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다는 질이 우선하는 그런 모임이 되길 원한다. 그리고 이 모임과 같은 타 단체의 모임들과도 배척하거나 배타적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런 마음이길 바란다. 앞으로 2 ~ 3년이 지난 다음에 평가를 받는다는 생각으로, 이 모임이 잘 발전되어 나가기를 바란다. 축하한다.”

 

고은시인이 26일 늦은 7시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소재한 경기문화재단 3층 강의실에서 열린, 경기민예총 문학위원회 발족식에서 축사를 하면서 한 당부의 말이다. 문학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를 받은 고은시인은 이 외에도 과거 민예총이 처음으로 발족 했을 때를 회상하면서, 개성이 강한 민예총이 정치적인 관변단체가 되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발족식에는 민예총 문학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추대를 받은 용환신 시인과 홍일선 시인도 자리를 함께 했으며, 이달호 전 수원화성박물관장, e수원뉴스의 주간인 김우영 시인 등도 함께 자리를 해 축하를 해주었다.

 

 

40여 명의 시인과 소설가 등 한 자리에

 

발족식에는 시인과 소설가 등 문학인들 40여 명이 자리를 함께 했으며, 이들은 경기도 각 지역에서 활동을 하는 시인과 소설가들이다. 문학위원회는 올 64일 용환신, 정수자 외 다수의 인원이 모여 1차로 경기민예총 문학위원회를 발족할 것을 논의했다. 이 모임에서는 고은 시인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모시고, 한 두 차례 모임을 더 갖고 발족식을 치룰 것 등을 논했다.

 

6222차 모임에서는 경기민예총 문학위원회로 명칭을 정하고 경기문학인 백서를 만드는 사업과 정관 등을 제정하는 일, 회원을 섭외하는 일들과 어떤 행사를 할 것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그 뒤 두 세 차례의 모임을 더 갖고, 이날 발족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들은 발족식에서 109일 비무장지대인 DMZ(demilitarized zone)을 탐방하기로 했다면서, 그곳을 다녀 온 후 1222일 시와 사진 등을 곁들인 전시회를 열고 그 기록들을 취합해 자료로 남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초대 위원장에 정수자 시인을 추대

 

정수자시인은 1984년 세종대왕숭모제전 전국시조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등단한 후,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수원문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해 11월 시집 탐하다가 최우수도서로 선정되었으며, 222일 계간시조잡지 시조시학이 주관한 제4회 한국시조대상에 홍성란 시인과 함께 공동수상을 하시도 했다.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된 정수자 시인은

올 한 해 가장 자주 만난 말은 잊지 않겠습니다.’ 였다. 목적어를 명시하지 않아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 문장은 문학이 오랜 소임임을 일깨운다.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을 더 기억하고 더 찾으며 그 편에서 더 뜨겁게 서왔던 문학의 준엄한 길을 돌아보게 한다.”면서

 

“‘홀로 또 같이라는 말처럼 우리 모두 홀로 깊고 높되, 같이 따듯하게 넓어지는 경기민예총 문학위원회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도 서로 부추기며 신명나는 판을 통해, 경기도의 생명과 평화의 자유를 더 새롭고 더 아름답게 열수 있도록 함께 나아가자고 취임사를 통해 밝혔다.

 

 

이 발족식에 참석을 한 시인 한 사람은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시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보듬고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깨닫는 문학위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은 선생님의 말씀처럼 양을 늘리는데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질을 높여 세상을 밝히는 붓을 든 문학인들이기를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네 풍습에 보면 정월에 많은 놀이가 전해지고 있다. 각 마을마다 전승되던 그 많은 놀이문화가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소멸 직전에 놓여있어 안타까움을 주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면 꽤 볼만한 놀이가 현장에서 연희되고 있다.

