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에 소재한 성주사지. 딴 곳의 사지보다 석탑이 유별나게 많은 절터이다. 이곳에 보물로 지정된 금당터 앞 오층석탑 외에도, 금당터 뒤편으로 나란히 3기의 석탑이 서 있다. 이곳에서 조성된 탑이 아닌 딴 곳에서 옮겨온 이 탑들은, 동 삼층석탑, 중앙 삼층석탑, 그리고 서 삼층석탑이다.

 

보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은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을 말한다. 성주사는 처음에는 백제 때 세워졌다가 후에 낭혜화상에 의해 번창이 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탑 외에도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는 곳이다.

 

탑에 웬 구멍이 이렇게 많을까?

 

서 삼층석탑은 기존의 석탑과는 다르다. 물론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 위부분에는 1층 탑의 몸돌인 탑신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었다. 이는 통일신라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3층으로 조성한 탑신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인 싱륜부는 사라지고 남아 있지 않지만,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이 놓여 있다. 이 탑은 조형미가 뛰어나며, 상하 비율이 잘 맞아 균형미가 돋보인다.

 

 

그런데 이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에는 많은 구멍들이 보인다. 위층 기단의 옥개석과 삼층석탑의 머릿돌인 옥개석까지 작은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다. 사면으로 돌아가면서 옥개석에 뚫린 구멍은 양측으로 아래위로 3개씩을 뚫어놓았다. 옥개석 한 면에 12개씩의 구멍을 뚫은 셈이다.

 

금동판과 장식품으로 치장을 한 화려한 석탑

 

이 서 삼층석탑의 옥개석에 뚫어 놓은 작은 구멍들은 절에서 의식을 행할 때, 금동판이나 장식 등을 매달아 두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옥개석에 가득 달린 금동판이나 장식품들이 바람에 날려 소리를 내거나, 바람에 날리는 모습들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 화려함으로 친다면 세상 그 어느 탑이 이 탑을 따를 수가 있을 것인가?

 

 

이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은 높이 443cm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석탑과는 차이가 난다. 면석과 탑신석인 몸돌에는 중앙에 탱주와 양편에 우주를 새겼으며,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탑이다. 기단석과 몸돌의 비례, 층급받침이 4단으로 조성한 것, 옥개석 처마가 날렵하게 위로 솟아오른 점 등을 보면 전형적인 9세기의 신라석탑이다.

 

사리공을 도굴 당한 석탑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은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사리공 안에 있는 복장물이 모두 도굴을 당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 복장물들이 도굴을 당해 사라졌다.

 

문화재보호법이 솜방망이로 먼지 터는 격밖에는 되지 않는 대한민국. 문화재란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문화재를 훼손할 시에는 엄한 처벌로 다시는 이러한 폄훼 등이 없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혹은 그 것을 훔쳐다가 돈을 만들기 위한 이런 몰염치한 인간들은 단죄를 해야 한다.

 

성주사지 금당 터 후면에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서 삼층석탑. 1130일 눈이 내린 성주사지 인근에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 흔한 CCTV 한 대 눈에 띠는 것이 없었다.

응청각은 원래부터 청풍 한벽루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었던 전각이다. 지금도 제천청풍문화재단지 안 한벽루의 좌측에 예전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응청각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인조 15년인 1637년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응청각이 한벽루 옆의 있는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응청각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관수당이라는 당호가 붙어있다. 일반적으로 당이라고 하면 누정의 효과를 나타내는, 관아 안의 건물 등에 많이 붙이는 명칭이다. 물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수당(觀水堂)은 아마 당시에도 이 건물이 물가에 서 있었음을 알게 한다.

 

 

관수당의 당호가 주는 의미

 

관수당이라고 전각의 뒤편에 붙인 현판으로 보아, 이 건물은 관아의 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누정의 형태를 보면 누(樓), 정(亭), 대(臺), 당(堂), 제(齊), 헌(軒) 등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난다. 조선조 중기 이후에 들어서 이 이름이 모두 혼용이 되어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명칭에 따라 용도가 다 다르다.

