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에 소재한 한국민속촌.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한국민속촌 한편에 절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가 않다. 사람들은 이 절을 찾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을 찾아 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금련사는 사계절에 다 아름답다. 하지만 가을에 만나는 금련사는, 그 정취부터 남다르다. 민속촌을 찾아갈 때마다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 금련사인 이유도, 알고 보면 가을을 가장 아름답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속촌의 왁자한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조용히 사색에 젖기 좋은 곳, 금련사는 바로 그런 곳이다.

 

 

널린 낙엽 밟는 소리가 행복한 곳

 

무봉산 금련사라는 일주문을 지나면 낙엽 길이 있다. 가을이 되면 이곳을 찾아 낙엽 밟는 재미를 느끼고는 한다. 그저 일부로 그리 펼쳐놓은 것은 아니지만, 발을 땔 때마다 바스락이는 소리가 즐겁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가 보면 천왕문을 만나게 된다.

 

금련사는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있는 절이다. 그 외에 우리의 토속신인 칠성과 산신을 함께 봉안해 놓았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있다는 부처의 이름으로, 부처를 믿고 염불하면 죽은 뒤에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된다고 전한다. 아미타불은 한국 불교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광범위하게 민중의 신앙심을 이끌어온 신앙의 대상이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장수를 관장하는 신이며, 산신은 산중의 수호신으로서 영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산신이 있다고 한다. 하기에 과거에는 마을마다 정월이나 음력 10월에 정성을 다해 산신제를 올리고는 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과거 마을 공동체 제의식의 하나이다.

 

대전 유성의 절을 옮겨와

 

금련사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외 7, 9포의 다포전각이다. 이 극락보전은 조선말기에 대전광역시 유성에 세워졌던 사찰의 법당을 이건한 것이다. 원래 화려한 금단청 (錦丹靑)이었으며 이건 후 외부만 개채(改彩)하고 내부는 원래의 단청을 그대로 두었다.

 

 

금련사 경내에는 일주문과 객사인 하마정,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 운판과 목어, 북이 달려 있는 자금광루,종각, 법문을 펴는 안심료, 칠성신 모셔진 칠성당, 아미타불이 모셔진 극락보전, 산신이 모셔진 산신각, 요사채인 염불당과 수광당 등의 건물과 돌장승, 부도, 삼층석탑, 석등, 돌당간, 돌수조, 연못 등이 있다.

 

깊은 가을 속으로

 

가을이 깊었다. 가을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저 한 자리에 있다는 것이 미안스러울 정도로 나돌기를 좋아한다. 춥지도 덮지도 않은 가을, 기거다가 아름다운 단풍까지 물들어 있다. ‘금상첨화란 바로 이런 계절을 일컫는 것이나 아닌지. 그래서 가을이 되면 가까운 곳이라도 찾아 나선다.

 

 

금련사. 참 크지는 않지만 가을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절이다. 그리고 산사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안아올 수가 있어서 더욱 좋다. 이 가을을 미처 느껴보지 못했다면, 한국민속촌의 금련사를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곳에 가을이 무르익어 있을 테니까.

한국민속촌의 남부지방 대가인 9호 집은, 한때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아마도 그런 사극에서 많이 보아왔단 집이기에, 이곳을 찾는 사람마다 이 집이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한창 인기가 좋은 성균관 스캔들은, 방송 내내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켰으니 말이다.

 

이 9호 집의 안채를 돌아보면, 참 ‘대가집이라고 하는 것이 별나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고택의 형태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예술을 좋아하는 고장에서 이건을 했으니, ‘그도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무식함에서 조금은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ㄷ자형의 구조물, 그러나 참 놀랍소

 

호남 대가집의 안채를 보면 참 놀랍다. 이 집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다. 아무리 좀 다른 대가집들의 집의 구조가 남다르다고 하지만, 이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서 이건한 제9호집은, 그런 집들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저 이 안채 하나만 갖고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안채를 바라보고 좌우측에 돌출이 되어있는 ㄷ 자형의 집은 좌우 대칭이 다르다. 좌측이 조금 짧게 돌출이 되어, 전체적인 집의 분위기를 색다르게 했다. 좌측은 돌출된 부분에 마루를 앞에 두고, 작은 방을 드렸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상당이 넓은 부엌을 두고 있다. 이 집 부엌의 크기로 보아, 지역의 대가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안방을 중앙에 둔 안채

 

부엌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식솔이 많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부엌의 옆으로는 안방을 두고, 그 옆에 대청을 둔 특이한 형태로 꾸며졌다. 즉 안채의 뒤편 - 자 부분의 중앙에 안방을 두고, 동편으로는 대청을, 서편으로는 부엌을 두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앞뒤로 툇마루를 놓았다.

 

 

 

 

이 호남의 대가집 안채의 아름다움은 바로 동편의 돌출된 날개부분이다. 대청과 연결이 된 이 부분에는 두 개의 작은 방을 드렸다. 툇마루로 안방서부터 ㄱ 자 형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이 날개부분 끝에는, 높임 누마루를 놓고 난간을 두른 정자를 하나 두었다. 정자와 같은 형태의 누마루를 깔아 멋을 더한 것이다.

