 만들어 놓고 있다.
초가집에도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 가면 굴뚝이 담장에 올라앉아 있다. 그것도 항아리로 마련하였다. 바람이 센 지역에서는 이런 굴뚝이 보이기도 한다. 담장 안에 연도를 집어넣고, 그 위에 항아리를 올려놓은 것이다. 바람에 무너지거나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굴뚝 하나에도 철학이 있는 우리네의 집들. 그 굴뚝을 돌아보면, 나름대로의 멋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미학이다.
굴뚝이야기(1) - 경복궁 ‘보물 굴뚝’ 앞에서 숨을 멈추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쓰고 싶었던 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굴뚝’에 대한 글이다. 남들이 들으면 ‘문화재 답사가 맞아? 무슨 굴뚝을’이라고 핀잔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뚝은 단순히 연기를 내는 곳이 아니다. 물론 그 용도야 연기를 내보내 불이 잘 들게 하기 위한 용도지만 말이다.
굴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 그 종류가 어지간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이나 반가의 집, 또한 민초들의 집을 다닐 때마다 난 굴뚝을 눈여겨보는 버릇이 생겼다. 굴뚝 하나에도 조형의 미가 있는 우리의 집들.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 첫 번째로 경복궁의 굴뚝을 둘러본다.
왜 하필이면 굴뚝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뿐이다. ‘굴뚝이 없는 집은 존재할 수 없다. 필요 없는 것 같지만, 굴뚝은 그 어느 것보다도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러면서도 굴뚝은 나름의 철학을 지니고 있다’
두 개의 보물을 지닌 경복궁의 굴뚝
사적 제117호인 경복궁은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로도 불린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경복궁을 건립하는 일이었다. 태조 3년인 1394년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경복궁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굴뚝이 있다. 바로 자경전 뒷담에 붙어있는 <보물 제810호인 십장생 굴뚝>과 <보물 제811호인 교태전 뒤 인공동산인 아미산의 굴뚝>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굴뚝만 갖고도, 경복궁의 굴뚝이 얼마나 딴 곳에 비해 아름답게 꾸며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목조건물을 본 단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은 현재 그 전각 자체만으로도 보물 제8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뒤쪽 자미당 터에 조대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자경전 뒷담에 조형한 십장생 굴뚝은 궁궐의 굴뚝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으로 꼽힌다.
십장생 굴뚝은 담의 한 면을 앞으로 한 단 돌출을 시켜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다. 굴뚝의 전면 중앙에는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벽면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십장생 도판에는 해, 산, 물, 구름, 소나무, 사슴, 거북, 바위, 학, 불로초, 포도, 새, 국화, 대나무, 연꽃 등이다.
경복궁 아미산 동산의 굴뚝
보물 제811호인 아미산 동산의 굴뚝은, 굴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적인 조형물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뒤에 조성한 인공동산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실이 있는 중궁전이다. 이 인공동산에 서 있는 굴뚝은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도를 연결이 되어있다. 이 굴뚝은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조성한 것이 아니라, 고종 2년인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한 것이다.
교태전 후원 인공동산인 아미산의 굴뚝
현재 4개가 남아있는 아미산의 굴뚝은 육각형으로 굴뚝의 기둥을 마련하였다.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소나무, 매화, 봉황, 국화, 불로초, 바위, 사슴 등을 벽돌로 구워 만든 도판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아미산 동산의 굴뚝은 우리나라 궁에서 만나는 굴뚝 중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창경궁이나 창덕궁의 굴뚝들이 흙과 백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복궁의 굴뚝은 채색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 외에 경복궁에서 만나는 굴뚝들
경복궁의 연희장소인 경회루 옆에는 수정전이 있다. 현재 수정전이 있는 자리는 세종 때 한글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있던 장소이다. 이 수정궁 벽에는 연가를 세 개씩 올린 담에 붙은 굴뚝이 있다. 이러한 담에 붙은 굴뚝은 경복궁 어디서나 만날 수가 있다. 이러한 굴뚝의 특징은 모두 전벽돌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굴뚝을 조형한 것일까? 그것은 굴뚝을 단순히 연기를 배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완전한 독립된 조형물로 인정을 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하기에 경복궁 안에는 숨은 굴뚝 찾기를 해도 좋을만한 많은 굴뚝들이 각양각색으로 숨어있다. 아이들과 함께 그것을 찾아내는 재미역시 쏠쏠할 것이란 생각이다.
