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산110번지, 설성산성지로 올라가는 길목 좌측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된 선읍리 석불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죽곡 마을 앞 시냇가에 묻혀 있던 것을, 신흥사 주지가 현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보면, 보개석과 몸체, 그리고 발을 딛고 있는 연화대좌는 예전의 것인데, 머리는 새로 만들어 놓아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얇은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조각을 한 몸 부분엔 장신구 없이 법의와 손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법의의 굴곡을 보면, 그 부드러움이 돌이라는 것을 잊게 할 정도다. 또한 발밑을 받치고 있는 대좌의 연화문 등을 보아도, 뛰어난 조각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몸의 형태를 보면 여래입상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신읍리 석불입상은 왜 두상이 사라진 것일까?

 

네 개 부분으로 나눠진 입상?

 

이 석불입상은 대좌와 몸체, 두상과 보개의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조각을 한 후, 조성을 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몸과 머리 부분을 따로 떼지는 않는다. 거대한 석불도 아니고, 전체높이가 257cm 정도의 석불을 조성하면서, 머리를 떼어 조각을 한 후 신체에 올리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 석불입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발과 밑을 받치는 연화대는 넓적한 돌을 이용하였다. 발과 연화대를 조각하기 위해서는, 판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위에 몸은 한 장의 판석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대개 얼굴과 몸은 한 장의 판석으로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 석불입상의 사라진 머리 부분과 연결되는 목 부분을 보면, 둥글게 올라가다가 사라진 목 부분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석불입상을 조각하는데, 구태여 두 장의 판석에 조각을 해 붙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은 발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 그리고 몸과 보개석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 부분이 잘려나갔다고 보아야

 

몸에서 머리를 올린 목 부분을 보면, 삼도를 표시한 목 부분 아래가 파손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목이 훼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3년에 이 석불입상의 조각을 찾아 내 새롭게 조성을 할 때, 목 부분이 발견이 되지 않아 새로운 돌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목 부분이 따로 조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만일 목 부분을 따로 떼어 내 조각을 한 후 붙이고자 했다면, 땅 속에 묻혀있는 목의 한 부분이라도 발견이 되었을 것이다. 목 부분의 훼손이나 목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 석불입상의 머리 부분을 누군가 고의적으로 훼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닌 조각기법

 

이 석불입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들어낸 우견편단으로 양팔에 걸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돌에 생명을 불어 넣은 듯한 이런 조각기법이라면, 기술이 뛰어난 석공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두 손의 손가락 부분도 훼손이 되어 시멘트로 발라놓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석불입상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내려 복무를 감싸고 있으며, 왼팔을 들어 가슴에 대고 엄지와 장지를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볼 때, 이 석불의 수인은 전법륜인과 시무외여원인의 복합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전법륜인에서 손가락을 구부려 마주할 때, 엄지와 둘째 인지를 맞대면 법신불, 엄지와 중간 장지를 맞대면 보신불, 엄지와 무명지를 맞대면 화신불이라고 한다. 이 석불입상의 수인은 엄지와 장지를 맞댄 보신불로 보인다.

 

발가락을 돌출시킨 석불입상

 

이천 장호원읍 선읍리 석불입상의 발을 보면, 안성 석남사 마애불의 발과 동일하다. 그 조각 수법도 동일하게 표현을 하였다. 즉 아래는 연꽃대좌를 조각하고, 그 위에 법의가 발목까지 덮인 형태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목서부터 밖으로 돌출을 시켜, 열 개의 발가락을 조각한 수법도 동일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선읍리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 그것은 결코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훼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재에 무관심한 것 자체가, 문화재의 훼손에 일조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목을 잃은 선읍리 석불입상. 과연 그 목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새롭게 조성해 올려놓은 두상이, 조금은 불편한 듯하다. 좀 더 세심하게 조각을 해서 올릴 수는 없었을까?


영주시 가흥1동 264번지에는 보물 제221호인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앞으로는 서천이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바위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마애삼존상이다. 이 마애삼존상은 앞에서 보면 바위에 조각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삼존불이 새겨진 돌이 바위와는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주변으로는 크기 20㎝내외의 사각형 흠이 나있고, 삼존불상 앞으로도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마애삼존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삼존불 중앙에 본존불은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으며, 좌우에 협시불은 입상으로 조각을 하였다.



