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태영 시장,“감염증 확산 막으려면 질병관리본부 지침·접촉자 관리 기준 강화해야

20번째 확진환자, 한국인 여성(41)으로 15번째 확진환자의 친인척

 

염태영 수원시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막으려면 질병관리본부의 지침과 접촉자 관리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6일 시청 재난안전상황실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 추진상황보고회를 주재한 염태영 시장은 “20번 확진환자의 사례를 보면 확진환자와 밀접하게 접촉한 사람을 자가격리하는 것만으로는 감염증 확산을 막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접촉자를 별도의 장소에 격리해 관리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정 공간에 스스로 격리하는 자가격리는 다른 가족과 접촉할 수밖에 없어 완벽한 격리가 이뤄지기 힘들다접촉자를 더 세밀하게 관리해 추가 감염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염태영 시장은 또 증상 발현 이틀 전부터 확진 판정 시점까지만 확진환자의 동선을 공개하는 질본의 지침은 문제가 있다면서 증상은 개개인의 감각에 따라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어 증상 발현은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 우한에서 온 사람 중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는 귀국 시점부터 모든 동선을 공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20번째 확진환자는 한국인 여성(41)으로 15번째 확진환자의 친인척이다. 15번째 확진환자의 거주지인 장안구 천천동 다세대주택(다른 호수)에 거주한다.

 

 

지난 2, 15번째 확진환자가 확진판정을 받은 후 20번째 확진환자를 비롯해 같은 건물에 사는 가족·친인척은 밀접접촉자’(4일부터 접촉자로 일괄 구분)로 분류돼 검체 검사를 했고, ‘음성판정을 받은 바 있다.

 

음성 판정 이후 자가격리를 하던 중 4일 저녁 인후통 등 증상이 나타났다. 5일 오전 자가용을 타고 장안구보건소를 찾아 가족과 함께 다시 한번 검체를 채취했다.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의 2차 검사 결과, ‘양성으로 판명돼 현재 국군수도병원에서 격리치료를 하고 있다. 20번째 확진환자의 가족(2)음성판정을 받았다.

 

장안구보건소는 양성 판정이 나온 후 20번째 확진환자의 거주지 일원과 검체를 채취한 장안구보건소 선별진료소를 방역 소독했다.

 

수원시는 질본이 20번째 확진환자의 심층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대로 시민들에게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수원시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 현황은 염태영 수원시장 개인 SNS(페이스북)에 볼 수 있다. 염태영 시장은 감염증 대응 현황을 수시로 게시해 시민들에게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수원시 홈페이지(http://www.suwon.go.kr)와 수원시 SNS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관련 정보를 신속하게 공개하고, 대응 요령을 알리고 있다.

 

 

 

 

 

나무는 그 사용되는 용도에 따라 가치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런 용도와는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는 나무들이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는 나무들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나무들은 학술적으로도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보호를 받아야할 소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나무 한 그루가 360년 세월동안 한 곳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주변에 사람들이 벌써 10대 이상을 바뀌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말을 하지 못해 우리에게 지난 사람들에 대해 고변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꽤 많은 이야기꺼리를 갖고 있지나 않을까?.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49-2 웅지마을 뒤편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70호인 전곡리 물푸레나무의 이야기이다.

 

 

이 나무 임신한 것 아니오?

 

전국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나무들을 보았다. 물론 그 나무들은 모두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나무들이다. 그런데 11일 화성에서 만난 이 물푸레나무는 조금은 사람을 황당하게 만든다. 나무가 마치 임신을 한 듯하다. 굵은 줄기 중간에 속이 들여다보이는데 그곳에 줄기 같기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것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지만, 이런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6,25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동신제를 지낸 나무라고 한다.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으면 이 나무에 정성스럽게 기우제도 지냈다는 것이다.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수형이 아름답다. 나무의 높이는 20m 정도에 밑동의 둘레는 거의 5m 가까이 된다. 가지는 동으로 10m 정도, 서쪽으로 6.3m, 남으로 5m, 북으로 8.3m를 뻗어 동서로 16m, 남북으로 13.3m 정도를 뻗고 있다. 각종 농기구나 생활용품의 재료로 사용하던 물푸레나무, 여름철 입을 실하게 달고 있는 나무를 찬찬히 돌아본다.

