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길 4 (석수동 212 - 1)에 자리한 보물 제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시기가 당간에 적혀있어, 조성연대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당간에 지주명이 명기되어 있어

 

당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 해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이 때의 주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은 진행법사이며, 정좌는 의설법사이고, 상좌는 연숭법사이다. 사사는 둘인데 묘범법사와 칙영법사이다. 전내유내는 둘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은 둘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은 수남법사이다.」

 

 

이로 인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중초사에는 많은 무리의 승려들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작은 직분을 갖고 있는 승려만 보아도 10여명이 넘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통 밑에 주통과 군통이 있었는데, 중초사에 주통이 있었다는 것은 중초사가 작은 사찰이 아닌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에 절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정좌), 교육을 담당하는 교무(사사), 자금의 츨납 및 사무를 관장하는 재무(상좌) 등이 있었다는 것은 소임을 맡지 않은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중초사에서 승악(현재의 관악산을 뜻한은 것으로 보임)에서 8월 6일 돌을 취하여, 28일에 두 개의 돌을 두 무리가 나누어 중초사로 운반을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9월 1일에 중초사에 도착을 한 것으로 적고 있다.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불구

 

당간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하기에 절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이 당간은 당과 당간, 그리고 지주로 구분이 되어있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굳게 닫힌 문, 한 바퀴 돌아오니 활쫙 열려

 

2012년 3월 3일 안양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석수동 인근에 있다는 문화재들을 촬영한 욕심에서이다. 먼저 중초사터를 찾아 들었으나, 당간지주와 석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철문에는 굳게 잠을통이 걸려있다. 한참을 밖에서 애를 태우며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토요일이면 12시에 문을 걸고 담당자가 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근 30분 이상을 안양시청과 구청, 동사무소 등에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음’이란다. 어딜 가나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는 것에 가장 분통이 터진다. 더욱 요즈음은 주말과 휴일이면 문화재 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렇게 잠겨 있는 문화재를 볼 때마다 참 답답하다.

 

근처에 있다는 석수동 마애종을 먼저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있다. 걸음을 빨리해 쫒아가니 굳게 닫힌 철문이 열려있다. 아마도 그 안에 건물이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밖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중한 문화재를 만난 것이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섬세하지는 않아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중초사가 어떤 절이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주변 가까운 것에 마애종들을 볼 때 아마도 당시 중초사란 절은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중초사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만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대로 된 기록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 것이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41-5번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인 ‘농성(農城)’이 있다. 이 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마을의 북쪽 논 가운데 있는 성이다.

전체적인 성곽의 모습은 타원형으로, 둘레는 약 300m이고 높이는 4m 내외이다. 토축은 비교적 가파르게 조성을 하였으며 동쪽과 서쪽에 문터가 있다. 무너진 곳의 단면을 보면 붉은색의 고운 찰흙을 층층이 다져 쌓은 흔적이 있다.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쌓은 토성

이 성을 쌓은 이유는 분분하다.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전하고 있기도 하다. 일설에는 고려시대에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하기도 한다.

이 성은 평지에 만든 소규모의 토성으로, 이런 흙으로 쌓은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바로 옆에는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철에는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우물터가 어느 곳인지는 밝혀지지 않고있다.



임팔급이 쌓았다고 전하는 농성

농성의 남쪽 문터를 바라보고 좌측에 동상이 한 기 서 있다. 바로 이 농성을 축성했다는 임팔급의 동상이다. 그 동상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한국 임씨의 시조이신 충절공 임팔급(林八及)은 신라의 이부상서에 오르셨을 때 적병이 변방을 침입하므로, 공이 분연히 토벌하여 위난을 공정한 공훈으로 팽성군에 봉해지고, 신덕왕조에서 충절공의 시호를 받았다.

충절공은 중국 당나라에서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병무시랑 예부상서로 있을 때,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칠학사와 함께 서기 850년 전에 우리나라 평택 팽성에 오시어 이 농성을 쌓고 정주하였다.(하략)」




익산임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임팔급은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지내고, 신라에 들어와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평택 용포리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그 후손들이 평택임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익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에 쌓은 성으로 추정

임씨종진회에서 농성 앞에 임팔급의 동상을 건립한 것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성이란 나라에서 어떠한 필요에 의해 쌓는 것으로, 일개인이 성을 쌓는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더욱 이 농성에서 발견된 토기편이 모두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1999년 경기도박물관이 평택일대의 관방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비파산성에서 ‘건덕3년’이라는 명문을 발견했다고 한다.




