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풍습에 보면 정월에 많은 놀이가 전해지고 있다. 각 마을마다 전승되던 그 많은 놀이문화가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소멸 직전에 놓여있어 안타까움을 주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면 꽤 볼만한 놀이가 현장에서 연희되고 있다.

 

정월 초하루엔 차례를 지낸 후 세배를 하고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어른들을 뵙고 덕담을 듣는 재미와 함께 각종 놀이를 즐기곤 했다. 사실은 아주 어릴 적에야 덕담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 보다는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주는 세뱃돈이 탐이 나 세배 후 내어주는 떡국도 마다하고 한집이라도 더 다니려고 바람난 수캐처럼 온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한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놀이문화보다는 세뱃돈을 들고 먼저 피시(PC)방으로 달려간다고 하니 참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다. 우리 전승민속 중 80%는 정월에 몰려있다. 이것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 년 동안 모든 일이 잘 되기를 염원하는 기원적(祈願的) 사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동의 놀이인 줄다리기

 

초하루를 분주하게 보낸 뒤 이튿날은 귀신날이라고 하여서 하루를 근신한다. 초사흘부터 시작되는 각종 민속놀이는 날이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 정월 보름을 기해 그 절정에 달한다. 지신밟기를 비롯해 정월 열나흘날이 되면 마을마다 동제(洞祭)를 지내고, 개인들은 물가를 찾아 일년의 안전을 위한 치성을 드리면서 방생을 한다. 그런가하면 액송(厄送)의 연을 날리기도 하고, 마을의 가장 큰 행사로 펼쳐지는 줄다리기를 하기도 한다.

 

줄다리기는 기원적 사고를 띠우고 있는 민속놀이로 마을마다 그 규모나 줄을 다리는 내적사상, 그리고 줄을 당긴 후에 갖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물론 풍농(豊農)이나 풍어(豊漁)에 대한 기원과, 일 년의 초복축사(招福逐邪)를 의미하는 뜻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줄을 당기고 나면 팔, 다리가 튼튼해져 각종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거나, 줄을 당기고 난 후 그 줄을 잘라다가 대문에 매달면 액을 쫓을 수 있다거나, 또 줄을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아 물을 마시면 위장병이 낳는다거나 하는 속설은 지역마다 다르다. 어느 지역에선 줄을 당긴 후 그 줄을 태워 비료로 쓰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줄다리기가 끝난 후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에 줄을 감아 마을에 드는 액을 막기도 한다.

 

이렇듯 다양하게 표출되는 줄다리기는 마을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 줄의 형태나 크기가 다르다. 그저 외줄로 당기는 곳이 있는가 하면 쌍줄이라는 암줄과 숫줄로 구분이 되기도 한다. 충남 당진 기지시줄다리기나 충북 음성 등에서는 줄의 크기도 대단하려니와 수천 명이 달라붙어 줄을 당겨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정월 초부터 꼬기 시작하는 줄

 

우리 경기도에서도 마을마다 줄을 당겼으며, 아직도 많은 마을에서 줄다리기가 전승되고 있어 전통을 지키려는 마을 주민들의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성남시 판교 너더리(널다리) 줄다리기는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전승돼 온 너더리 줄다리기는 정월 초부터 줄을 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가로대를 세우고 그 위로 줄을 걸어 선소리에 맞추어 소리를 받아가면서 신명나게 춤을 추며 줄을 꼬아 나간다.

 

평원 광야 넓은 들에 우로 중에서 절로 자란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육척 칠척 길고 긴 짚을 거꾸로 잡고 추리고 추려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고이고이 추린 후에 동아줄을 드려보세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동으로 열발 서로 열발 남으로 열발 북으로 열발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동서남북 길게길게 사오십발 드린 후에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흔히 동아줄 드리는 소리라고 하는 줄을 꼬는 소리는 먼저 지주대를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를 얹은 다음 짚을 걸어 여러 명이 서로 엇갈리면서 줄을 꼬아 나가면서 부르는 소리다. 선소리꾼이 북을 치면서 소리를 주면, 줄을 꼬는 사람들이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로 소리를 받는다.

 

작업을 하는 소리이니 작업의 피로를 잊기 위해 장단도 경쾌하고 소리도 활기차다. 줄다리기에 사용하는 짚단은 많은 양이 필요하고 줄을 꼬는데 만도 며칠씩이나 걸리는 작업이다. 자연히 작업의 피로를 잊기 위해서는 소리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왕이면 경쾌하고 빠른 장단이 필요해 생겨난 현장성이 강한 소리다.

