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한 겨울에 보면 정말 설악이란 말이 실감이 나는 산이다. 속초에서 3년 정도를 머무는 동안 참 수도 없이 발걸음을 했던 곳이지만, 내가 본 것은 그 광활한 설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설악산은 수많은 비경을 숨기고 있는 곳이다. 난 설악산을 보면서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새색시가 몸 전체를 장옷으로 감추고, 겨우 눈만 뭇 남성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곳같다고. 그만큼 설악산은 우리에게 많은 곳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래도 감출 곳은 다 감추고 있는 듯하다. 설악산에 8기가 있는 것도 그만큼 이곳은 감추고 있는 곳이 많다가 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명명한 것이나 아닐까?

 

 

설악산의 기이한 현상이라는 8(八奇)

 

설악산에는 팔기팔경이 있다. 여덟 가지의 기이함과, 여덟 가지의 절경이 있다는 소리이다. 그 중 팔기는 첫째 천후지동(天候地動)이라고 하여서 여름철이면 비가 많이 내려 뇌성벽력이 칠 때, 땅이 갈라지고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를 꼽았다. 두 번째는 기암동석(奇巖動石)으로 흔들바위와 같이 흔들리는 괴이한 돌이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백두구혈(百斗九穴)이라고 했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 외가평에서 백담사로 가는 길목의 백담계곡에 하식작용에 의한 구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전석동혈(轉石洞穴)로 외설악의 계조암은 대표적인 전석동혈이다. 바위와 바위가 서로 맞대 생긴 굴을 말한다. 다섯 번째는 수직절리(垂稙節理)로 암질과 구조의 차이에 의해 차별침식으로 생겨난 내설악의 하늘벽, 외설악의 천불동처럼 절리현상에 의해 생겨난 천태만상의 형상을 말한다.

 

 

여섯 번째는 유다탕폭(有多湯瀑)이다. 12선녀 탕과 같이 쏟아지는 물로 인해 바위가 패여 마치 탕처럼 생긴 것을 말한다. 일곱 번째는 금강유혈(金剛有穴)로 비로봉의 금강굴과 같이 큰 석산에 바위가 생긴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덟 번째는 동계설경(冬季雪景)으로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려 11월부터 이듬해 음 3월이 지나도록 백설이 만연한 것을 말한다.

 

주변조차 둘러보기 버거운 설악산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설악산 입구에 있는 신흥사를 지나 천천히 산길로 접어든다. 길옆에 선 이정표를 보니 비선대 2.5km, 금강굴 3.1km라고 적혀있다. 그저 흰고무신을 신고 나들이 겸 금강굴을 오르고 싶었을 뿐이다. 바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주변 경관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길이다.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숲길을 걷고 있다. 아마 이 너른 설악의 어디를 찾아가는 것이겠지? 설악에서는 궁금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그저 다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를 들어 궁금증을 갖는다면, 어디 한 곳 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숲속 냄새가 짙다.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돌들이 삐죽 고개를 내민 길을 걷는다.

 

그렇게 걷다보면 비선대를 만난다. 커다란 암반에 누군가 커다랗게 비선대라고 음각을 해놓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잡다한 글들이 보인다. 비선대를 지나면 길이 갈라진다. 오른편 산길로 들어서면 금강굴로 가는 길이고, 왼편 숲길로 들어가면 천불동을 지나게 된다. 금강굴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원효대사님이 이곳에서 정진을?

 

금강굴은 신라의 원효스님이 이곳에서 정진을 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왜 스님은 이곳 설악산 비로봉 아래 굴에서 정진을 하셨을까? 금강굴이라는 명칭도 원효스님의 금강삼매경 중 앞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금강굴은 외설악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수 있다는 곳이다.

 

길이 점점 가팔라진다. 이제는 뒷짐을 지고 여유를 부리기에는 버겁다. 새로 조성한 듯한 층계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위로만 치솟는다. 계단을 오르니 다시 암벽에 겨우 달라붙은 수직계단이 나온다. 비로봉 수직절리에 매달린 듯한 철계단. 그 위에 원효스님이 정진하셨다는 금강굴이 있다.

