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남사당패의 조직을 보면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으로 4050명이 한패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기획을 맡아본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하기에 놀이마당을 여는 것을 곰뱅이 튼다라고 표현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글()곰뱅이쇠다.

 

다음으로는 뜬쇠가 있다. 뜬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트장이나 수석의 역할이다. 뜬쇠는 14명 내외로 구성이 되며 상공운님(상쇠징수님(수징고장수님(수장고북수님(수북호적수·벅구님(소고상동무님·회덕님(선소리꾼버나쇠·얼른쇠(요술쟁이살판쇠(땅재주꾼어름산이(줄꾼덧뵈기쇠·덜미쇠 등 각 부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뜬쇠의 밑에는 몇 사람의 기능을 익힌 가열이 있으며, 밑으로 초임자인 삐리를 둔다. 저승패는 나이가 먹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꼭두쇠는 패거리에 의해 선출되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잘못이 있어 신임을 잃으면 바꾸게 된다. 협의를 통한 다수결의 방식을 통해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는 없다.

 

 

37도 폭염이라는 날에 안성남사당전수소를 찾아가다

 

10, 올해 들어 수도권 최고기온이라는 폭염경보가 내린 날이다. 37도라는 살인적 더위라는 무더운 날에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34-3에 소재한 남사당전수관을 찾아갔다. 남들은 시원한 곳을 찾아 피서를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 날에 공연장을 찾아가다니.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남사당전수관은 돔 형식의 공연장을 마련하여 실내에서 관람객들이 시원하게 남사당의 온갖 기예를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염경보가 내린 날 무슨 공연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겠느냐고 하지만 공연시간이 임박하자 객석에는 400여 명의 관람객이 자리에 앉았고, 이들은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을 온통 남사당패들의 공연에 빠져 함께 박수치고 호응하며 연신 추임새를 넣어가며 즐기는 모습이다. 입장료(성인 10,000)를 지불하고 들어온 공연이지만 누구하나 공연입장료가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성남사당 풍물은 현재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이다.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1997930일 안성남사당풍물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면서, 안성남사당은 남사당의 기예를 전승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남사당 저수관을 건립하고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관객들을 상대로 곰뱅이를 튼다.

 

 

수원전통공연 무예24시 실내공연장 반드시 필요하다

 

안성남사당놀이는 그동안 공연을 거듭하면서 점차 관람객을 위한 공연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단순히 기예를 보여주기 위한 공연이 아니고, 기예는 기예대로 보여주면서 재미를 더한 것이다. 마당극 형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남사당 꼭두쇠였던 바우덕이의 이야기를 비롯해 남사당이 경복궁 중건시에 옥관자를 상으로 받아 풍물패의 으뜸이 된 내용들은 재미있게 엮어나간다.

 

기예와 해학이 넘치는 남사당놀이. 시원한 실내에서 연신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관람할 수 있는 남사당놀이에 찾아온 사람들은 이미 남사당패의 일원이 되어 그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남사당놀이를 관람할 때마다 늘 부러운 것이 바로 남사당전수관인 실내공연장이다. 비가오거나 날이 무더워도 공연을 할 수 있는 공연장, 수원 무예24기 시범공연도 이런 공연장이 필요하다고 늘 역설하고 있지만 무예24기 시범공연은 이런 실내공연장이 없어 안타깝다.

 

무예24기 시범공연을 볼 수 있는 실내공연장이 마련된다면 비가오거나 날이 무더워도 사람들은 편히 앉아서 관람할 수 있다. 요즈음같이 폭염경보가 내려도 시원한 실내에서 마음껏 정조의 혼이 깃든 무예24기를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연장이 먼저 생겼어야 하는 곳이 바로 수원이다.

 

 

1987년 안성시청(당시 안성군청)에서 남사당풍물놀이에 대한 책을 의뢰받고 안성에서 6개월 정도를 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읍내에서 서운면 청룡사까지 수도없이 발걸음을 한 적이 있다. 안성 청룡사는 충북 진천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고찰로 당시는 교통편이 상당히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안성남사당풍물놀아 도보>라는 제목으로 발간한 이 책은 공식적으로 나에게는 가장 먼저 세상에 내놓은 저서로 60P 분량의 소책자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꽤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안성남사당에 대한 기억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매년 한두 차례는 안성남사당전수관을 찾아가 남사당놀이의 공연에 푹 빠져드는 것도 그러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안성남사당전수관 실내공연장에서 남사당놀이를 관람하면서, 우리 수원 행궁인근에도 언제나 편하게 무예24기 시범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전용극장이 하루빨리 개관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한산 세모시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우리네 삶이 암울했던 시절에 나옴직한 소리다. 한산 세모시를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을 간단다.