 

정월 초하루엔 차례를 지낸 후 세배를 하고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어른들을 뵙고 덕담을 듣는 재미와 함께 각종 놀이를 즐기곤 했다. 사실은 아주 어릴 적에야 덕담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 보다는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주는 세뱃돈이 탐이 나 세배 후 내어주는 떡국도 마다하고 한집이라도 더 다니려고 바람난 수캐처럼 온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한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놀이문화보다는 세뱃돈을 들고 먼저 피시(PC)방으로 달려간다고 하니 참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다. 우리 전승민속 중 80%는 정월에 몰려있다. 이것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 년 동안 모든 일이 잘 되기를 염원하는 기원적(祈願的) 사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동의 놀이인 줄다리기

 

초하루를 분주하게 보낸 뒤 이튿날은 귀신날이라고 하여서 하루를 근신한다. 초사흘부터 시작되는 각종 민속놀이는 날이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 정월 보름을 기해 그 절정에 달한다. 지신밟기를 비롯해 정월 열나흘날이 되면 마을마다 동제(洞祭)를 지내고, 개인들은 물가를 찾아 일년의 안전을 위한 치성을 드리면서 방생을 한다. 그런가하면 액송(厄送)의 연을 날리기도 하고, 마을의 가장 큰 행사로 펼쳐지는 줄다리기를 하기도 한다.

 

줄다리기는 기원적 사고를 띠우고 있는 민속놀이로 마을마다 그 규모나 줄을 다리는 내적사상, 그리고 줄을 당긴 후에 갖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물론 풍농(豊農)이나 풍어(豊漁)에 대한 기원과, 일 년의 초복축사(招福逐邪)를 의미하는 뜻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줄을 당기고 나면 팔, 다리가 튼튼해져 각종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거나, 줄을 당기고 난 후 그 줄을 잘라다가 대문에 매달면 액을 쫓을 수 있다거나, 또 줄을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아 물을 마시면 위장병이 낳는다거나 하는 속설은 지역마다 다르다. 어느 지역에선 줄을 당긴 후 그 줄을 태워 비료로 쓰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줄다리기가 끝난 후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에 줄을 감아 마을에 드는 액을 막기도 한다.

 

이렇듯 다양하게 표출되는 줄다리기는 마을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 줄의 형태나 크기가 다르다. 그저 외줄로 당기는 곳이 있는가 하면 쌍줄이라는 암줄과 숫줄로 구분이 되기도 한다. 충남 당진 기지시줄다리기나 충북 음성 등에서는 줄의 크기도 대단하려니와 수천 명이 달라붙어 줄을 당겨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정월 초부터 꼬기 시작하는 줄

 

우리 경기도에서도 마을마다 줄을 당겼으며, 아직도 많은 마을에서 줄다리기가 전승되고 있어 전통을 지키려는 마을 주민들의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성남시 판교 너더리(널다리) 줄다리기는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전승돼 온 너더리 줄다리기는 정월 초부터 줄을 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가로대를 세우고 그 위로 줄을 걸어 선소리에 맞추어 소리를 받아가면서 신명나게 춤을 추며 줄을 꼬아 나간다.

 

평원 광야 넓은 들에 우로 중에서 절로 자란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육척 칠척 길고 긴 짚을 거꾸로 잡고 추리고 추려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고이고이 추린 후에 동아줄을 드려보세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동으로 열발 서로 열발 남으로 열발 북으로 열발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동서남북 길게길게 사오십발 드린 후에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흔히 동아줄 드리는 소리라고 하는 줄을 꼬는 소리는 먼저 지주대를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를 얹은 다음 짚을 걸어 여러 명이 서로 엇갈리면서 줄을 꼬아 나가면서 부르는 소리다. 선소리꾼이 북을 치면서 소리를 주면, 줄을 꼬는 사람들이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로 소리를 받는다.

 

작업을 하는 소리이니 작업의 피로를 잊기 위해 장단도 경쾌하고 소리도 활기차다. 줄다리기에 사용하는 짚단은 많은 양이 필요하고 줄을 꼬는데 만도 며칠씩이나 걸리는 작업이다. 자연히 작업의 피로를 잊기 위해서는 소리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왕이면 경쾌하고 빠른 장단이 필요해 생겨난 현장성이 강한 소리다.