 

원효스님은 저 곳을 어찌 오르셨을까? 그 때는 이런 구조물도 없었을 텐데. 설마 날아오르지는 않았을 테고.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올 수도 없는 곳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철계단을 오른다.

 

금강굴에서 천불동을 바라보다

 

 

금강굴. 1300년 전 원효스님이 이곳에서 정진을 하셨다는 곳이다. 스님 한 분의 독경소리가 비로봉 벽을 타고 계곡으로 쏟아져 내린다. 그 계곡 밑에 바로 비선대가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에 천불동 솟은 바위들이 가득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던가?

 

죽 일렬로 선 것 같은 천개의 봉우리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천불동. 그 천불동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원효스님은 이곳을 어찌 아셨을까? 아무리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고 하지만, 이 자리에서니 모르는 것 투성이란 생각이다. 이곳에서 천불동을 백날만 바라보고 있어도 무엇인가를 깨달을 것만 같다.

 

 

이른 아침 원효스님의 체취를 만나기 위해 오른 금강굴. 굴 입구에 서서 이곳이 왜 설악 8기 중 한 곳인가를 깨닫는다. 아마 스님도 이곳에서 그런 깨우침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원효스님이 이곳에서 정진을 한 것도, 알고 보면 천불동에 서 계신 천분의 부처님 때문이었을 것을.

 

엊그제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서는 지역에 있는 웨딩홀의 한 층을 빌려 일일찻집 및 화합의 밤을 열었습니다. 말은 일일찻집이지만 사실 이곳에서는 음식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이어진 행사에는 천여 명의 손님들이 찾아와 음식을 먹었답니다. 준비한 재료는 거의 다 바닥이 났다고 하네요.

 

사실 지동은 매년 이곳 장소를 빌려 일일찻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찻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음식이 주입니다. 국수와 불고기, 오징어무침, , 생굴, 어묵, 떡과 과일 등 푸짐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불우이웃도 돕고

 

하지만 이 음식을 그냥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각각 가격이 붙어있죠. 사전에 미리 티켓을 팔아서 그 티켓으로 주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행사이니만큼 가격은 싸지 않습니다. 그래도 모두들 즐겁게 드시죠. 음식도 먹고 불우이웃도 도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 음식들은 지동의 통장협의회 통장님들이 하루 전날부터 준비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동에는 모두 34개 통이 있습니다. 전날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육수를 끓입니다. 그리고 그 육수에 국수를 말아줍니다. 통장님 중에는 40년 동안 중국집을 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어, 국수 밧도 일품입니다. 밤새 끓인 육수에 말아주는 국수 일품이죠.

 

 

 

 

사람들은 지동 일일찻집에 와서 음식을 먹으면, 딴 곳에서는 맛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지동은 통장님들이 주방을 접수하시고 그때그때 주문을 받아 전등을 부칩니다. 20여명의 통장님들은 행사가 다 끝날 때까지 주방에서 나오질 않죠. 남은 분들은 밖에서 용기에 음식을 담아 내 놓습니다. 이제 바로 지동이라는 곳이죠.

 

고백하겠습니다. 5일 저녁 저는 완전히 떡이 됐습니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TV의 광고는 사실이었다는 것이죠. 지동주민자치위원회의 아름다운 한 아줌마가 저를 떡이 되게 만들었다는. 아마 폭탄 무지 먹었으니까요. 그래서 뒤늦게 죄송해서 그 음식이나 올려드리렵니다. ‘맛집 지동스타일이었습니다.

 


전주에서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송광사를 찾아 가다가 보면, 26번 도로에 명덕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을 하여 명덕교를 지나면서 보면, 산에 굴을 파고 지은 듯 한 전각이 보인다. 그 밑으로는 인법당이 있는데,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 김제 금산사의 말사인 단암사라는 절이다.

