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일제치하에서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재를 찬탈해간 숫자는, 아직도 어림잡아 계산을 할 뿐이다. 그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 그저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의 수보다 많을 것이라는 막역한 추측을 할 뿐이다. 2003년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과 열강이라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합쳐 20개국에 모두 75,226점이라는 것이다.

 

그 중 일본이 가져간 것은 34,157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조사를 할 수 있는 문화재의 숫자일 뿐, 실제로 고서화 등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문화재를 수탈해간 아픔의 흔적이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등록문화재’로 자리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일본의 우리문화재 찬탈의 흔적

 

등록문화재 제182호. ‘구 일본인농장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된 이 건물은, ‘발산리 금고’라는 명칭으로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이 되었었다. 그 후 <군산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182호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군산은 우리에게는 아픔이 많은 곳이다. 한수 이북과 경기, 호남, 강원도, 그리고 충청권의 많은 소중한 문화재들이, 이곳 군산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건너간 집결지이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런 일본의 잔재들을 모두 없애야한다고 주장들을 했지만, 그것도 우리 역사의 한 일면이라는 점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하였다. 아마도 이런 문화재 찬탈의 장소인 창고가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요즈음 사람들이 알게된다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창피한 과거의 흔적이야말로 우리가 반성을 하고, 다시는 그러한 아픈 역사를 갖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창피하다고 가리고 숨긴다면 그 아픔은 잊을 수가 있겠지만, 또 다시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는, 우리의 아픈 과거를 반성하는데 있어, 더 없이 좋은 교육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시마타니 귀중품 창고, 그 아픔을 보다.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소재한 발산초등학교. 그 우측 뒤편에는 수많은 석조문화재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일본으로 반출을 하기 위해 전라북도 인근에 있는 석조문화재들을 시마타니 농장으로 옮겨 와 보관을 한 것이다. 이 석조물들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학교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3층의 창고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이 바로 등록문화재인 시마타니 농장의 귀중품 창고이다. 이곳 금고에 보관한 귀중품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재들이었다. 일제시대 군산지역의 대표적인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1930년대에 지은 농장의 금고이다. 시마타니는 우리 문화재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한 장본인이다.

 

 

이 금고형 창고는 모두 3층으로 꾸며져 있다. 현재 1층은 반 정도가 땅 속에 묻혀있어, 반 지하로 꾸몄다. 3층의 콘크리트 건물에는 층마다 좌우편에 작은 창을 내었는데, 철장을 지르고 그 겉을 철문으로 꾸민 이중의 문이다. 이렇게 창고 하나를 금고형으로 지어 놓은 것은, 그 안에 시마타니가 수집한 우리 문화재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아픔이 있는 시마타니 금고

 

학교건물 쪽으로 난 이층에는 미국에서 수입을 했다는 철제 금고문이 달려있다. 아마 이 문을 통해 금고 안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이 철제문이 달려있는 곳은 이중으로 건물이 지어졌던 것 같다. 금고 문 위로 보면, 벽에 건물을 잇대어 지었던 흔적이 보인다. 그토록 단단하게 창고를 지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서화나 도자기 등 창고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이 금고에 보관을 하고, 부피가 큰 석조물들은 야외에 두었다니 도대체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쇠창살 안으로 1층 안을 들여다보니 꽤 넓은 공간이다. 그 한편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이층에 낸 금고의 문은 쇠사슬로 묶어놓아 안을 볼 수가 없음이 아쉽다.

 

그러나 건물 외벽으로 난 창을 보면, 안으로는 창살을 대고 밖으로는 철제문을 달아 이중으로 보안장치를 했다. 그만큼 우리 문화재를 수탈해가면서 보호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단하게 지어진 덕분에, 한국전쟁 때도 아픔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인민군들이 옥구지역의 우익인사들을 감금하는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문화재가 사라져간 곳. 그 주위를 돌면서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이런 당시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어, 다시 한 번 지난날을 반성하게 만든다. 더구나 이 건물이 학교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더 고맙다. 적어도 이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248-1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2층집이 있다. 현재 등록문화재 제19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집은, 한식 민가의 건축기술을 기반으로 한 2층 집이다. 근대에 지어진 농촌지역의 집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2층집으로, 당시의 농촌 건축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5월 3일 찾아간 진안군. 마령면 소재지를 지나 전주 방향으로 가다가 만난 강정리 길가에, 진안 전영표 가옥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고택답사를 연재하는 나로서는 이런 안내판이 보이면 그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집을 찾는데, 영 고택다운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마을 주민들에게 물러 겨우 집을 찾았다. 담장이 아니라면 그저 지나칠 듯한 집이다.


꽁꽁 닫힌 철문, 담 밖으로만 돌아

전영표 가옥은 일제강점기 지역의 민간인 목수에 의해 지어진 집으로, 당시 지방 목수들의 기능을 살펴 볼 수 있는 집이다. 당시에 이렇게 2층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원래는 기와지붕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이어 놓았다.

최근에 담장을 새로 조성한 듯한 이 집은, 전통 돌담에 철 대문을 달아놓아 보기에도 이상하다. 안을 마주하면 중앙 뒤쪽으로 이층으로 올린 안채가 서 있고, 우측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의 맞은편에는 헛간채가 서 있는데, 블록 담으로 꾸민 것으로 보아 나중에 다시 지은 듯하다.