‘오수의견’의 주인인 김개인의 생가지를 가다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는 ‘김개인의 생가지’가 있다. 김개인은 바로 주인을 구한 개인 ‘오수의견’의 주인이기도 하다. 오수의견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시대의 문인인 최자가 1230년에 쓴 『보한집』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지사면 영천리는 고려시대 거령현에 속해 있었다. 김개인의 집에는 주인을 잘 따르는 충직한 개 한 마리가 있어, 주인은 어딜 가나 그 개를 꼭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어느 날 동네잔치를 다녀오던 김개인은 술에 취해, 그만 길가에 있는 풀밭에 쉬고 있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현재의 상리 부근에 있는 풀밭에 누워서 잠이 든 김개인. 그런데 갑자기 들불이 일어나 무서운 기세를 풀밭을 태우고 있었다. 들불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던 김개인. 들불은 김개인이 잠든 근처까지 번져왔다.
목숨을 버리고 주인을 구한 의견
불이 타고 있는데도 주인이 깨지를 않자. 주인을 따라갔던 개는 근처에 있는 개울로 뛰어들어 몸을 적신 다음, 주인의 곁으로 다가오는 불길을 향해 뛰어들어 뒹굴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를 했는지 모른다. 결국 주인이 불에 타는 것을 막았지만, 개는 온몸이 불에 그슬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개인의 생가지가 있는 영천마을 석비와 김개인의 생가지에 조성한 안채
김개인의 집을 돌아보다.
지사면 영천리에 있는 김개인 생가지. 현재 그곳에는 생가지에 재현을 한 집 한 채가 있다. 금산, 장수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생가지의 집. 낮은 돌담을 둘러친 곳 옆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돌담 안으로 들어가면 헛간채 한 채와 안채 한 채이 있다. 아마도 옛날 집이야 어떻게 꾸며졌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그려내느라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허물어진 벽 볼썽사나워
오수에 있는 의견공원은 몇 차례인가 찾아가 보았다. 아마도 처음으로 찾아간 날이 2006년 8월 31일이었나 보다. 임실군 오수 의견공원 안에 있는 의견비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의견공원을 찾아 가다가 보니,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는 도로가에 김개인과 의견의 동상이 서 있다. 공원 안에는 오수의견비와 그 앞쪽으로 의견상 등이 있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여가는 길목에 서 있는 김개인과 의견의 동상과 의견공원(아래) 2006년 8월 31일에 답사를 한 자료이다.
회색빛 도시 담장에 핀 꽃
전주시 중앙동 일대에는 '웨딩거리'라는 거리가 있다. 말 그대로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준비를 할 수가 있다. 결혼식, 예복, 사진, 여행까지 이 거리에 있는 많은 사업장들이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거리는 요즈음 몸살을 않는다. 그나마 한편은 건물을 리모델링을 하고, 남들보다 색다르게 꾸며 혼기에 찬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삭막한 도시 건물에 걸린 전깃줄을 타고 오르는 수세미
삭막한 건물
그러나 한편은 삭막하다. 건물 앞에는 비어있음을 알리는 쪽지가 걸려있다. 그리고 그 거리는 낡고 퇴락했다. 한 때는 전주의 상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삭막한 도시에는 여기저기 꽃이라도 가꿔보지만, 그렇다고 회색빛 건물이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런데 정말 몰랐다. 그 삭막한 회색빛 벽을 타고 오르는 초록빛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이집과 저집을 연결한 전깃줄을 타고 건넌 수세미 덩쿨. 그곳에는 커다란 수세미와 작은 것 몇개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샛노란 꽃이 피어, 삭막한 도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커다란 수세미 한 개가 힘겹게 벽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길을 건너는 줄기에도 몇 개의 작은 수세미들이 매달려 있었다.
건너편 붉은 벽돌에는 줄기가 타고 오르며 꽃을 피웠다. 노랑색으로 물든 꽃 몇 송이가 붉은 담벼락과 함께 묘한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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