 

700년 전에 세운 인법당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688번지에 해당하는 단암사.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어 주변 경관이 그럴 듯하다. 이 단암사는 고려 말에 서암이 창건을 하였다고 하니, 벌써 700년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단암사에도, 전북 지역의 모든 사찰을 중건하였다는 일옥 진묵스님이 주석했다고 한다.

 

단암사는 '다남사(多男寺)'라고 했었다는데, 언제 단암사로 고쳐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말 그대로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잘 낳았는가 보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법당 뒤, 새로 조성한 미륵전 뒤편 바위 굴 안에 미륵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미륵이라고 하지만, 그 형태는 미륵인가는 분명치가 않다.

 

미륵굴 안에 조성한 미륵입상. 7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색을 입혀 놓았다.

지금은 철재 계단을 조성해 놓앗다. 예전에는 이 계단이 가파라 줄을 잡고 오르내렸다.

 

지금은 굴 앞으로 새롭게 미륵전을 조성하고 뒤편을 유리로 막아놓았다. 적멸보궁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는데, 뒤편 바위 위에 조성한 미륵은 색을 입혀 놓았다. 지금은 미륵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조성했지만, 예전에는 가파른 바위계단을 줄을 잡고 올라 다닌 흔적이 보인다.

       

많은 전설이 전하는 미륵굴

 

이 단암사 뒤편 미륵전은 깊지 않은 굴처럼 조성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굴에는 전설이 전한다. 예전 이 굴에서는 절의 식구들이 먹을 만큼 쌀이 나왔다. 절에 사람이 많으면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양이 나오고, 식구가 줄면 그 숫자만큼 먹을 수 있도록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절에서 일을 하는 공양주가 욕심이, 나서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굴을 찔러댔더니 쌀이 안 나오고 피가 흘렀다는 것이다.

 

그 뒤 굴 속에서 나오던 쌀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이 단암사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말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버리는 것이었다. 왜병의 장수가 이상히 여겨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굴 안에는 서연이 가득하고 미륵불이 현신해 있었다는 것이다. 왜장과 병사들은 하루 동안 그 곳에서 정성을 드리고 나서야 말이 움직였다고 한다.

 

전설이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들을 많이 낳는다는 '다남사'라고 불렀던 점이나, 이곳에서 쌀이 나왔나는 전설 등은 모두 이 절이 영험한 도량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한창 불사를 하고 있는 단암사. 그런데 그 불사를 보는 순간,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미륵전은 굴 앞쪽에 새롭게 조성하였다. 흡사 인법당 지붕 위에 지은 듯하다.

 

새롭게 조성하는 불사로 인해 유명해질까?

 

지난 4월 30일, 송광사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절벽 안에 있는 미륵전을 보고 단암사로 발길을 돌렸다. 밖에서 볼 때는 한창 불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막상 절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기가 막힌다. 새롭게 조성하고 있는 전각은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니다. 커다란 트레일러 적재함 외벽을 방수목으로 둘러 목재집인 듯 보였던 것이다.

 

미륵전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주지스님인 대명스님이 나오신다. 일을 하는 목수들과 다를 바가 없다. 허리에는 연장 띠를 두르고, 허름한 옷을 입고 불사에 동참을 하고 계시다. 아니, 동참 정도가 아니라 직접 목수 일을 하신다. 트레일러 밑에는 커다란 바퀴들이 그냥 달려있는 대로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안과 밖을 목재로 마감을 하고 계시다.

 

"이 건물을 전시실로도 사용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모임도 가지려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나요?"

"어쩌다보니까. 하하. 이거 유명해질 것 같아요?"

 

목재로 조성하고 있는 전시실

가까이 가서보니 트레일러다. 바퀴도 그냥 달려있는데, 단암사의 새로운 전각으로 바뀌고 있다.