 

우리 소리는 모두 작업환경이나 장소 등에 따라서 그 창출의 조건을 갖게 된다. 줄꼬는 소리 또한 장시간 작업을 하다 보니 피로를 잊기 위해 다분히 오락적인 요소를 갖게된다. 여러 명이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춤을 추어가며 줄을 꼬다보면 단순 작업에서 오는 지루함과 피로를 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업을 할 때 막걸리라도 한잔 들이키면 흥에 겨워 춤이 절로 나오게 된다. 처음에는 느린 장단으로 소리를 하다가 흥이 올라 막바지에 다다르면 잦은 장단을 몰아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방법으로 소리를 이끌어 간다. 소리를 메기는 선소리꾼이 얼마나 소리를 잘 주느냐에 따라서 작업의 성과가 달라지는 것이 우리 소리나 작업의 특징이다.

 

2002226(음력 정월 15) 오후 6시부터 성남시 판교동에서는 마을 주민 500여명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농, 가내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위한 줄다리기가 진행됐다.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너더리 줄다리기는 1984년 이후 중단되었던 것을 지난해부터 마을 주민들이 재현시켜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을의 한마당 축제로 승화시켰다. 마을에는 수령 600여년 된 회나무가 있는데 이 곳에서 먼저 동제를 지낸 후 줄을 당긴다.

 

 

마을 토박이인 정인철옹(73, 판교동 242)에 따르면 과거에는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주막거리인 이 곳에 남사당패들이 들어와 줄을 타고 한바탕 판굿을 했다면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 이야기로는 암줄과 숫줄이 각각 5060m나 되는 거대한 줄을 썼으며, 줄다리기를 한번 하고나면 마을에 양식이 고갈 되었을 정도로 대단한 마을의 축제였다고 한다.

 

오후 7시가 넘어서 선소리꾼인 방영기씨(45,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361)의 선소리에 맞추어 주민들이 소리를 받으면서 줄을 드리는 모습을 시연한 다음 줄 고사를 지내고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판교파출소앞 구 도로를 막고 횃불을 밝힌 채 벌어진 줄다리기는 500여 주민들의 함성과 마을 풍물단, 판교농협 주부농악대의 풍장이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3회를 반복해 여성 쪽인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들고 마을이 편안하다고 하는 속설을 지닌 너더리 줄다리기는 올해도 여성 쪽이 이겼다. 이는 여성이 다산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시간여에 걸친 너더리 줄다리기가 끝났다. 그 안에 녹아있는 우리 옛소리 한 도막의 의미는 남다르다. 잊혀져 가는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열정을 가져왔던 마을 주민들의 노력과는 달리 이제 판교 재개발로 인해 현장을 잃게 된 줄다리기와, 그 줄꼬는 소리를 다시 듣게 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마을이 개발되고 현대화되면서 우리네 소중한 마을 민속과 소리가 퇴색되어 가고 있음이 못내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사진 하주성(경기일보 2002311일 기사)

방돌근, 그는 갔어도 장단, 피리소리 생생히 남아

 

경기도의 소리를 보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만큼 많은 풍류의 소리들이 있어 우리는 경기소리를 이야기할 때, 한 가지만을 들어서 이것이 경기도의 소리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경기도에서 경기인들에 의해 창출된 많은 소리들은 각기 그 특징이 있다. 경상도의 소리가 남성적이고 투박하며, 전라도의 소리가 여성적이고 섬세한 면이 있고 한을 표출한다고 한다.