 

안성 청룡이란 서운면에 있는 고찰 청룡사를 일컫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안성 청룡이었을까? 그 곳은 옛부터 남사당패들의 근거지였다. 칠사당패라고 불리던 남사당패들이 청룡사 밑에 자리를 잡고 봄이 되면 길을 떠났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돌아와 그 곳에서 한겨울 동안 기예를 익힌 후 다시 길을 떠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안성남사당패는 그 기예가 출중하기도 했지만 남사당의 원류로 알려져 있다.

 

남사당패의 시원(始原)은 신라 때부터 전해진 예인집단(藝人集團)이라고 한다. 과거 살기가 암울하던 시절, 많은 기예인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집단으로 취락을 이루면서 청룡사 일대는 남사당패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된다. 그들이 이 곳에 거주를 한 것은 안성장이 가까이 있고, 정월과 각 절기에 절 집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당놀이를 통하여 최소한의 생활대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룡사나 천안 광덕사 등 남사당패들이 절 주변을 택했던 것도 절 중창에 참여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삶을 영위할 목적이 앞섰을 것이라는 추측도 든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민가보다는 절집 근처가 삶에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남사당패의 조직을 보면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으로 4050명이 한패거리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기획을 맡아본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 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글()곰뱅이쇠다.

 

 

다음으로는 뜬쇠가 있다. 뜬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트장이나 수석의 역할을 한다. 뜬쇠는 14명 내외로 구성이 되며 상공운님(상쇠징수님(수징고장수님(수장고북수님(수북호적수·벅구님(소고상동무님·회덕님(선소리꾼버나쇠·얼른쇠(요술쟁이살판쇠(땅재주꾼어름산이(줄꾼덧뵈기쇠·덜미쇠 등 각 부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뜬쇠의 밑에는 몇 사람의 기능을 익힌 가열이 있으며, 밑으로 초임자인 삐리를 둔다. 저승패는 나이가 먹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꼭두쇠는 패거리에 의해 선출되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잘못이 있어 신임을 잃으면 바꾸게 된다. 협의를 통한 다수결의 방식을 통해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는 없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소리다. 꼭두쇠 바우덕이(본명이 김암덕(金岩德)이라 전함)는 능력이 있는 꼭두쇠로 그가 이끌던 남사당패를 개다리패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꼭두쇠였던 그는 남사당패를 최고의 기예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복만이패(꼭두쇠는 안성출신 김복만)1935년 당시 가장 활발하게 한수 이북을 누빈 유랑집단이었다. 복만이패를 이은 원육덕패(여주출신)는 해체된 복만이패 사람들을 규합하였으며 1939년 멀리 북간도까지 들어가서 활동하다가 해체되었다. 복만이패가 해체될 때 유일하게 안성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이원보패를 마지막으로 유랑집단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으로 남사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기복옹(74,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 1124). 마을의 두레에서도 그의 기량은 뛰어났다.

 

어려서 남사당패에 가담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학교도 늦게 졸업을 했어요. 17세가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쇠가 치고 싶어서 빈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두드려가면서 장단을 익혔죠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어디서 걸립패가 떴다 하면 그 길로 집을 나서곤 했다. 20여세가 되면서 꼭두쇠의 기질을 갖고있던 김옹은 안성 풍물팀을 이끌고 이승만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보다는 쇠를 치고 걸립을 다니는 일이 더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조직한 안성남사당 풍물놀이팀이 1988년에는 전주대사습에서 농악부분 최우수상을 받았고, 다음해인 1989년에는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해 김옹은 남사당 풍물놀이팀 상쇠로 참가하여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결국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 내 한 말을 들어보소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기도 한 방인데 신발을 벗고서 들어오소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모판에서 모를 뽑아내 논에 옮겨 심을 때 부르는 모심기소리다. 2030여명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선소리꾼의 메김소리를 받으면서 모를 심어 나간다. 뒤로 이동을 하면서 모를 심어나가는 농사꾼들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다. 논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 곳이 삶을 영위하는 곳이기에 논도 방이라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농사를 짓는 농사꾼들의 마음이 그 소리 안에 그대로 배어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마음을 가져야 삼배출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깃들어 있음을 일 수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먼저 남사당을 생각하는 김기복옹. 그는 오늘도 전수회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다.