 

잡풀 무성하고 관리도 하지 않는 듯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무껍질은 건위제나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여러 가지로 쓰임새가 많은 나무가 바로 물푸레나무이다.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보기만 해도 압도당한다. 우선 거대한 밑동의 둘레도 그렇지만 실하게 잎을 달고 있는 나무가, 상당히 생육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2년 전 이 나무를 만났을 때는 11월 말이라 나뭇잎을 달고 있지 않았다. 이런 나무를 마을에서 신성시 하는 것도, 이 나무를 잘못 대했다가 예전에 혼을 난 일이 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석연휴가 끝난 11일 찾아간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한 마디로 실망스럽다. 마을에서 신성시 했다는 것 외에도,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 주변은 잡풀이 무성해 안내판에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나무를 촬영하려고 주변을 돌아보아도 높다랗게 자라난 잡풀이 발목을 붙들고는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곡리 물푸레나무, 어째 이렇게 관리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항상 이유는 많다. 비가 많이 와서 풀을 미처 베지 못했는데 갑자기 풀이 자랐다. 추석연휴가 끝나면 정리를 하려고 했다. 언제나 판에 박은 이런 핑계들을 댄다. 하지만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이유를 다 이해를 하고 다닌다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360년이라는 긴 시간을 마을을 굽어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곡리 물푸레나무. 앞으로도 이 나무가 얼마를 더 이 마을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 나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을 때라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담당 관청에서는 소중한 천연기념물임을 깨닫고 주변 정리를 속히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 어이가 없다. 이 정도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만하다. 도대체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를 쓰레기통 취급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한 마디로 참담한 심정이다. 831,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았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귀부와 이수가 그동안 몸돌을 복원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신라 때 창건한 혜목산 고달사지 석조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저만큼 새로 몸돌을 치장한 원종대사 탑비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가려는데, 중간에 보이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된 석조 안에 무엇인가가 널려있다.

 

 

이 석조는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 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석조는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형문화재를 쓰레기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이 석조 안에 무엇인가를 담은 봉지와 종이박스, 음식을 조리하는 휴대용 열기구 등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누구인가 이곳에서 컵라면 등을 끓여먹고 그 쓰레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것이다. 라면박스 안에는 라면도 몇 개 들어있고, 휴대용 조리기구와 그 케이스도 있다.

 

담배꽁초도 보인다.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라면 등을 끓여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처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먹고 난 것들을 하필이면 유형문화재인 석조 안에다 놓은 것일까? 마침 일요일을 맞이하여 고달사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경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은 어이가 없다면서 혀를 찬다.

참 대책 없는 사람들이네요. 어떻게 문화재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먹고 난 것들을 이렇게 문화재 안에다가 버젓이 쌓아놓을 수가 있는 것인지. 이 현장에도 문화재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게 무슨 짓거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창피하네요. 고작 이정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다니.”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 안에다 모아놓은 쓰레기들과 조리기구.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관리자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문화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하기 짝이 없다.

 

봄철이 되면 문화유적이 한번쯤은 몸살을 앓는다. 그것은 바로 겨우내 얼었던 담장이나 지붕이, 봄이 되어 해동이 되면서 갈라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수원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많은 구조물부터, 많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는 곳이다. 하기에 봄철이 되면 각별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전국의 많은 문화재들이 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도 하고 기와 등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고택 등이나 많은 문화재 전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과연 우리 수원의 문화재들은 봄철에 제대로 관리는 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25일 화령전과 26일 서장대를 거쳐 성신사까지이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또 하나의 사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 훼파가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원래 화령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비롯하여, 일이 있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이안청과 풍화당, 그리고 제정과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래 건물 그대로 남아있던 운한각과 풍화당, 그리고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어정 뒤편 담장 흙 무너져 내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이다.

 

 

그런데 이 제정 뒤편의 흙담이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봄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화령전을 찾아오고 있다. ‘사적의 담장이 일부 흙이 떨어져 볼품이 없는데 저렇게 방치를 하네요. 담당부서가 없는 것인지 원.’. 관람객 한 사람이 혀를 찬다.

