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3호인 신리너와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너와집이다. 이곳의 너와집은 강문봉, 김진호, 윤영원씨 등이 소유하던 집들이 있으나, 신리의 너와집은 '김진호 가옥'이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너와집이란 굵은 소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지붕을 얹고, 용마름 부분에는 굴참나무 껍질을 넓게 벗겨 올린 집이다. 너와집의 지붕 위에는 나무를 고정시키는 통나무를 가로 지르며, 돌들을 함께 올려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았다.

 

지붕은 산간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나무와 전나무를 길이 40~70cm, 80~110cm 정도로 자르고 넓이는 30cm, 두께는 3~5cm 정도로 나무결에 따라 잘라, 기와처럼 지붕 아래쪽부터 놓아 올라간다.

 

 

몇 채 남지 않은 너와집

 

1970년 대 초까지만 해도 너와집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개조되어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집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김진호의 너와집은 150여 년 전에 지어진 집으로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집 역시 지붕에 까치구멍을 뚫었다. 전체적으로는 ㅁ 자 형태로 집을 구성하였는데, 정면과 측면 모두 세 칸으로 꾸며졌다.

 

방의 부분만 흙담으로 두르고 나머지는 판자벽으로 둘렀다. 밖으로는 대문 곁 좌측에 나무판자로 담을 두른 변소를 두었다. 변소는 양편에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밑으로는 공간을 내어 놓았다

 

 

 

 

 

대문을 보고 우측으로는 판자벽 상단에 까치구멍을 내어 놓았다. 판자 한 장을 잘라내어 낸 까치구멍과 두 곳의 구멍이 나 있다. 우측으로 돌면 작은 문이 있고, 방문이 나 있다. 그리고 벽의 뒤편으로는 작은 창문이 나 있어 환기를 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집 뒤로 돌아가면 두 개의 방에 연결한 판자굴뚝이 서 있다.

 

대문 좌측으로 돌면 판자벽으로 막았는데, 안쪽은 외양간이다. 외양간 벽 아래쪽에는 작은 널판 문을 내어 놓았다. 방문은 작게 만들었는데, 앞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사면이 모두 막혀 있어 문을 통해서만 안으로 출입이 가능하다, 아마 이렇게 막혀진 네모난 공간 안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너와집이라는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네모난 공간 안에서 주거생활을 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면 왼쪽에 외양간, 오른쪽에 부엌을 놓았다. 대문을 들어서 안쪽 트인 공간 중심에 마루가 있는데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흙바닥인 봉당을 두고 왼쪽이 사랑방, 오른쪽 부엌과 접해 있는 방을 안방으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샛방과 도장방 등을 두었다. 외양간과 부엌 사이의 공간은 집안 일을 할 수 있도록 꾸몄으며, 한쪽에 불씨를 보관하던 시설(화터)이 있다.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고, 그 앞에 판자벽에도 문을 내어 열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청에서 부엌으로 나오는 벽에 구멍을 내어 놓았는데, 이 구멍으로 음식을 가까이 나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는 이곳에 등잔 등을 놓아 부엌과 안의 주거 공간에 함께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사용을 했을 수도 있다.

 

 

 

 

 

몇 채 남아있지 않은 너와집. 산간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단지 문화재로 지정을 해놓고 문을 잠가놓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안심을 하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너와집의 생활모습을 볼 수 있도록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재 서울 경기지역에 첫 눈이 내렸다. 첫 눈이라고 하지만 눈이 온 표시도 나지 않게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그쳐버렸다. 한 겨울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가급적이면 고택답사는 피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 덮힌 고택의 정취는 아름답지만, 곳곳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오리 고가를 찾아 간 날은 눈이 발목까지 빠지게 쌓여있는 날이었다.

 

제천시 한수면 소재지에서 597번 도로를 따라 한수면에 있는 덕주사를 찾아가기 전, 좌측으로 보면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 한송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문 옆에는 초가 한 채와 기와 한 채가 나란히 보인다. 이 초가가 충북 민속문화재 제5호인 한수 명오리 고가이다. 이 명오리 고가는 초가로 꾸며졌으며, 원래는 한수면 명오리 303번지 풍무골에 있었던 것을,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눈밭에 집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아

 