기계로 짓는 농사말고 다랑이 논이 한 서마지기 정도가 있는데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직접 손 모를 심으면서 함께 소리를 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산 체험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신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길게 늘어서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모심기를 해보고 싶단다. 그것이 정녕 우리네 생활에서 배어 나오는 멋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마음이 아니면 남사당놀이를 하기가 어렵단다.

남사당은 정말 어려운 기예를 갖고 있어요, 그만큼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서운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황망히 길을 나서는 김옹에게서는 진한 토장 내음이 난다. 그 쇠가락에 남사당의 장인 정신이 배어있다고 하면, 그의 소리에는 짙은 농사꾼의 애환이 서려있다. ‘여기도 한 방이니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그의 소리처럼, 진정한 꾼으로서의 노옹의 삶이 오늘도 바우덕이 묘 앞길을 따라 먼 길을 떠나던 옛 남사당패들의 행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200241일자 경기일보 / ·사진/ 하주성(민속연구가)

남사당은 1900년대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으로 흔히 유랑집단(流浪集團)의 한 류파로 본다. 남사당이란 소리와 술, 몸을 팔던 여자들의 집단인 사당패에 비교하여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연희자 십 수 명이 있는 유랑예인집단으로, 일정한 거소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다. 간혹 여자 1∼2명이 낀 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와서야 있었던 일이다.

 

남사당패들은 풍물․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 등 6가지 놀이로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서운면 청룡리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하였다. 안성남사당패가 유명해 진 것은 〈바우덕이〉라는 여자꼭두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성남사당패의 꼭두쇠인 바우덕이는 사내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미모와 옹골찬 소리가락, 줄타기 재주가 당내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당대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최고 스타였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예인 바우덕이

 

남사당 최고인 꼭두쇠 바우덕이(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암덕(岩德)이기 때문에 岩을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는 남사당패의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로 안성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풍물, 줄타기 등 온갖 남사당 기예를 익혔으며, 뛰어난 기량으로 세상에 나가 판놀음을 걸판지게 떨쳐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미색을 겸비한 총기로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앙받은 바우덕이는 꼭두쇠로 활동하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남사당패의 전성기를 이루어냈다. 남사당패의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동짐꾼 등 40~50여명으로 구성되어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놀이를 행하였다.

 

남사당패의 조직

 

꼭두쇠는 패거리에서 대내외적으로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서,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조직된 패거리는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일사불란하고 엄격하였다. 50명 안팎의 인원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그 충원방법으로 고아나 가출아 등을 받아들였고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부모의 승낙을 얻어 받아들이거나 유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곰뱅이쇠는 꼭두쇠를 보좌했는데, 곰뱅이란 남사당패 은어로 <허가>란 뜻으로 어느 마을에 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사전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 보았다. 뜬쇠는 각 연회분야의 선임자로서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놀이의 예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을 두게 되며,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뜬쇠들의 판별에 의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연회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1가지씩 기예를 익힌 뒤에 가열이 되는데 이들은 가열이 되기 전까지는 여장(女裝)을 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남사당패는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었는데,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는 없으며,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다음날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주는 노자와 이밖에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빌려주고 해우채를 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였다.

 

 

안성 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기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해 김복만 - 원육덕 - 이원보 - 김기복으로 이어졌고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면서 끈질긴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본래 남사당패의 풍물놀이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하여 진풀이, 무동, 벅구놀이, 채상놀이, 선소리 등의 몸재주와 묘기에 소리(산타령, 새타령, 모찌는 소리, 논매는 소리등)까지 곁들이니 훌륭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풍물이란 우리나라 특유의 민중 음악이며, 남사당패에 의하여 떠돌이 판굿 모임에 맞게 놀이판이 풍부하게 짜인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 풍물놀이는 남도 농악에 비해 무동의 수가 많고 5무동을 비롯한 3무동, 4무동, 단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지며 최고의 기량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7무동이 있어 뛰어난 기량을 떨치고는 했다. 현재 안성의 남사당은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단장/김기복)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사당의 연희종목

 

남사당 놀이판에는 놀이 전에 줄타기의 줄을 매고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막과 마당 한가운데에 버나․살판․덧뵈기 등을 연희할 멍석을 5∼6장 깐다. 여기서 벌어지는 <남사당놀이> 6종목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⑴ 풍물 : 첫 번째 놀이인 풍물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무동(새미)․채상(열두발 상모) 등을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를 더하였다. 인사굿부터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터․당산벌림․양상치기․허튼상치기․오방(五方)감기․오방풀기․무동놀림․네줄백이 등의 판굿을 놀고, 판굿이 끝난 다음에는 상쇠놀이․징놀이․북놀이․장구놀이․시나위․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을 한다.