 

방의 옆에는 반드시 마루를 깔고, 안채의 뒤편인 대청과 안방의 뒤에도 마루를 깔았다. 대개 집 뒤편은 소홀한 편인데 비해, 이 호남 대가집의 경우 뒤편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창호 등을 섬세하게 꾸몄기 때문이다. 이런 집의 치목 하나를 보아도 예사집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안채를 바라보고 우측으로는 광채가 -자로 자리를 하고 있다. 4칸인 광체는 안채 쪽의 두 칸은 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개방된 핫간 한 칸과 그 끝에 한 칸의 광을 드렸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는 집이다. 대문채 역시 대문 양편에 방을 드려, 식솔들이 다양하게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많은 탤런트들이 향내를 풍기고 갔을 이 호남의 대가집. 참 이 정도 집이라면 지금 당장 이 곳에서 살라고 해도 반가울 듯하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도 만나기 쉽지 않은 민속촌 안의 제9호집. 두고두고 분내가 풍겨날 듯한 집이다.


예전에는 ‘동동구루무’라는 것이 있었다. 여자들이 즐겨 쓰던 화장품이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동동’은 그 제품의 명칭일 테고, ‘구루무’란 크림을 말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이 동동구루무에 대한 그리움은, 아마 지금 70~80대 정도의 아르신이라면 한두 가지 재미난 일화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제는 내 나이도 60이 지났지만, 어릴 적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놓인 동동구루무를 본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구루무 통이 자취를 감추고, 당시 말로 꼬부랑글씨가 쓰인 화장품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동동구루무가 사라진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다.

2004, 9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영화 속에서나 나올만한 장면

동동구루무 한 통만 사면
온 동네가 곱던 어머니
지금은 잊혀진 추억의 이름
어머님의 동동구루무
바람이 문풍지에 울고가는 밤이면
내 언 손을 호호불면서
눈시을 적시며 서러웠던 어머니
아~ 동동구루무

김용임이라는 가수가 부르는 ‘추억의 동동구루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예전에는 이 동동구루무가 여성들에게는 꽤나 호사스런 품목이었던 것만 같다. 가끔은 퇴색한 영화 속에서 장에 나갔던 돌쇠녀석이, 세경을 받은 돈으로 동동구루무 한 통을 사오는 모습이 그려진다. 물론 그 동동구루무는 돌쇠가 연모하던 마을 양반집의 여종인 옥분이에게 건너갔을 테고.


인터넷검색으로 찾아낸 이미지

동동구루무 한 통을 받은 옥분이는 그동안 벌처럼 돌쇠만 보면 쏘아대던 말투가, 얼굴에는 가득 미소를 띠면서 고분고분해졌을 것이다. 이런 추억을 가진 동동구루무는 꽤 오랜 시간동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동동구무루란 명칭도 아마 화장품을 팔고 다니던 장사꾼의 모습 때문에 나온 이름인 듯하다.

등 뒤에 짊어진 북소리 ‘둥둥’

어릴 적에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동동구루무를 파는 장사를 본 적이 있다. 1950년대야 지금처럼 대형 슈퍼마켓 등 종합적인 물건을 파는 곳이 없었다. 그저 마을마다 몇 개씩 있는 ‘○○상회’ 혹은 ‘○○상점’이라는 간판을 단 구멍가게들이 다였으니까 말이다. 이때는 간장과 같은 찬거리며, 이것저것을 팔러 다니는 장사들이 연신 마을을 돌아칠 때다.



아마 당시에는 이 동동구루무만큼 인기가 있었던 상품도 그리 흔하지가 않았다. 등 뒤에는 대북을 메고, 손에는 작은 북이나 하모니카 등을 들고 다닌다. 북소리가 나면 여기저기 흩어져 놀고 있던 아이들이 쫒아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마을의 아낙네들이 몰려나오면, 용기에다가 듬뿍 큰 통에 든 구루무를 퍼 담아 주기도 했다. 벌써 그런 모습을 본 것이 50여년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이도 당시의 신풍속도였다는 생각이다.

어머니의 정이 그리운 동동구루무

한 겨울에 찬바람이라도 나가서 쏘이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당신이 아끼시던 동동구루무를 듬뿍 손에 발라 비벼주시고는 했다. 그 냄새가 그때는 왜 그리도 좋았는지 모른다. 아마 그 냄새는 당시 일을 하느라 땀에 절어버린 어머니의 냄새와 함께, 지금도 기억을 할 만한 나름의 포근한 어머니의 냄새를 만들어 냈던 것 같다.


요즈음 여인들은 동동구루무라고 하면 싸구려 화장품으로 생각을 하겠지만, 당시의 동동구루무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그 구루무 한 통에 수많은 사연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구루무 한 통으로 사랑을 얻기도 하고, 많은 눈물도 흘렸기 때문이다. 연일 영하로 떨어져 올라갈 줄 모르는 날이 계속돼서인가? 어머니의 동동구루무가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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