 

조성이 다 끝나면 어떻게 변해있을까?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트레일러 전각이니, 생긴 그대로 유명해질 것 같다. 큰 돈 안들이고 전시장과 방, 그리고 창고까지 해결이 되었다고 호탕하게 웃으시는 대명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이란 참 별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불사를 마치는 날은 필히 다시 한 번 찾아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린다. 아마 단암사는 전설과 함께, 색다른 모습으로도 유명해지지 않을까?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우두산 일대와 주암리 뒷산인 옥녀봉. 그리고 서원리 뒷산을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은 굴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상교리 뒷산인 우두산에 만도 어림잡아 40~50여개는 넘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굴은 자연적인 굴이 아니다. 모두가 일제에 의해서 파여진 인공적인 굴이다. 굴 중에는 군인들에 의해서 군 작전상 막아놓은 것들도 있다.


굴은 대개 땅을 아래로 파 들어가 그곳부터 옆으로 굴착한 것들이 있고, 처음부터 암벽을 평행으로 파 들어간 것 등 다양하다. 이 굴들은 주변에 바위를 뚫고 들어간 것인데, 깊은 것은 수 십 미터에 이르는 것들도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많은 굴들을 이곳 여주군 북내면 일대 산에 뚫어놓은 것일까?


금광채취를 위해 뚫어놓은 굴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즘골 뒤 우두산.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금광이 있었다 

다음지도에서 본 금광굴이 집단으로 있는 위치

옥녀봉 방향 뒷산은 눈이 많이 쌓여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할 수없이 북내면 상교리 ‘즘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즘골이란 예전에 가마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눈길은 아무래도 위험할 듯 해, 카메라를 소지하고 오르기를 포기했다. 우두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쌓여있는 낙엽과 녹지 않은 눈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엔 새들이 앉아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시끄럽다. 눈이 녹은 나무 밑에는 한겨울을 보낸 영지버섯 하나가 추위에 떨고 있다. 생명의 끈질김을 본다. 눈길에는 고라니를 비롯한 짐승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있다. 낮에도 사람의 발길에 놀란 고라니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으로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산 중에 축대를 쌓은 듯한 돌담들이 보인다. 잘 다듬어진 돌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 집이라도 있었는가 보다.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서 파 놓은 굴 옆에는, 지금도 알아볼 수 있는 축대가 있다. 금광을 채굴하던 사람들이 묵었던 막사를 지었던 곳이었나 보다.



산으로 오르다가 보면 집터인 듯한 곳이 보인다. 주추돌인 듯한 돌들과 축대가 있다.

한 때는 60호가 넘는 집들이 있던 곳


즘골의 뒤편에 있는 우두산은 ‘소머리산’이다. 이 즘골로 들어가는 곳에는 유난히 소를 키우는 목장이 많다. 현재 즘골에는 16호 정도의 집들이 있다. 하지만 금광을 한창 채굴 할 당시에는 60여 호나 되는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산에서 캔 광석을 잘게 부수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 와서 채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 우두산은 산세가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이 산은 명산이라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우두산은 가히 인재를 키워낼 만한 산이었기에, 인근에 ‘고달사지’가 자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우두산이 일제강점기에 무수히 파 놓은 굴로 인해, 그 명산의 혈이 모두 끊겨버렸단다. 그래서 즘골에는 인재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금광굴의 흔적. 이 사진들은 모두 핸드폰으로 촬영하였다.

가시지 않는 상처


산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본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무수히 많은 굴들이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금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도 한다. 산 중에 축대를 쌓고 관리를 하는 집까지 지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상당한 금이 묻혀있었던 것 같다. 산 위에도 여기저기 예전 집터가 보인다.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와 재화를 찬탈해간 일제. 그런 점도 마음이 아픈데 이런 흔적들이 전국에 수도 없이 널려있는 것을 보아야 하다니. 언제나 이 아픔이 그치려는지 모르겠다. 마을의 어르신들조차도 “죽어도 그 원수는 갚아야 혀. 너무 많이 고통을 받았어. 우리 민족들이” 라고 분노를 표한다. 산을 내려오는데 철모르는 딱따구리 한 마리가, 가지만 남은 오동나무가지를 쪼아댄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난 야생동물이 지나다닌 흔적과 영지버섯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