 

 

⑵ 버나 : 버나는 쳇바퀴·대접․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를 말하는데, 단순히 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서로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있어 극성(劇性)이 짙었다. 돌리는 물체에 따라서 대접버나․칼버나․자새버나․쳇바퀴버나 등으로 분류된다.

 

 

⑶ 살판 : 오늘날의 덤블링을 연상케 하는 살판은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자반뒤지기․팔걸음․외팔걸음․외팔곤두․앉은뱅이․팔걸음․수세미트리․앉은뱅이․모말되기․숭어뜀 등의 순서로 논다. 살판쇠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잽이의 장단에 맞춰 정해진 차례대로 곤두질을 치는 것이다. 살판이란 말은 곤두박질을 할 때 불을 가득 담은 화로를 안고 재주를 넘다가 죽는 수도 있어 ‘살판이냐, 죽을판이냐’를 가늠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전한다.

 

 

⑷ 어름 : 어름이란 줄타기를 말하는데, 남사당패의 어름놀이는 초청에 의해 관가나 양반집에 불려 다닌 <광댓줄>과는 달리 일정한 보수 없이 서민을 상대로 순연했기 때문에 민중 취향으로 짜였다. 어름산이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줄 위에서 가창(歌唱)하고 잽이의 장단에 맞춰 진행되는 것으로 버나․살판의 경우와 같다.

 

 

⑸ 덧뵈기 : 덧뵈기는 다른 지역 탈놀음에 비해 의식성(儀式性)이나 행사성(行事性)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갈구와 흥취에 영합하였다.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4마당으로 짜여 있는데, 먼저 첫째마당에서 놀이판을 확보하고, 둘째마당에서 외세(外勢)를 잡고, 셋째마당에서는 내부 모순을 불식하고, 끝마당에서 외래문화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⑹ 덜미  :맨 마지막 순서이며, 한국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남사당패들은 <덜미>라 부르고 있다. 이는 <목덜미를 쥐고> <몽둥이를 쥐고> 놀린다는 장두인형(杖頭人形)을 뜻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지배층의 지배구조와 그 횡포에 대한 저항,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통해 외래종교의 비판, 서민들의 우직한 염원(念願) 등을 희화화(戱畵化)한 것으로 40여 개의 인형과 10여 개의 소도구에 의하여 각기 독립적으로 연관된 2마당 7거리를 놀았다. 2마당 7거리는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 짓고 하는 거리) 등인데, 채록 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지역에 구전되는 전설의 남사당패 꼭두쇠인 바우덕이의 노래 사설이다. 바우덕이의 이름은 박우덕, 또는 ‘김암덕(金岩德)’이라고 전해진다. 남사당패는 여사당패와 구별을 하기 위해 조직된 과거의 유랑집단의 한 유파이다. 굳이 ‘남사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남자들로 연희패가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남사당패의 근원지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 일대이다. 이곳에는 칠사당, 혹은 팔사당이라고 하여서, 예전 유랑집단인 남사당패들이 한 겨울을 나곤 했던 곳이다. 유랑집단은 봄서부터 가을까지는 전국을 순회하며 기예를 보여주는 대가로, 돈이나 곡물들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청룡사 인근으로 돌아와 기예를 연마하고는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남사당패 중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것은, 역시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있는 ‘개다리패’였다. 안성 남사당의 풍물패는 기(旗)에 옥관자를 붙이고 다녔다. 이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에 안성의 남사당패들이 참여를 하여 노역자들을 위로한데서, 대원군이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옥관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늘 풍물패의 위에 있었다.

 

피지도 못한 채 숨져간 바우덕이

 

당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의 처녀였다. 그 자태가 남자들을 녹일 만큼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가 노역장에 들어서면 당연히 뭇 사내들의 눈길이 바우덕이에게 꽂혔을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바우덕이가 이끄는 개다리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육덕패, 복만이패, 이원보패 등도 바우덕이와 비슷한 연대에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자태와 기예에 출중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바우덕이는 남다른 존재이다. 1987년인가 안성시(당시는 안성군)에서 의뢰를 받아 ‘안성남사당풍물놀이도보’라는 소책자를 쓰기위해, 안성에서 오랜 시간을 기거하면서 청룡사를 20여 회나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안타까운 것은 바우덕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였다. 다행히 바우덕이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가진 토민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을 작은 서책이지만 하나하나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꽃다운 나이에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바우덕이, 안성을 들릴 때마다 늘 마음 한편이 짠한 이유였다.