 

경기도의 소리는 그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전라도의 소리처럼 구슬픈 한을 갖지는 않는다. 한을 표현할 때도 어찌 보면 한의 소리 같지 않은 가운데 진한 한을 표현한다. 하기에 사람들은 경기도의 소리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소리가 있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경기도당굿은 그 안에 많은 소리가 있다. 도당굿에서 나타나는 소리는 흔히 경기, 충청간의 판소리인 중고제(中高制)의 음률로 되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소리가 생긴 내력으로 본다면 중고제가 경기도의 굿 소리를 인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판소리의 창출이 무가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경기도에서 불리는 무가에 중고제의 원형이 경기도의 굿에 있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불러지는 소리가 바로 청배(請拜)’. 청배란 신격을 청해서 모셔온다는 뜻이다. 오니섭채라는 장단을 치면서 소리를 하는 화랭이들은, 바로 도당굿에서 춤과 소리, 음악을 담당하는 만능 예술인들이다.

 

 

굿에서 제일 먼저 부르는 소리 청배

 

도포를 입고 갓을 정갈하게 쓰고 장단을 치면서 하는 소리, 청배는 각 부분의 첫머리에 불려진다. 이는 가계로 전해지는 기, 예능을 전수받은 세습계열의 화랭이들은 강신이 되지 않으므로, 먼저 그 거리의 신격들을 청원 해 굿청에서 흠향을 하도록 소리로 모셔드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경기도당굿에서 청배는 매우 중요한 부분에 속하고, 그 소리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흔히 청배는 부정청배, 시루청배, 제석청배, 군웅청배 등이 불러지고 있다.

 

공심은 제례주요 남산이 본이로구나

집터를 골라 잡으시니 삼십상천 서른 지어내려

허궁천 비비천 삼하도리천 열시왕을 마련하고

청개 여자하고 지벽이 여축하여

산천에 올라 좌우를 살펴보니 일월성신이 되옵시고

중탁자 하위내려 산천초목이 되오실 때

복덕씨는 나무를 마련하시고 수인씨는 물을 마련하시고

화덕씨는 불을 마련하시고 신농씨는 농사법을 마련하실 때

높은 데는 밭을 풀고 깊은 데는 논을 풀어

구백곡식 씨를 던져 만인간 먹게 마련하실 적이로구나

 

살아생전 오직 도당굿의 전승과 보전에 애써 오신 많은 분들이 불러오던 부정청배의 한 대목이다. 그 화랭이들의 소리와 음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방돌근 선생은,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남자들이 수명이 짧은 것을 걱정한 할머니가 험한 이름을 지으면 명이 길어진다고 해서 이름을 돌근(乭根)’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경기시나위 남양제의 대가인 장유순 산생 밑에서 시나위를 익혔다. 장유순 선생의 가문은 화성시 남양면을 비롯한 인근에서 떨치던 세습무가였다.

 

장유순 선생은 아침마다 방돌근을 찾아와 당신이 갖고 있던 재주를 다 물려주었다고 한다. 큰 선생 밑에서 큰 제자가 나는 법이다. 장유순 선생에게 남양제 시나위를 물려받은 방돌근은 도대방의 가문인 오산을 근거지로 이루어진 이씨 세습무가의 마지막 화랭이라고 하는 이용우 산생에게서 그 어렵다고 하는 도당굿의 장단을 전수받았다. 당시는 꼭 장단을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함께 일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알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린 나이인 19세부터 이용우, 정팔봉, 오필선, 이덕만 선생 등 내로라하는 경기도 세습무가의 화랭이들 틈에서 함께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온 세월이 4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고 한다. 한 때는 전국을 유랑하기도 했다. 국극단을 쫓아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몸이 약해지기도 했고, 때론 힘든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피리와 장단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각 지역의 굿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시작하면서 수원으로 돌아와 다시 굿판에 섰다.