 

성신각 담장 틈이 벌어지고 지붕에 흙 흘러내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신사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26일 오후 서장대를 거쳐 계단을 통해 성신사로 내려왔다. 그런데 성신사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담장은 여기저기 금이 갔는데, 어느 곳은 보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이다. 거기다가 성신을 모신 전각 뒤편에 있는 제정은 물이 하나도 없다. 물론 가물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지저분한 우물의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볼썽사납다.

 

문제는 성신사의 지붕이다. 기와 위로 붉은 흙깉은 것이 잔득 흘러내렸다. 기와를 놓을 때 밑에 깔았던 흙이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흙이 말라 흘러내린다면, 기와가 미끄러져 내릴 수도 있다. 위험한 모습이다. 한 마디로 성신사의 복원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두 곳 다 속히 시급한 보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칫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20131월 첫 번째 답사는 강원도 최북단의 고성군 현내면으로 정했다. 이곳은 아름다운 화진포를 비롯하여 김일성별장과 전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 등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인근에 건봉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화재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둘째 날인 16일 오전에 찾아간 곳은, 바로 화진포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들 들이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일대에는 5기의 고인돌이 있다. 북방식 고인돌인 이 지석묘들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 규모가 크고 이 일대에서 많은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이 된 것으로 보아 대단위의 주민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의 선사유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모두 5기의 고인돌이 분포 해

 

화진포 일대에는 패총과 마제석기 등 유물이 주변 곳곳에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고대 집단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산재한 지석묘를 찾아보기 위해 화진포 콘도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만난 지석묘는 건물 출입문에서 30m거리에 있는, 이른바 '장평리 지석묘'라고 부르는 고인돌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긴 각진 타원형인데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2.5m×2,4m 정도이고 두께는 30~40cm 정도이다.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이 지석묘는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있고 북벽의 지석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 정도이다. 석실 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 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 지상에 노출되어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석실 바닥과 주변 지역에는 천석(자갈돌)들이 산재하였다.

 

이승만 별장 기념관 주변에 3기가 있어

 

화진포 앞에서 만난 안내판에는 모두 5기의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그 하나는 앞서 언급한 화진포 콘도 옆에 1. 그리고 이승만 별장 기념관 위편 도로 양편에 3, 그리고 마지막 1기는 화포리에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로 3기가 있는 이승만 별장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소를 확인하고도 정확하게 어디에 지석묘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이승만 별장 기념관 앞에 있는 매표소에 가서 고인돌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의외였다.

 

가끔 사람들이 고인돌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요. 그분들도 찾아보다가 없다고 하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

 

어디에도 이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 하나가 없다. 할 수 없이 주변을 뒤져보는 수밖에. 도로를 따라 위로 오르는데 커다란 돌이 보인다. 얼핏 보아도 고인돌의 윗돌이다. 차에서 내려 올라가 보았더니 두 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한 기는 길 건너편 비탈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대로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에 고인돌을 찾지 못했을까? 아마도 여름철이라면 풀이 자라 고인돌이 가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1월에는 다행히 풀이 마르고 쓰러져 있어 고인돌이 들어나 있는 것이다. 세 기의 고인돌은 모두 북방식의 고인돌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비지정문화재는 이렇게 관리해도 되나?

 

매표소를 지나 길 좌측 위에 있는 두 기를 돌아보고 건너편 비탈 위에 있는 고인돌로 향했다. 길 좌측에 있는 고인돌은 밑에 굄돌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에 비해 비탈 위에 고인돌은 그보다는 굄돌이 제대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소주병과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고인돌 사이에는 불을 놓은 흔적 같은 것도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가 이곳에 와서 술을 따라놓고 치성이라도 들인 것일까? 아니면 술을 먹으며 날이 추우니까 군불이라도 지핀 것일까? 고성군 지역은 유난히 선사유적인 지석묘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화진포 주변 다섯 기의 고인돌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인 고인돌이 이렇게 함부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부아가 치민다. 이제라도 이 옛것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일깨 울 수 있는 안내판을 설치하고, 조금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할 것만 같다. 첫 번 째 답사에서 만난 불쾌함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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