 

오랜만에 다시 안성을 찾다

 

한참이나 안성을 찾지 못했다. 9월 7일,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의 공연장이 있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를 찾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에 들렸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실내 공연장이 새로 자리를 틀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는 테마공원이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세계민속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공연장 앞으로 가보니 남사당패의 자랑인 칠무동 상이 서있고, 그 뒤편으로는 각 잽이들의 모습을 담은 동상들이 줄을 지어 있다. 그런데 공연장 입구에 서 있는 바우덕이 상을 보고 훔칫 놀랐다. 이 바우덕이의 상과 닮은 여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영란(여, 36세. 바우덕이 풍물단 상임단원), 바로 이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바우덕이의 환생, 하영란

 

하영란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0살에 안성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했다. 당시는 나이가 어려 당연히 무동을 맡았다. 하영란이 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서운면은 바로 남사당패들의 근거지가 있던 청룡사가 있는 곳이다. 그곳 서운초등학교에 다니던 하영란은 풍물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풍물패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그 풍물패를 따라 다닌 것이다. 그들을 놓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전날 끝까지 따라가 보아둔 풍물패들의 모이는 곳으로 달려가, 그날부터 남사당패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것이 벌서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바우덕이의 동상과 참 많이도 닮았다. 장고를 메고 마당에 나와 장고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당시의 바우덕이의 모습도 저랬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딸 둘을 둔 아이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마치 새털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30년 가까이 속 앓이를 하던 바우덕이에 대한 아픔이 조금은 가실 것만 같다.

 

풍물단 상임단원 하영란 대담

 

- 25년이란 오랜 시간 풍물단에 속해 있으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생업을 위해 출근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내가 이곳에 와서 나의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섭니다. 풍물을 하는 것은 나의 일상입니다.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것과 같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에, 25년 동안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공연을 할 때 관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가 이렇게 시립 풍물단이 된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공연을 하면서 팬들도 생겨났죠. 그분들이 늘 ‘다시 보러 오겠다’거나 혹은 ‘정말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 고맙다’라는 인사를 합니다. 어떤 분은 커다란 사진을 빼다가 직접 갖다 주시기도 하시고,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갖다 주기도 하십니다. 그런 교감이 활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처음에 아버님의 반대가 심하셨을 때, 몰래 배우면서 공연 등을 하느라 애를 먹은 일이 힘들었죠. 그리고 서울예술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매일 안성서부터 서울로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늘 차 시간에 쫓겨 다녔을 때인 듯합니다. 차를 놓치면 기차를 타고 평택까지 와서 다시 안성으로 오면 새벽에 집에 들어오고, 새벽 5시면 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학교를 가야 했으니까요.

 

- 아이 둘을 키우면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개는 아이가 둘이면 이곳을 떠납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란 생각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애를 낳고나서 몸무게가 15kg이나 쪘는데,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남들보다 2시간을 먼저 출근해 걷고 또 뛰고는 했죠. 나를 이기는 싸움을 한다는 생각으로요. 아마도 그런 열정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동안 해외공연도 많이 했을 텐데 기억할 만한 일은 없었는지?

일 년이면 3~4회 정도 해외공연을 하니까, 그동안 30~40회 정도 해외공연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8년에 헝가리 세계민속축제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를 해, 대상을 받고 월계관을 썼죠. 아마 그것이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영광스런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서운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전교생이 다 합니다. 도시처럼 잘하는 아이들을 뽑아서 할 수 없는 일이죠. 실내 연습장이 없어 무더위에 운동장에서 하는데, 이 남사당풍물 만은 꼭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한 번 사라지면 다시 되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올해 제가 풍물을 시작한지 25년이 되는 해라서 작은 공연이라도 무대에 올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둘째를 낳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죠. 그래서 착실히 준비를 해 30년이 되는 해 개인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데 너무 시간이 흘렀네요.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저희 남편(강규원, 46세. 건축 감리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공연을 보고 늘 서포터를 해주고는 합니다. 아마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가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항상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 고맙습니다. 30년 기념무대를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부끄럽지 않은 바우덕이의 후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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