 

 

경기무속음악의 대가 방돌근 선생

 

방돌근 선생의 이야기를 쓰자고 하면 아마 석 달 열흘은 써야할 것 같다. 그만큼 이 세계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가슴은 한으로 멍이 든단다. 그 한이 소리가 되고, 그 한이 장단이 된다는 것이 선생님들의 말씀이셨다. ‘장단 잘 치고 피리 잘 부는 사람방돌근 선생을 칭하는 보편적인 용어이다. 그의 장단은 그 어렵다는 도당굿 장단을 손자락 안에서 화려하게 구사를 한다. 피리시나위를 듣다가 보면 가벼운 듯 무겁고, 무거운 듯 깊게 가라앉지를 않는다.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소리를 전수생들에게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익혀주던 생전의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인 따스함을 엿볼 수가 있었다. 장단을 알려줄 때도 선생들에게서 당신이 받은 것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정이 많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애 첫 발표회 앞두고 세상을 떠나

 

2001517. 생애 첫 발표회를 4일 앞두고 방돌근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방돌근 선생이 세상을 뜬 후 세인들은 이제 경기도의 음악은 끝났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세상을 뜨기 일 년 전부터 방돌근 선생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기량을 제자들에게 물려주었다. 날마다 집으로 불러들여 혼신을 다해 전수를 시키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갈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의 경기 시나위는 당시 제자인 김현주(, 피리. 당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부수석), 안재숙(, 해금. 당시 국악고등학교 교사), 김현숙(, 대금. 당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 김흥수(, 피리. 옛소리 국악원장)에게로 전해졌다.

/ 하주성

경기일보 · 경기문화재단 공동기획(20021229일자 경기일보)

골목 안이 갑자기 시끄럽다. 박수소리가 들리고, 노랫소리도 들린다. 지나는 사람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쳐준다. 골목 안을 기웃거려 본다. 어르신들이 길가 의자에 앉아 박수를 치고 계시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보니 가면을 쓴 남자가 작은 마차를 끌고 있다. 그 위에 ‘황금마차’라고 적혀 있다.

 

도대체 황금마차가 무엇이지? 궁금하다. 내용을 알아보아야 하는데 다들 바쁘다. 노래하기에 바쁘고, 음식 나르기에 바쁘고, 박수치기에 바쁘다. 그리고 보니 한가한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 이럴 때는 그저 그 안에 나도 섞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본다.

 

 

어르신들을 위한 찾아가는 황금마차

 

황금마차는 60세 이상 어르신들을 위한 예술서비스를 하는 마차이다. 9월 15일 오후 6시, 수원시 팔달구 지동 292-3 앞에는, 어르신들이 한두 분씩 모여든다. 그리고 가면을 쓴 남자가 몰고 들어오는 황금마차가 입장을 하였다. 이어서 3인조 노래동아리인 ‘주말 앤 브루스’가 신나게 노래를 불러댄다.

 

황금마차는 문화바우처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천원진, 장성진, 장영환 등의 작가가 참여하였고, 송주희와 임주현이 기획을 하였다. 수원시 팔달구에서 상대적으로 어르신들이 많은 지동과 행궁동 일대를 돌며, 모두 12회의 공연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황금마차에서 하는 일은 재미있다. 우선은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영화 상영을 한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곡한 노래로 공연을 한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삶과 마을의 이야기가, 그대로 노래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만도 재미있다. 그런데 맛있는 국수를 직접 만들어, 어르신들께 대접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것 봐, 지동으로 이사 와”

 

황금마차 프로젝트는 마차가 이동한 길, 맛있는 음식,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황금마차 회갑연의궤’를 제작한다는 것이다. 9월 15일에 그 첫 잔치를 시작한 것이다. 이 황금마차의 운영은 9월 1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월 4회씩 총 12회가 준비되어 있다.

 

 

차가 다니는 골목길이다. 그 한편에는 황금차가 서 있고, 노래동아리들이 자리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구경을 나온 어르신들이 작가들이 직접 제작한 나무의자에 앉아 구경을 하신다. 차들이 지나간다. 그런데 비키라고 누구하나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그저 서로 비켜가면서 조용히 차를 몰고 갈 뿐이다.

 

“할머니, 재미있으세요?”

“그럼 재미있지. 우리 지동은 이런 행사가 많아”

“또 무슨 행사에 가보셨어요?”

“골목에서 하는 행사가 많아. 옥상에서도 하고”

“좋으시겠어요?”