영주시 가흥동 마애삼존상과 참례를 하는 사람들

통일신라 초기의 우수한 석조물


삼존불 중 중앙에 좌정한 본존불의 높이는 330cm 정도이다. 우협시보살은 198cm, 좌협시 보살은 약간 작은 195cm이다. 이 삼존불상은 두텁게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암반을 파들어가면서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본존불을 거대하게 조각을 하고, 양편에 협시불은 본존불 쪽으로 약간 기울 듯 조성을 하였다.


본존불은 소발로 육계가 뚜렷하다. 두터운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수인을 보면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이 마애삼존불에 새겨진 불상은 비교적 살이 올라 통통한 편이며, 둥근 얼굴의 상호가 지역적인 특징으로 보인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 역시 얼굴이 통통하다. 중앙의 본존불은 앙련을 새긴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며, 좌우 협시불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본존불의 뒤편에 있는 광배는 상단이 뾰죽한 보주형이다. 연화문을 둥그렇게 중앙을 에워쌓 듯 두르고 있고, 바같으로는 꽃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마무리는 돋을새김으로 둘러놓았다. 대좌는 연화대좌로 마련을 했으며, 무릎에 닿게 연화문 8엽을 앙련으로 새겨 넣었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도 본존불과 같은 돋을새김으로 처리를 하였다.


누군가 눈을 다 파내


좌측에 서있는 협시불은 왼팔을 어깨 위까지 들고 오른팔은 배 앞으로 대고 있다. 우측의 협시불은 두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는데, 보관에는 보병이 새겨져 있다. 양편 협시불의 팔목에 걸친 천의 자락이 두터운데도 불구하고, 옷주름 선 등이 유연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신체 등의 비례가 알맞은 것으로 보아, 조각술이 뛰어난 우수한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존불상은 영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조각작품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삼존불상을 보면 누군가 양쪽 눈을 모두 깊게 파버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조성이 되었을리는 없는 것이고 보면, 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본존불만이 아니고 양편의 협시불까지 그렇게 눈을 파낸 것이다. 그렇게 훼손한 얼굴이 흉하기만 하다.


천년 세월을 높은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앞으로 흐르는 내를 바라다보면서 서 있었을 가흥동 마애삼존상. 두텁게 돋을새김을 한 형태는 전국을 다니면서 보아도, 그리 흔한 모습이 아니다. 그만큼 당대의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흉하게 눈을 다 파놓은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리다. 숱하게 훼손이 된 문화재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은 시커멓게 썩어가고만 있다.



마애불 답사를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조각을 했을까? 마치 살아있는 그대로 바위벽에 붙인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아름다운 마애불을 보았다면, 누구나 그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423호 신계리마애여래좌상. 도선국사가 하루 밤 만에 조성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을 찾을 때부터 애를 먹었기 때문인가,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을 만났을 때의 감회는 더욱 깊었는가 보다. 도로변에 신계리 마애불이 3.0km에 있다는 이정표가 있다. 좁고 구불거리는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니, 그곳에서 2.2km 를 더 가야 마애불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임도’와 ‘오솔길’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산을 헤매다가 발견한 이정표 난감해

임도와 오솔길이라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주변을 한참이나 헤매다가 주민들에게 물으니, 마을 위로 산을 향해 계속 따라 올라가라는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니, 작은 이정표 하나가 보인다. 이곳에서 800m를 올라가면 주차장이 있고, 거기서 다시 0.45km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좁디좁은 도로를 구불거리고 올라가니 정말로 그 안에 차 몇 대가 설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여기까지가 임도이고, 거기서부터 오솔길을 따라 가라는 말이다. 그런 표현을 안내판 밑에 임도와 오솔길로 적어 놓았으니,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알 수 없는 표현이란 생각이다.



마을을 벗어나 임도와 오솔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신계리 마애불
 
오솔길을 따라가 만난 마애불

오솔길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간 듯하다. 물이라도 한 병 사들고 올라올 것을. 전날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로 먹은 술기운이 있어서인가, 목이 더 타는 듯하다. 답사를 할 때는 가급적이면 음주를 피하는 것도, 이렇게 애를 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넓은 길이 다시 나타난다. 계단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오르다가 보니, 돌로 쌓은 축대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보고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어찌 이 산속에 저런 바위가 있으며, 저렇게 조각을 할 수가 있을까? 아마 사람의 실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조각품 하나가 그 곳에 있었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전설로 남아있지만, 그 전설을 믿고 싶어진다.