명오리 고가를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세 번째 찾아가는 집이지만,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다. 대문 안으로 보면 슬리퍼 등도 보이고, 패널을 여기저기 쌓아 놓은 것이 사람이 사는 집 같은데 항상 문이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다. 이곳도 눈이 꽤나 내렸는지 집 뒤편으로 돌아가니, 밭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 쌓여있고 담장의 초가위에도 눈이 쌓여있다. 할 수 없이 눈밭을 몇 바퀴를 돌면서, 집의 구석구석을 촬영하는 수밖에. 고가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문이 잠겨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명오리 고가는 튼 ㅁ 자형의 집이다. 대문을 사랑채로 삼아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에는 두 칸 방을 드렸고, 대문을 지나 남쪽으로는 방과 외양간, 방앗간, 광으로 배열하였다. ㄴ 자형의 이 대문채는 사랑과 대문채를 겸한 집이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민가의 형태를 갖고 있는 명오리 고가는 특별한 점은 없으나, 나름대로 중부지방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고가이다.

 

 

건넌방에 낸 까치구멍의 용도는?

 

명오리 고가의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대문채와 마주하고 있다. 삼단의 돌로 쌓은 기단위에 지은 안채는, 안방을 기준으로 하여 정남향을 하고 있다. 안방의 좌측으로는 부엌이 있고, 우측으로는 윗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는 한 칸 대청과 건넌방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부엌 앞에는 누군가 패널을 가득 쌓아 놓아, 밖에서는 부엌문을 확인할 수가 없다.

 

밖을 몇 바퀴를 돌았지만, 안방이 있는 곳은 가려서 보이지를 않는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안방의 뒤편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고가를 답사하면서 생긴 나름대로의 답사방법이다. 이제는 웬만한 집은 밖에서 한 바퀴만 돌아보아도 집안 구조를 알 수 있으니, 그도 다행이랄 수밖에.

 

 

안채는 평범한 민가의 꾸밈이다. 그런데 안채의 건넌방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넌방의 앞쪽에는 툇간으로 달아낸 한데 아궁이를 두었는데, 그 아궁이 우측에 까치구멍이 있다. 바람을 막으려고 종이로 발라 놓았지만, 이렇게 건넌방에 까치구멍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 까치구멍의 용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냥 작은 쪽문이라면 이 문을 통해 음식물 등을 들여보낼 수 있다고 하지만, 까치구멍이라니.

 

건넌방의 옆문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뒤로 돌아가니 대청의 뒤편에는 판자문이 있다. 옆과 뒷면을 보고나서야 이 까치구멍의 용도가 이해가 간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도 뒷벽에 문을 하나정도 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건넌방은 툇마루를 놓은 곳과, 대청에서 드나드는 곳 밖에 문이 없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작은 까치구멍을 한데 아궁이쪽에 하나 내어놓음으로써 환기를 원활하게 한 것이다. 작은 것 하나에서도 느낄 수 있는 지혜다.

 

 

판자굴뚝이 아름다운 집

 

명오리 고가는 굴뚝이 모두 판자굴뚝이다. 이 판자굴뚝이 이 초가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판자굴뚝은 네모난 판자로 길게 사각의 연기통을 만들고, 그 중간에는 역시 나무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맨 위에는 사방을 트이게 해, 위를 꺾은 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흡사 고깔을 쓴 것처럼 만들었는데, 모든 방의 뒤편에는 이 판자굴뚝이 서 있다. 이 판자굴뚝이 서 있어, 초가집이 더욱 여유 있게 보인다.

 

명오리 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집은 전체적으로 크지 않지만, 이용을 잘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조금 흐트러진 사각형으로 쌓은 담 안에 집을 놓았는데, 대문채에서 북쪽 담 끄트머리에 측간을 두었다. 그리고 안채 부엌 밖에는 또 다른 한데 아궁이를 놓았다. 이렇게 전체적인 조형을 생각한 것이 명오리 고가의 특징이다.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남다를 것도 없는 초가이지만, 그 안에 한껏 여유를 부린 집이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 산당로 393-42(화암리 222)에 소재한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1호인 ‘청양 임동일가옥’. 19세기 말 송암 임용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연못 조성 시 소나무를 심었는데, 소나무가 옆으로 누운 듯 자라서 ‘와송정(臥松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7월 14일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와송정.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로 조성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간채가 끼워져 있다.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문간채를 제외한 사랑채만을 답사하였다.

 

 

큰 정자 형태로 구성한 사랑채

 

임동일 가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 보이지 않도록 쏟아지는 장대비로 인해, 좁은 시골 길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다시 마을 안으로 한참을 가서야 만나게 된 임동일 가옥의 사랑채인 와송정.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동일 가옥의 고택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7칸 중 우측 2칸에 고택 앞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게 누마루를 올려놓았다. 사방이 훤히 트인 누마루는 그야말로 정자의 운치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누마루 위에 앉아있으면, 앞으로 펼쳐진 연못과 숲, 그리고 주변 경치까지 구경을 할 수 있다.