 

우리 소리는 모두 작업환경이나 장소 등에 따라서 그 창출의 조건을 갖게 된다. 줄꼬는 소리 또한 장시간 작업을 하다 보니 피로를 잊기 위해 다분히 오락적인 요소를 갖게된다. 여러 명이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춤을 추어가며 줄을 꼬다보면 단순 작업에서 오는 지루함과 피로를 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업을 할 때 막걸리라도 한잔 들이키면 흥에 겨워 춤이 절로 나오게 된다. 처음에는 느린 장단으로 소리를 하다가 흥이 올라 막바지에 다다르면 잦은 장단을 몰아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방법으로 소리를 이끌어 간다. 소리를 메기는 선소리꾼이 얼마나 소리를 잘 주느냐에 따라서 작업의 성과가 달라지는 것이 우리 소리나 작업의 특징이다.

 

2002226(음력 정월 15) 오후 6시부터 성남시 판교동에서는 마을 주민 500여명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농, 가내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위한 줄다리기가 진행됐다.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너더리 줄다리기는 1984년 이후 중단되었던 것을 지난해부터 마을 주민들이 재현시켜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을의 한마당 축제로 승화시켰다. 마을에는 수령 600여년 된 회나무가 있는데 이 곳에서 먼저 동제를 지낸 후 줄을 당긴다.

 

 

마을 토박이인 정인철옹(73, 판교동 242)에 따르면 과거에는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주막거리인 이 곳에 남사당패들이 들어와 줄을 타고 한바탕 판굿을 했다면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 이야기로는 암줄과 숫줄이 각각 5060m나 되는 거대한 줄을 썼으며, 줄다리기를 한번 하고나면 마을에 양식이 고갈 되었을 정도로 대단한 마을의 축제였다고 한다.

 

오후 7시가 넘어서 선소리꾼인 방영기씨(45,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361)의 선소리에 맞추어 주민들이 소리를 받으면서 줄을 드리는 모습을 시연한 다음 줄 고사를 지내고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판교파출소앞 구 도로를 막고 횃불을 밝힌 채 벌어진 줄다리기는 500여 주민들의 함성과 마을 풍물단, 판교농협 주부농악대의 풍장이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3회를 반복해 여성 쪽인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들고 마을이 편안하다고 하는 속설을 지닌 너더리 줄다리기는 올해도 여성 쪽이 이겼다. 이는 여성이 다산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시간여에 걸친 너더리 줄다리기가 끝났다. 그 안에 녹아있는 우리 옛소리 한 도막의 의미는 남다르다. 잊혀져 가는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열정을 가져왔던 마을 주민들의 노력과는 달리 이제 판교 재개발로 인해 현장을 잃게 된 줄다리기와, 그 줄꼬는 소리를 다시 듣게 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마을이 개발되고 현대화되면서 우리네 소중한 마을 민속과 소리가 퇴색되어 가고 있음이 못내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사진 하주성(경기일보 2002311일 기사)

사람이 어느 한 분야에 푹 빠져 일생을 그 길로 가면서 앞뒤를 안돌아다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프로 근성을 갖고있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흔히 쟁이라는 표현을 한다. 쟁이는 장인(匠人)의 비속어다. 장인은 어느 분야에 우두머리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대를 살면서 명인(名人)이니 명장(明匠)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쩐지 쟁이가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김포 통진두레놀이 상쇠인 윤덕현옹(68, 김포시 통진면 옹정리)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옹정리에서 태어난 윤덕현옹은 어려서부터 곡창지대로 유명한 김포의 소리를 듣고 자랐다. 통진은 여주, 이천과 함께 질 좋은 진상미를 생산하는 곳이다. 너른 평야에서 농사를 주로 짓던 마을에서 태어나 자연히 많은 소리와 두레 풍장 속에서 성장기를 거친 운덕현옹은 군 제대를 하고 나서 바로 마을의 풍장패를 규합해 옹정농악대를 창단했다. 이미 그때부터 쟁이의 길로 들어선 윤덕현옹은 집안을 돌보는 일은 모두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당시 남사당의 마지막 잽이들로 구성된 남문영, 송순갑, 이돌천, 최승구 등이 함께 조직한 걸립패에 가담을 했다.

 

좋고도 또 좋구나 금실금실 잉어들아 오염의 감바위 어디다 두고/ 너만 홀로서 에루화 여기 왔느냐// 에헤 에헤이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방아가 좋소//

 

마을에서 듣고 자란 소리에 쇠가락까지 익힌 윤옹은 몸에 배인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마을을 떠나 전문 잽이들과 한판 어우러져 전국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1982. 1958년부터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와 정착을 한 것은 20여년이 훌쩍 넘어서였다.

 

 

걸립패에서는 소고를 치면서 버나를 돌렸다. 남사당패의 버나는 걸립패들의 기예 중에서도 고난이도를 자랑한다. 지금처럼 제작된 버나를 돌리는 것이 아니고 마을에 들어가 물을 한 대접 얻어 마신 대접을 그대로 담뱃대에 말아 올려 돌린다. 가히 그 재주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게 유랑을 하다가 집에 들어오니 그나마 고향에 있던 농사도 다 사라졌다.