이층은 유리창을 넓게 달아내

일제강점기에는 지역에도 2층집을 많이 지었다. 이런 유풍은 대도시나 지방의 작은 도시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다. 한식으로 짓기도 하고, 일본식의 건물도 상당수가 건축이 되었다. 이 집은 궁이나 사찰 등을 짓는 대목수가 지은 것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일반 목수들이 지은 집으로 당시 목수들의 기능을 살펴 볼 수 있는 집이다.

진안 전영표 가옥은 1924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집을 지은 건축주인 전영표는 집을 크게 지으면 안된다고 하였다고 하지만, 이집은 마을에서는 눈에 EL게 큰 집이다. 집 앞으로 가니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주민 한 분이, ‘문화재라고 하는데 담장만 새로 해서 멀쩡하지 볼 것이 없다’라고 하신다. 아마 그 분들이야 등록문화재라는 것이 얼마만한 가치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듯하다.



안채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부엌을 내고 옆으로 안방을 드렸다. 중앙의 두 칸은 앞에 툇마루를 놓았으며, 우측으로는 반 칸 정도의 누마루를 깔았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집안을 살펴 볼 수밖에.

이층은 세 칸으로 되었으며 좌측 한 칸은 담벼락을 구성하고, 우측의 두 칸은 커다란 유리창을 달아냈다. 아마도 이렇게 커다란 유리창문을 앞뒤로 달아낸 것은, 주변의 경치를 보기 위함이었는가도 모르겠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안에 있는지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평범한 2층 집은 당시의 유행이었을 듯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전영표 가옥. 당시 지역 목수들의 기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집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꾸밈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그 당시에 2층집들이 많이 지어졌고, 이런 시골의 소도시에서도 이런 집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당시에 유행하던 가옥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안으로 들어가 꼼꼼히 살펴볼 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 뒤편에 장독대가 있고, 사랑채의 앞으로는 작은 연못도 보인다. 건축주인 전영표는 당시 이런 집을 지을 정도의 재력가였던 것 같다. 정원에는 각종 꽃나무들이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다. 기와 대신 올린 슬레이트가 조금은 부담을 주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이란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청에서 지정을 하는 이 문화유산은 문화재청이 개화기인 1876년 무렵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조형된 건축물, 산업물, 예술품 등을 포괄한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등록문화재 제도」를 도입했다. 이 등록문화재는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와 광복 당시 등의 연관성을 지닌 것들 중,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을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하여 보존하자는데 있다.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중앙동 일대를 ‘소주가’라고 부른다. 중국인 거리라는 뜻이다. 이 중국인 거리는 사적 제288호인 전주 전동성당을 건축할 때, 중국에서 들어 온 100여명의 중국인 벽돌공들이 살게 되면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전주 다가동에 있는 중국인거리. 그러나 이제는 몇 집만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100년이 된 전통적 거리

전동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중국인 거리는, 이제는 몇 집 남지 않은 중국인들이 살아갈 뿐이다. 전동 성당은 서울 명동 성당의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보두네 신부가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공사를 마쳤다.

이 때 벽돌은 중국인 인부 100여명이 직접 구워서 사용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곳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상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신흥상회와 전주화교소학교 등 몇 집이 남아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던 중국인 거리는 이제 그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등록문화재 제174호, 포목점 건물

이 중국인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포목점이 있다. 4대 째 포목점을 열었다는 이 집은, 완산구 다가동 1가 28번지에 있는 왕국민의 소유이다. 등록문화재 제174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1920년대에 1층 건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전주 전동성당을 짓기 위해 이곳으로 정착한 벽돌공들에 의해서 지어졌으며, 중국 상하이의 전통 비단 상가 건물의 형태를 따랐다고 전한다.

옆에는 같은 형태로 지어진 중국화교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어, 당시 화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건물의 주인은 나란히 붙은 신흥상회를 운영하고 있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에는 이발소와 실사출력소가 자리를 하고 있다. 건물이 지어진지 90년이 지나 건물은 낡고 퇴락했으며,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샌다고 현재 이 건물에 세입자들은 이야기를 한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 4대째 중국인이 포목점을 이어가던 집이었으나,
현재는 이발소와 실사출력소가 세들어 있다.

지정만 해 놓으면 당상인가?

이 집이 등록문화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벽에 붙은 등록문화재를 알리는 작은 동판 하나이다. 주변 어디에도 이 문화재에 대해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지를 않는다. 명색이 등록문화재라고 지정을 했으면서도, 안내판 하나 없이 서 있는 건물.




중국 상하이에 있는 포목점의 건물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물이다. 건축양식이 우리와는 달라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이발소 앞 벽면에는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동판이 부착이 되어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창문을 모두 아치형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문은 쇠창살을 사용했으며, 건물 전면 상단에는 둥그런 원과 꽃그림을 새겨 넣었다. 붉은 색을 칠한 벽돌이 깨어진 틈으로 보니 안에도 붉은 색이다. 그러나 그 점질이 약해 보인다.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았지만 보수를 마음대로 할 수도 없어 불편하다고 한다. 4대를 포목점으로 운영을 한 이 등록문화재는 이제 건물의 외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건물이 소중한 역사적인 자료로 인정을 하여 지정을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보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우고, 비가 새고 헐어지는 부분은 보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지정만 해놓고 나 몰라라 하는 식의 보존방침은 차라리 지정을 안 함만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건물자체가 망가져가고 있다. 비가 오면 천정이 샌다고 한다. 보수신청을 했으나
이루어지지도 않는다고 푸념을 한다. 문화재 앞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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