 

우선 '누'란 밑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이층의 전각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정'이란 공간이 없이 단층으로 되어있는 경우이다. 간혹 주추를 높여 밑으로 공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이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거기에 비해 '대'란 관아에 속해있는 정자를 말할 때 흔히 사용한다. '제'는 향교나 서원 등의 기숙을 할 수 있는 집이며, '헌'은 원래 왕실의 가족들이 묵는 공간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외에도 '합(閤)'과 '각(閣)'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은 여러 사람이 집회를 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말한다. 흔히 '서당'이란 배우는 학동들이 모이는 곳을 의미한다. 이런 용도로 볼 때 '관수당'이란 물가에 서 있는 청풍현의 관아 중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묵을 수도 있는 정자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층을 벽으로 막은 응청각

 

응청각은 일반적인 전각과는 달리 아래층을 석축벽으로 막았다. 토석을 섞어 아래를 둘렀으며, 한편은 트여놓았다. 아마 그곳은 기물 등을 둘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층은 나무로 만든 목조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층의 둘레는 난간을 둘렀다. 응청각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조선조 명조 초에 이황(1501 ~ 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 기록으로 보면 응청각은 500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응청각. 이층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마루방이고, 문을 지나면 온돌로 놓여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기둥을 세우고 그 틈을 모두 돌과 황토를 섞어 발랐는데, 중간부분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구멍을 들여다보면 위로 비스듬히 뚫려있다. 아마 이곳이 방에 창불을 때는 곳은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전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지어진 응청각. 주변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의아한 곳이 많은 집이다. 그래서 이런 집을 돌아볼 때는,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어 즐겁지만.

 

절집을 가면 가끔 황당할 때가 있다. 이런저런 이유가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속인들 같지 않으신 스님들은 살아가는 방법이 우리하고는 다른 듯하다. 오늘 찾아간 금산사. 죽은 사람들의 천도제를 지내고 나서 제를 지낸 것들을 태우는 '소대' 옆에 불이문이 있다.

이 불이문을 나서면 다리를 건너 선원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런데 앞장 선 분들이 내가 소대를 찍고 있는 사이 문을 나서 사라지셨다. 불이문 앞으로 가 문을 열라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손잡이가 없다. 그리고 밀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 틈으로 보니 밖에 잠굼장치가 있는 듯하다. 아니 그런에 어떻게 여길 나가신 것일까? 도를 많이 닦아 그냥 통과를 하신 것일까?

불이문. 그런데 손잡이가 보이질 않는다.


스님 한 수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문은 밖에서 열고 닫게 되어있다. 선원에 계신 분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선원 쪽에서 문을 열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선원은 한참 먼 거리에 있어, 이곳까지 누가와서 문을 열어 불 수가 없다. 만일 선원을 나와 공양간에서 밥이라도 먹고 가려면 어떻게 문을 열까? 월담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런데 문에 무엇이 하나 달려있다. 흡사 표주박 같은 것이. 가까이 가서보니 위만 고정이 되어있다. 옆으로 밀어보니 밀린다. 구멍 안으로 보니 손을 넣을만 하다. 세상에 이 구멍으로 손을 넣어 빗장을 푸는 것이다. 간단한 장치 하나가 사람을 재미있게 만든다.

 


문 한편에 무엇이 달려있다. 가까이 보니 위쪽만 고정을 시킨 것이다.

이것을 밀어보니 수월하게 밀린다.

아래를 보니 빗장이 보인다. 아하~ 이렇게 문을 열고 닫았구나.

밖으로 나가보니 이 용도를 쉽게 알 수 있다. 간단한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재미있다. 어디다가 서 먹어야겠다.

"스님, 오늘 한 수 배우고 갑니다. 불이문에서. 오늘은 이 장치로 선문답 하나 품고 가렵니다. 아마도 닫아도 열고, 열어도 닫는 마음이나 아닌지 모르겟습니다. 세상에 마음 닫고 사는 저 윗전나리들. 이런 구멍 하나 가슴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열어볼 수 있게. 시장이 되겠다고 하시는 분들, 구청장이 돼야 한다고 고래고래 고함치시는 분들. 이렇게 구멍하나 만들어 가슴을 보이면 좋으련만. 괜한 기대는 하지 않으렵니다. "     

‘술비소리’라는 것이 있다. 술비소리는 ‘술비통’이라는 기구를 사용해 새끼줄을 꼬면서 하는 소리를 말한다. '술비통'이란 새끼줄을 굵게 꼬는 기구를 말하는데, 지역마다 이 기구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어느 곳에서는 나무를 X 자로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를 지른 후 줄을 넘기면서 꼬아 나가기도 한다, 또 어느 곳에서는 술비통이라 하여, 넓은 판자에 구멍을 세 개를 뚫은 후, 그곳에 새끼줄을 넣고 앞에서 돌리며 꼬기도 한다.

이렇게 줄을 꼴 때 ‘줄이 술술 비벼진다’고 해서 술비라고 한다는 것이다. 술비란 짚을 이용해 가는 새끼를 꼬는 것이 아니다. 이미 꼬아진 가는 새끼줄을 몇 가닥을 합하여, 굵게 꼬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다.