 

 

누마루 옆으로는 2칸의 사랑방을 들였고, 사랑방 옆에는 다시 1칸의 마루방을 들였는데, 이들 앞에는 반 칸씩의 툇마루가 달려있다. 사랑채 좌측면에 있는 하인들이 거처하던 방 좌단은 중도리와 종량사이에 45도 방향으로 ‘강다리’라고 부르는 독특한 부재를 걸쳐 결구하여 추녀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는 규모가 크고 전통 목조건축 양식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도록 조성해

 

사랑채인 와송정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물은 산에서 흐르는 물을 수로를 통해 연못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와송정’이라고 부른 것은 이 사랑채가 정자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와송정 마르에 앉아 앞을 내다본다.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덩이식물이 타고 오른다.

 

 

지금은 앞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지만, 예전 이 사랑채를 지을 때만 해도 앞에 산 경치가 일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집을 지은 역사는 길지 않으나 어느 곳 한 곳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인다. 이 집을 지은 주인의 섬세함이 그대로 배어있는 정자식 사랑채이다.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는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본다. 그야말로 시야가 트여져 정자에 앉은 느낌 그대로이다. 이 사랑채를 지은 송암 임용주는 아랫사람들까지도 생각한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바로 하인들이 사용하는 방 밖에 있는 반 칸의 툇마루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툇마루는 일자형의 마루바닥을 깔지만, 와송정의 하인 방 앞에 놓은 툇마루도 누마루로 깔았다.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임동일 가옥의 사랑체인 와송정. 기둥을 세운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올림 누마루를 내다볼 수 있도록 작은 문을 하나 내어놓았다. 아마 이 작은 문으로 바람이라도 받아들인 것일까? 닫혀져 있는 방문을 열 수가 없어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모처럼 찾아본 고택 답사였기에, 장대비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와송정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는데, 또 다시 장대비가 쏟아진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물레방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에 보인다. 당시 세검정에 구릉성 산지에서 떨어지는 낙차를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었음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물레방아하면, 20세기가 시작될 때 서울에서 태어나 25살 이라는 피지도 못한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요절한 불우한 작가 나도향이 먼저 떠오른다.

 

나도향의 물레방아는 방원의 아내가 신치규와 물레방아 깐에서 정분을 통하고, 결국은 남편인 방원에게 물레방아 깐에서 살해를 당한다는 줄거리이지만, 당시의 물레방아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레방아 마을이 있어

 

이러한 물레방아는 가물어 물이 모자라게 되면 방아를 찧을 수 없게 되자, 1920년대부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대신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아가 보급이 되면서, 자연 추억속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물의 힘을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다고 하여 찾아 나섰다. 일반적으로 물레방아 하면 물의 힘을 이용한 디딜방아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와는 달리 거대한 동력구조의 방아가 오로지 물만 갖고 돌렸다는 것이다.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에 있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36호 백운면 물레방아는 1850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 물레방아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어진 이 물레방아는 물을 막은 보가 61m에, 보에서 물레방아에 이르는 수로가 252m이다.

 

 

수로의 넓이가 2m나 되는 이 물레방아는 소나무로 제작이 되었으며, 지름이 310cm에 폭이 130cm나 되는 큰 물레방아다. 기존의 물레방아가 ‘ㅡ’자 형을 갖고 있는데 비해, 도정력을 높이기 위해 ‘ㄱ' 자 형으로 특수 제작된 47개의 날개를 갖고 있다. 더욱 이 운교리 물레방아 인근에는 11개 정도의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 물레방아 집단지였던 것 같다.

 

민속문화재로 지정

 

큰길가에 안내판 하나가 없어, 몇 번이나 길을 물어 찾아간 백운면 물레방아, 최근까지도 사용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말라버린 잡초만 무성하다. 물레방아의 문이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아의 형태가 지금껏 보아오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크기도 그렇거니와 물레방아 깐의 구조가 상당하다.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는 물레방아는 풍구와 도정기, 그리고 기계를 돌리기 위한 바퀴들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고, 낡은 피댓줄들이 이 물레방아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풍구 옆 기둥에는 1995년 3월 27일 진안군수가 발행한 양곡가공업 등록증이 붙어있고, 그 밑에는 정미소 주인이 적어 붙인 도정효율표가 있다. 효율표에는 백미 80kg 한 가마에 4kg을 현물로 받으며, 운반료는 별도로 받는다고 적어 놓았다. 이 물레방아는 얼마 전까지도 사용을 했다고 한다.