“그럼 좋다마다. 지동으로 이사 와, 좋아 우리 마을”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 지동이 살맛나는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은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마을 분들 모두가 지동을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송주희(여, 32세)는

 

“지동은 딴 곳보다 어르신들께서 많이 시십니다. 어르신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한 고민을 하다가 이런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죠. 황금마차는 직접 찾아가는 마차입니다. 어르신들이 부르면 바로 달려가야죠. 이젠 그동안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신 분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드릴까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

 

 

지동마을 골목길. 언제나 정이 넘쳐나는 곳이다. 화성과 함께 어우러진 지동에는 화성의 성돌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골목마다 넘쳐흐른다. 그래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오늘도 황금마차에서 즐거움을 만끽한 어르신들은,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사뭇 기대가 되신다고 한다.

‘아리수’의 ‘아리’는 아리랑을 말한다. 그리고 ‘수(樹)’는 나무이다. ‘아리랑나무’라는 뜻을 가진 아리수는, 아리랑을 뿌리삼아 한국음악을 꽃피우는 나무가 되겠다는 의지로 태동이 되었다. 아리수는 토속민요 발굴과 보급에 앞장섰던, 1984년 창립된 단체인 ‘민요연구회’의 맥을 이어 2005년에 창단이 되었다.

 

이들은 그동안 2007년도에 발행한 제1집 음반인 ‘아리랑 나무를 심다’와, 2010년 제2집 ‘아리랑 나무에 꽃피다’를 제작하여 많은 찬사를 받았다. 민요가 이 시대에 삶을 노래하고, 상생의 음악이기를 꿈꾸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여성민요그룹 ‘아리수’. 년간 약 80여회의 공연을 하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소리단체이다.

 

 

 

속요는 민초들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소리

 

우리가 흔히 ‘속요’라고 하는 소리는 자연적이고 순차적인 전승방법에 의해서 전해진다. 현장에서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소리이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르는 속요는 정형화되지 않은 소리를 말한다. 그런 소리를 정형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아리수’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속요는 작업의 현장이나 창자가 다르면, 그때마다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따라 하기가 힘들다. 그런 속요를 정형화시킨 민요는 누구나 같은 사설, 같은 음으로 부를 수 있어 전승이 수월하다.

 

 

 

지난 해부터 경기문화재단의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원 소재 화성박물관(관장 이달호)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던 아리수는 올해 2년차 상주단체로 지정이 되었다. 아리수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은, 이들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접목을 시도하며 늘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키는 아리수의 공연

 

아리수는 2005년에 창단하였다. 200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천차만별콘서트’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10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하고, 예비사회적 기업으로 지정이 되었다. 2011년에는 전문예술법인으로 지정을 받았으며, 2009~2012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수원화성박물관 상설공연 ‘국악꽃피다’ 기획, 주관하여 16회의 공연을 가졌다.

 

 

 

 

수원 화성 박물관 상설공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은 ‘국악 꽃피다’는 2009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국악 꽃피다는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해 수원 화성박물관과 (사)아리수가 기획 주관하는 상설공연이다. 아리수는 이 공연을 하면서 상주단체 아리수의 신규 프로그램 개발 및 공연프로그램의 다양화를 꾀하고 민요의 대중화에 기여함은 물론, 공연장의 활성화와 관객개발. 수원화성박물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올 12월 21 ~ 23일에는 정조와 수원 화성을 배경으로 한 소리극 ‘팔달전’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2012년 한 해 여성민요그룹 아리수는 단독기획공연인 소리극 팔달전과 해설이 있는 민요 콘서트 ‘아리랑 톡톡’과, 아리수 콘서트 ‘가·무·악’을 선보인다.

 

 

 

또한 공동기획공연으로 무대에 올리는 ‘국악 꽃피다’와 ‘색소폰 성벽을 울리다’, 직장인 록 밴드 공연 등도 준비하고 있다. 2012년 여성민요그룹인 (사)아리수의 더 많은 공연을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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