건덕3년이면 고려 광종 7년인 965년이다. 2004년에는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가 비파산성에서 ‘차성(車城)’이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들어 학계에서는 이 농성 역시 고려 때의 토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도 농성 부근에는 조선조의 객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농성부근은 예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곳은 고려 때의 곡창을 보호하는 성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농성(農城)’이라는 명칭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농성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충주와 제천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두 번째로 들린 빈신사지. 문화재란 볼 때마다 조금씩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은, 아마 그만큼 우리 문화재에 대해 나름대로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제천시 한수면의 빈신사지 석탑은,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사사자 석탑이 몇 기가 전하고 있는데, 제천 빈신사지 석탑은 시기적으로 보아 신라 때 석탑인 화엄사 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연대와 이유가 확실한 빈신사지 석탑

문화재는 대개 그 형태 등으로 보아 연대를 추정한다. 그만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이들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복장물 등이 모두 도난을 당하거나 도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덤에서 빈신사지 석탑은 조성 연대와 목적이 확실하다는데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단에 명문을 음각해 놓았기 때문이다.

명문에 적힌 것을 보면 빈신사지 석탑은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조성을 했으며,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으로 인해 적국인 거란족을 영원히 물리칠 수 있기를 염원해 세웠다고 적고 있다. 이 석탑은 명문을 보아 처음 조성했을 때는 9층 석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침돌 위에는 사각의 하대가 놓여있고, 상부에는 두터운 테를 둘렀다. 그 밑에는 각 면을 파서 3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꽃문양이 그려진 안상은 고려시대 석탑 등의 기단에서 보이는 수법이다.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는 10행 79자의 글이 명문으로 음각되어 있다.

아름다운 상층 기단은 뛰어난 작품

상층 기단의 중석은 이 빈신사지 석탑의 백미라고 보여진다.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갑석을 이고 있는데,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갈기를 세운 네 마리의 사자 중 앞쪽에 있는 좌우 두 마리의 사자는,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돌려 사선으로 밖을 보고 있다 뒤편의 두 마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안에는 비로자나불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로 알려져 있다. 왜 거란을 물리치기 위한 서원을 담은 탑에 비로자나불을 조각한 것일까? 아마도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온 세상에 미치듯, 북방정벌을 위한 고려의 염원이 그렇게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옥개석의 밑면 중앙에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다. 이 연꽃은 가운데 연밥을 두고 주변에 꽃잎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현재는 위로 5층의 몸돌과 4층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의 탑만으로도 고려 시대 석탑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



오늘 나라의 평안을 빈신사지에서 빌고싶다

네 마리의 돌사자는 그 모습이 다르게 조성이 되었다. 정면 좌우에 있는 두 마리의 사자는 입을 벌리고 금방이라도 무엇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뒤편에 있는 두 마리는 입을 다문 형태이다. 이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갈기가 있어, 수사자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자는 힘차게 조성이 되었는데, 아마도 고려의 기상을 담은 듯하다.




고려 현종 때에 조성된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을 조성하면서 새겨 놓은 명문대로 거란을 영원히 물리치기를 빌었다. 그리고 왕이 장수할 것을 바랐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탑의 기능은 ‘호국탑’으로 세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는 빈신사지 석탑. 오늘 이 빈신사지 석탑이 더욱 마음 안에 다가오는 것은, 혼란한 이 시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4번지에는 사지가 전한다. 강원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사지를 ‘한계사지’라고 한다. 11월 14일 오후에 찾아간 한계사지.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미리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한계사지를 둘러보았다.

한계사에 대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이 절은, 조선시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계사가 있던 자리라고 본다. 1984년의 발굴 결과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금당터와 부속 건물터 등을 확인하였다.


강원도 인제군 한계령을 오르는 고갯길에서 만나는 한계사지. 그러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한계사

이 사지의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인 석탑과 석등, 석불 등의 재료와, 고려와 조선시대의 명문기와가 많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유추해 볼 때 한계사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한계사가 누구에 의해서 창건이 되었는지, 정확히 언제 적에 사찰이 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인제에서 원통을 지나 미시령과 한계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한계령 방향으로 길을 잡아 올라간다. 좌측 길 아래 장수대라는 정자가 보이는 도로 우측에 설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자리한다.



한계사가 서 있던 곳 뒤로는 기암괴석으로 된 봉우리들이 서 있어, 한계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절이었는지 가늠이 간다.(위)  한계사에서 발굴된 각종 석조물들과(가운데) 전각터(아래)  


어렵게 허락을 얻어 들어간 한계사지, 놀라워

관리사무소에서 한계사지 뒤편을 보면 기암괴석이 솟아있다. 앞으로도 마치 뾰족한 원뿔모양의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놓여있다. 한계사지로 오르는 길에는 굳게 철문이 막히고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덜려있다. 사전에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은지라, 철문을 열고 낙엽이 가득 쌓인 길을 걸어 오른다.

조금 올라가니 밑에서 보이던 기암괴석이 조금 더 자세하게 보인다. 오악(五嶽) 중 한 곳인 설악이 아니던가. 바라다만 보아도 그 장엄함에 눈을 땔 수가 없다. 폐가가 서 있는 뒤로 한계사지가 펼쳐진다. 한계사지 안에는 보물인 삼층석탑 두 기가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석탑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눈앞에는 많은 석물들이 철책 안에 자리한다. 각종 주추들이며 문 자귀틀, 그리고 석조로 조형한 짐승(사자인 듯하다)과 여러 조각으로 난 석물들이 즐비하다. 그 한편에는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고, 그 주변으로는 옛 전각 터들이 보인다.