 

 

물레방아 한편에는 곡식을 쌓아두었던 곳인 듯 너른 공간이 있다. 그곳을 보면서 갑자기 나도향의 물레방아가 떠 오른다. 저런 곳에서 신치규와 방원의 처가 밀담을 나눈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물레방아의 밑은 물이 빠져 나가는 물길인데, 아직도 물의 고여 있다. 한때는 부의 상징이었던 물레방아. 이제는 먼지만 쌓여가고, 물이 마른 물길은 옛 영화가 그리운 듯 마른 잡초만 가득하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인 명재고택. 이 집은 한 마디로 우리나라 한옥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고택이다. 조선조 숙종 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상류 양반가의 표본이 되는 집으이다. 안채는 비튼 ㄷ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의 앞으로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튼 ㅁ자 형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잘 정리된 앞마당에서 풍기는 멋

명재고택을 찾아가면 우선 집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바르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집 앞에는 네모나게 조성한 연못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샘이 있다. 주변 정리가 잘 된 앞마당은 너른 공지가 마련되어 있어, 주차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사랑채 옆으로는 장독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색다른 운치를 더해준다. 아마도 곁에 있는 집에서 전통 장이라도 생산을 하는가 보다.



사랑채의 우측 계단 위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당 역시 장독들과 잘 어울린다. 사당은 사랑채 우측으로도 오를 수가 있지만, 안채에서도 일각문을 통해 오를 수 있도록 동선을 조성하였다. 아마 사당에 제라도 올릴 경우, 부녀자들이 손쉽게 사당을 오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 같다

열린 공간으로 조성한 명재고택의 사랑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열려 있다고 한다. 앞으로 펼쳐지는 마을을 향해 언제나 개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윤증 선생의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재고택의 주인인 윤증 선생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자인, 호는 명재 혹은 유봉이다. 김집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송시열, 윤휴, 이유태 등 당대의 명현들과 함께 교분을 쌓았다.



윤증 선생은 등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면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윤증 선생은 이러한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실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객을 해보아도 선생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 이런 일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윤증 선생은 마을사람들과 늘 함께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두 단의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정면 네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가운데 두 칸은 온돌을 놓고, 양편 두 칸은 마루방으로 조성하였다. 바라보면서 좌측은 높이 올린 누마루 방으로 조성하였는데, 사랑채 온돌방 앞에 놓인 툇마루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돌출을 시켰다. 우측의 마루는 시원하게 개방을 해놓았다.

옆을 판자문으로 마감을 한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놀랍다.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계단식으로 꾸민 건물에 툇마루를 통해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까지 이어진다. 사랑채를 보면서 좌측으로는 문간채로 이어지며,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누마루 방은 문을 들어 올려 완전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한옥의 미학을 대표한다는 명재고택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대청 양편에 고방을 둔 안채의 겸손함

고방이란 고택에서 잡다한 살림살이나 곡식 등, 다양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작은 방이다. 규모가 큰 집에서는 고방 대신 광이라 불리는 창고를 여러 곳에 배치하였으나, 규모가 작은 집에서는 안방과 부엌 가까이에 고방을 설치하고 채광과 환기가 잘 되도록 하였다. 명재고택의 색다른 점은 바로 이러한 고방을 대청 양편에 두었다는 것이다.

규모가 꽤 큰 집인데도 불구하고 명재고택에는 광채가 따로 없다. 이것은 윤증 선생이 허세를 부리기보다는, 주변에 민초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민초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채는 북쪽중앙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양편에 날개채를 달아냈다. 대청 양편 뒤쪽에는 양편에 고방을 두고, 대청의 서쪽에는 두 칸의 안방과 한 칸의 윗방을 두고 있다. 남쪽으로는 두 칸 넓은 부엌과 부엌 위에는 다락이 있다. 그리고 대청 동쪽으로는 건넌방과 윗방 남쪽으로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안채의 ㄷ자와 문간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 등의 배치가 품위 있게 나열이 되었다.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 앞면에는 나무를 위로 질러 시렁을 낸 것도 명재고택의 특징이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그래도 조심스러운 집안 여인네들의 동선을 생각해, 이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꾸민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휴일이 되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명재고택. 아마도 이 고택에서 느낄 수 있는 선생의 겸손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지. 선생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배어있는 명재고택을 쉽게 뒤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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