 


손쉽게 줄을 꼬는 술비통

에헤야 술비야
(에헤야 술비야)
술술술 술비야
(에헤야 술비야)
달이뜨네 달이뜨네
(에헤야 술비야)

술비소리를 하면서 흥겹게 춤을 추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작업요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흥겹게 숭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술비소리를 하면서 술비통을 돌리다가 보면, 줄은 어느새 저만치 길어진다.

 


 


 

술비통은 널판지를 받치고 그곳에 구멍을 세개를 뚫는다. 그리고 그 구멍에 새끼줄을 집어 넣는다.(위) 새끼줄을 꼬을 수 있도록 고리가 달린 물레를 만든다(중, 하) 이 물레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줄이 꼬아진다. 


술비는 새끼줄을 합해 굵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작업이다. 굵은 줄을 만드는데 손으로 꼬아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술비통이다. 굵은 줄을 꼴 때는 나무를 X자로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를 지른다. 그리고 줄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가로대에 홈을 파, 그 홈에 세 가닥의 줄을 넘겨 사람이 서로 엇갈려가며 고게 된다.

술비통을 사용해보니 줄 꼬기 너무 쉽다.

굵은 줄이 아닐 때는 술비통을 만들고, 그곳에 새끼줄을 세 가닥 집어넣을 수 있는 구멍을 뚫고, 그것을 합하기 위해 물레를 만들어 새끼를 꼬아 나간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대로 술비통과 물레를 만들어 새끼를 꼬아보았다. 얇은 새끼줄을 세 구멍으로 뽑아내고, 그것을 물레 끝에 달린 쇠말뚝에 묶어 돌려보았다.

 

술비통을 이용해 순식간에 꼬아 낸 줄. 힘들이지 않고 줄을 골 수 있는 선조들의 놀라운 지혜이다. 


세상에, 사람이 꼰다고 하면 그리도 어렵고 시간이 걸릴 것이, 단숨에 굵은 새끼줄로 변했다. 이렇게 간단한 도구 하나로 새끼를 쉽게 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할 수밖에. 어떻게 이런 작은 것 하나를 만들더라도, 이렇게 손쉽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연구를 한 것일까?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이 걸릴 것이 뻔한데.

직접 선조들이 생각해 낸 새끼를 굵게 꼬는 술비통. 집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보면, 선조들의 지혜를 알 수가 있다. 아마 아이들에게도 이런 체험을 하게 한다면, 더 많은 것을 느낄지 않을는지. 가족과 함께 할 수도 있고 아이들과 체험을 할 수도 있다니, 이것이야 말로 아이들에게 선조들의 지혜를 알려줄 수도 있어 일석이조란 생각이다.

놀라움으로 다가 온 선조들의 작은 지혜 하나. 그저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면서,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던 선조들. 우리에게는 정말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사적 제349호인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고려 전기의 문종 때 지어진 절인 만복사.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불우조(佛宇條)」에는, 만복사는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 이 만복사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오층석탑과 석불입상 등 보물이 경내에 있다. 잘 정돈된 사지 중앙 쪽에는 보물 제31호 만복사 석좌가 자리한다. 돌로 만든 이 좌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이다.


만복사 사지 내에 있는 보물 제31호 석좌와 만복사지 전경

하나의 돌로 조각한 거대한 작품
 
이 석좌는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고려시대의 석조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다.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중대는 낮고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더욱 넓어졌으며, 좌대의 윗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망은 불상을 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이 되어 아름다운 석좌의 미를 반감시키고 있다. 이 석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으로 조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안상의 안에는 꽃을 장식했으며, 이러한 조각의 형태로 보아 이 석좌는 11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투박한 돌에서 느끼는 따스한 온기

이 돌로만든 좌대 위에는 어떤 부처님을 올렸을까? 만복사지에는 두 곳의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5층과 2층으로 된 전각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면, 그 좌대도 어마어마한 크기였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현재 보물 제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좌는, 2층의 전각 안에 모셨던 부처님의 좌대가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본다.

더욱 5층으로 지어진 전각 안에 봉안된 불상은 그 높이가 10m 정도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석좌보다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좌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아름다움이 눈이 부시다. 고려시대의 석조물들이 조금은 투박하고 간결하게 처리를 하는 것에 비해, 이 석좌는 다양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마 통일신라의 유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상면에 낸 구멍

상부는 많이 파손이 되었는데, 그 남은 일부를 살펴보면 꽃을 조각한 듯하다.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 중앙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일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많이 손상이 되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술이 보인다. 석좌 곁에는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그 상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또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닐런지. 남원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그 중에서 이 석좌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찬 돌이지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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