 

집을 나서 유랑을 하는 동안 집안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큰아이는 21세 때 간경화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금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았다. 부인이 아들을 잃은 슬픔과 힘든 생활로 인해 중풍이 와서 현재도 수년째 거동을 못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한다.

 

부인은 어렵게 일어나 앉아 취재에 응하고 있는 윤덕현옹을 보다가 정확치도 않은 말로 참견을 한다. “집은 아예 거들떠도 안보고 미쳤었어요. 아이는 오늘 내일 하는데 그 때도 학교에 가서 아이들 농악을 가르치고 있었으니아직도 그 서러움이 마음에 앙금 져 있어서인가 남편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가 않다.

 

윤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오직 한 길로 달려 온 40년 넘는 세월이 참으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오랜 동안 집안일을 소홀히 해서 아내에게 미안해 할말이 없다고 한다. 옹정2리 마을회관 옆에 붙어있는 살림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윤옹은 그동안 자신의 발자취가 배인 사진이며 각종 물건들을 꺼내 놓는다. 한 짐은 될 것 같은 그 수많은 빛바랜 사진이며 상장 등이 한 인간이 한 분야에 온갖 정신을 쏟은 역사를 말해주고는 있지만 그로 인해 가족이 받은 대가가 너무 컸을 것 같다.

 

 

소리를 하라고 하면 어려운 것이 집사람이 저렇게 되고나서 기억이 많이 없어졌어요. 저 사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제가 항상 곁에 붙어있어야 하거든요. 걱정이 많다보니 예전에 그렇게 부르던 방아타령도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중추절에 적막하야 다자춘에 넋이로다

불탄 자리에 에루화 새 속잎 난다

에헤 에헤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니나노 방아가 좋소

좋고도 또 좋구나 모가지 길쑥 황새들아

논길밭길 어데다 두고 너만 홀로서 에루화 여기 걷느냐

에헤 에헤요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나니나 난실 나니로구나 니나노 방아가 좋소

 

통진에서는 모를 한 움큼씩 찌면서 하는 소리와 모내기, 김매기 소리가 있다. 너른 평야에서 농사를 주로 짓는 이곳에서는 자연 그 소리도 환경적인 특징을 갖는다. 논배미가 좁은 곳에서는 소리가 유장하고 길게 끌며 나타난다. 그러나 너른 평야에서는 작업을 몰아 하다가 보니 소리가 흥겹고 빠르게 나타난다. 통진의 김매기는 그래서 흥겨움을 더하고 있다. 타령으로 흥을 더해 농사를 짓는 피로를 잊어가면서 풍년을 구가하는 소리다. 김매기에도 신바람을 낸다. 소리는 자진방아로 넘어간다.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내 말을 들어보소/ 에헤널널 상사디여/ 한소리는 높이 받고 또한 소리는 가만히 살짝/ 에헤널널 상사디여/ 일심전력 상사하면 곁에 사람 보기 좋고/ 에헤널널 상사디여/ 먼데사람 듣기 좋아 엉덩춤이 절로 나네/ 에헤널널 상사디여/

 

그 소리가 좋아서 그 소리에 미쳐 장단을 익히다 보니 평생 업이 되었고, 그 업으로 인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혼자 감당하며 집안 식구들에게까지 대접을 못받고 있지만 윤덕현옹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본인이 그 일이 좋아 그 길로 한 평생을 살아왔기에 자신이 그동안 닦은 기량을 전해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1982년도에 마을로 돌아온 윤옹은 그동안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 및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개인상과 최우수상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김포군의 각 학교를 다니면서 3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통진의 두레풍장과 소리를 전수했다. 1990년도에는 자신이 창단한 옹정농악대를 통진두레놀이로 개명, 1995년 경기도민속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년 뒤인 1997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한 길로만 정진한 결과였다. 1998년에는 통진두레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 기능보유자로 인정이 되었다.

 

지금도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집사람이 저렇게 되고 부터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집사람 때문에 놀란 뒤에 기억이 점점 떨어지고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요

 

젊어서 유랑의 길로 집을 나서 제대로 간수를 못한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 곁을 한시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윤덕현옹이 다시 짐을 꾸린다. 서울 놀이마당에 가서 정초 두레놀이를 한바탕 펼쳐야 해서 다음 날 일찍 서울로 올라가야 한단다. 한평생을 두레의 쇠가락에 미쳐서 모든 것을 그 곳에 쏟은 대가가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윤옹이 있었기에 급격히 변해가는 통진의 고층 빌딩 사이로 한가닥 흥겨운 소리가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200234일자 경기일보 게재. ·사진/ 하주성(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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