석물로만 보아도 옛 한계사를 그려볼 수 있어

석물 중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보인다. 이것저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많은 석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아마도 이 석조물들로만 보아도 한계사라는 옛 절이 그리 조그마한 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에는 안상을 새긴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아마도 배례석인 듯하다. 그러나 위에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금당터 등은 석축이 남아있어 알 수 있지만, 여기저기 돌 축대 흔적으로 보아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석좌나 다양한 문양으로 새겨진 주춧돌만 보아도, 이 한계사가 여러 번에 걸쳐 중창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한계사가 언제 적에 누가 창건을 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석조물과 기와 등 명문으로 살펴볼 때,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조선조에 와서 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도 멈춘 인제 한계령 고갯길 한편에 남아있는 한계사지.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어, 더욱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나 말없는 석조물들은 그런 나그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세월만 보내고 있다. 기암괴석 위에 걸린 늦가을의 푸른 하늘과 함께.

화순군 남면 유마리 321번지, 모후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유마사. 유마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승보종찰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유마사에 대한 기록은 『동복읍지』와 『유마사향각변건상량문』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 무왕 28년인 627년에 중국 당나라의 고관이었던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하였다. 당시 유마운이 수행하기 위해 지은 암자가, 지금의 귀정암의 옛터로 뒤쪽에 아직도 유마운의 탑의 남아있다. 유마운의 딸 보안 역시 불법을 깊이 깨달았는데, 동복 이서면의 보산 뒤에 보안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유마사의 창건연도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보안이 놓았다는 다리 보안교

유마사는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안으로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 등산로로 만들어진 도로는 양편으로 숲이 우거져 있으며, 한편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8월 21일 찾아간 유마사. 입구서부터 길은 양편으로 갈라진다. 등산로로 이용하는 우측 길과, 일주문을 통과하는 좌측 길이 있다.

일주문이 보이는 좌측 길로 접어들었다. 누군가 바위 위에 돌탑을 쌓아놓았다. 저렇게 위태롭게 몇 날을 버티고 있었던 것일까? 돌탑이 허물어지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레 발길을 옮긴다. 계곡가에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0호 ‘보안교’라고 적혀있다.



명문이 적혀있는 자리

1400년 전에 놓았다는 보안교

당에서 건너왔다는 유마운. 높은 벼슬을 마다하고 왜 딸 보안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왔을까? 그리고 보안은 왜 멀지 않은 곳에 보안사를 창건한 것일까? 그런 것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해줄 사람은 없다. 다만 보안이 채로 달을 건져 올려 비구승을 공부시켰다는 제월천과, 보안이 치마폭에 싸 옮겨 놓았다는 ‘보안교(普安橋)’가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좌측 냇가에 걸려있을 뿐이다.

만일 이 보안교가 전설대로 보안이 놓은 다리라면, 이미 그 역사는 1400년이나 된다. 아마도 자연석으로 만든 다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석조다리일 것이다. 지금은 사용을 하지 않는 보안교. 양편을 철책으로 막아놓아 출입을 금지시켰다. 예전에는 이 다리를 건너 유마사로 출입을 했을 것이다.

다리는 계곡 동서양편을 걸쳐 연결하고 있다. 길이는 510cm 정도이고, 너비는 넓은 곳이 315cm, 좁은 곳은 200cm 정도이다. 화강암 일석으로 만들어진 보안교는 그 두께가 55cm 정도이다. 이 보안교의 역사에 대해서는 1919년 이전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난 이 보안교에 얽힌 전설대로 1400여년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단 한 장의 널다리로 꾸민 보안교

커다란 단 한 장의 석재로 놓은 보안교. 흔히 ‘널다리’라고 하는 이 보안교는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한 것이 아니고, 화강암으로 된 단 한 장의 석재를 계곡 양편에 걸쳐 놓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돌다리는 전통적인 돌다리와는 그 형태가 판이해, 그 조성 연대를 추정하기도 쉽지가 않다.

일설에는 유마사 기록인 1919년에 쓴 <동북군유마사봉향각창건상량문>에 나타나기 때문에, 1919년 이전에 놓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다고 하면, 오히려 전설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다.

돌다리에는 두 곳에 명문이 적혀있다. 계곡 아래쪽에는 ‘유마동천보안교’리고 적었으며, 계곡의 북쪽에는 ‘관세음보살 양연호’라고 엷게 음각을 하였다. 글씨의 크기나 그 새겨진 깊이 등으로 보아, 이 명문은 후대에 양연호라는 인물이 팠을 것으로 보인다.


이 보안교의 역사는 유마사를 살펴보면 전설에 기인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유마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보물 제1116호 유마사 해련부도의 조성시기가 고려 전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이전에 보안교를 건너 유마사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장의 석재로 놓여 진 유마사 보안교. 그 안에 얽힌 전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답사를 하다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다가 보면, 답사의 일정이 늦어지기도 하지, 그도 또한 답사의 묘미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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