역동적인 모습, 생동감이 있는 걸작품

한 마디로 걸작품이다. 어떻게 바위면을 이렇게 깎아내고, 그 안에 돋을새김을 하였을까? 사람이 했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을 들인 것일까?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커다란 바위의 한 면을 반듯하게 쪼아내고, 그 안을 둥글게 깎아내면서 여래좌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구슬로 꿰어 광배주위를 감싸고 있다. 광배 안에는 연꽃잎인 앙화를 조각하였다. 이런 조각기술은 보기가 힘들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쳐 흘러내렸는데, 비교적 단순하게 표현을 하였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살이 통통한 것이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넓은 어깨와 불룩한 가슴, 그리고 통통한 팔 등이 생동감이 있다. 입체감과 생동감이 살아있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위 뒷면 역시 칼로 잘라낸 듯하다. 양편을 깊게 잘라내 좁은 길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아마 축대를 쌓기 전에는 이 바위가 밑에까지 내려가, 그 윗면에 마애불이 조성된 것은 아니었을까?

힘들에 찾아온 마애불 앞에서, 안내판이 부실함을 투덜거리며 올라온 것이 괜히 부끄럽다. 이런 걸작품을 볼 수 있다면, 숨이 턱에 닿은들 어떠하리. 마애불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들녘이 시원하다. 11월 28일, 초겨울 바람 한 점이 이마에 맺힌 땀을 스친다.

오층석탑 한 기에 12지신상과 사천왕상, 인왕상, 팔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에 조각된 수많은 조각들은 모두 뛰어나다. 보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구례 화엄사 경내 보제루 앞에 서있는 화엄사 서오층석탑. 통일신라 때의 탑으로 1997년 여름에 탑을 보수 할 때, 부처님 진신사리 22점과 수저 2점, 칼 3점, 금동제방울 1점, 수정염주 1점. 소탑 3점, 금속편 31점등 총 16종 72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서 오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방형탑신을 올렸으며, 기단과 탑신부에 조각으로 장식이 가득하다. 서 오층석탑은 2층의 기단위에 5층의 몸돌을 올렸으며, 여러 장의 돌로 지대석을 놓고, 하대석과 중대석을 하나의 돌로 구성했다. 지대석의 각 면 안상 내에는 12지신상을 우수한 솜씨로 조각하였다. 이러한 조각기법은 화엄사 서 오층석탑이 보이는 특징이다.


몸돌에 돋을새김한 우수한 조각기법

기단석 위층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뜬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한 면에 두 명씩의 8부신중을 조각하였다. 팔부신중은 금방이라도 탑을 뛰쳐나올 만큼 역동적이다. 이 서 오층석탑의 탑신인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1층 몸돌의 4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 배치하였다. 탑신의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 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2층의 단이 있는 받침 위로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가 놓여 있다.


기단석에는 12지신사이 새겨져 있다.

이 서 오층석탑에 이렇게 많은 12지신 상이나 팔부중상, 그리고 사천왕상을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탑의 복원 시에 발견이 된 사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탑 안에 두었기 때문에, 그 사리를 지키기 위한 수호적 기능을 갖고 있는 사천왕상 등을 조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이 탑 안에 복장물은 하나도 도난을 당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발견이 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조성한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 등이다. 또한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고 있고,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에 보이는 기단석에 안상이 보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석탑의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이 배례석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미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 면에 두 명씩의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의 몸돌
 
한나절 만에 돌아본 화엄사

화엄사에는 국보와 보물들이 많다. 초가을로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한 낮의 날씨는 아직 따갑다. 구례에 볼일이 있어 길을 나섰다가(2010, 9, 16. 오후 3시 경) 화엄사를 들렸다. 그동안 수차례 다녀 온 화엄사다. 그러나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조금은 문화재에 대한 눈을 떴다고 할까? 지금까지 보아오던 문화재와는 또 다른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층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힘이 있어 보인다.
 
화엄사 중심영역에는 국보 제67호 각황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299호 대웅전, 국보 제12호 각황전 앞 석등, 보물 300호 사자탑 등이 있다. 그리고 보물 제132, 133호인 동, 서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각황전 뒤 계단으로 오르면 국보인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자리한 화엄사. 그 중에서 제일먼저 눈에 띤 것이 바로 서 오층석탑이다.

시간이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돌아본 화엄사. 서 오층석탑 하나만으로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듯하다. 그저 바람처럼 지나친 석탑이 못내 아쉬워지는데,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그렇게 야박할 수가 없다.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찾아가, 하루 종일 그 문화재들을 붙들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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