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아름답고 편안한 정자다. 어느 정자라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이 정자만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강릉시 운정동 경포호 서쪽에 자리잡은 해운정. 보물 제18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흔치 않은 가치를 지닌 정자다. 해운정을 처음 찾았을 때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보물임에도 불구하고 널려진 쓰레기와 수북한 담배꽁초, 그리고 부수어진 건물잔해.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만난 해운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 9월 해운정을 세 번째로 찾았을 때, 해운정은 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운정은 언제나 아름답다. 전국에 산재한 수 많은 정자들 중에 열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언제나 난 머리에 해운정을 둔다. 그만큼 아름다운 정자이기 때문이다. 해운정에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그래서 난 이 정자에는 늘 바람이 쉬어간다고 생각을 한다.

 

중종 25년인 1530년에 지어졌으니 벌써 지은 지가 480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 때의 고고함을 그대로 간직한 정자.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한 어촌 심언광이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해운정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해운정은 오른쪽 두 칸은 마루로 만들었다. 문은 모두 네 짝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하여 시원하게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왼쪽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중간을 장지문으로 막아 구분을 해 놓았다. 여름과 겨울을 모두 이곳에서 지내겠다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해운정은 대문을 두었다. 대문에는 방을 마련해 기거를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아마 늘 이곳을 지키고 싶었는가 보다. 그만큼 지은이는 이 해운정에 마음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늘 발길이 머무는 곳, 해운정. 해운정 마루에는 율곡 이이 등의 글이 걸려 있고, 명의 사신 공용경이 쓴 <경호어촌>이란 글과, 부사 오희맹의 <해운소정> 등의 글이 있다. 그만큼 해운정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아름다움에 취했다는 이야기다.

 

해운정의 뒷편에는 가지를 처트린 소나무가 서 있다. 늘 보아도 그 자리에 있는 처진 소나무는 해운정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언제나 보아도 그 소나무 가지에는 바람 한 점이 걸려 있다. 모처럼 들른 해운정 앞에는 작은 연못이 생겨났다. 그리고 철 늦은 연 몇 송이 수줍은 듯 얼굴을 감추고 있다.

 

  

  

 

바람이 쉬어가는 정자 해운정. 그 정겨운 모습에 근처를 지날 때면 꼭 들르고는 한다. 그곳에서는 다리를 편히 놓고 바람과 이야기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기단을 높이 쌓고 처마를 높여 아름다움을 더했지만, 결코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숨 죽이고 다소곳 아름다움을 간직한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다.

 

  
보물 제183호 강릉 해운정

 

보물 제183호 강릉 해운정. 앞으로 또 많은 시간이 지나도, 아마 바람은 해운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다. 그저 마루에 걸터앉아 한 여름을 쉬어도 좋고, 온돌방을 달구어 놓고 담소를 해도 좋다. 언제나 들러보아도 정겨운 곳. 해운정은 그래서 바람의 발길을 붙들고 있는가 보다. 

‘해가(海歌)’는 신라 때부터 전해진 노래로 구지가와 같은 계통의 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전해진다.

 

김해에 전하는 가야국의 구지가가 건국 신화 속에서 창출된 신군을 맞이하는 주술적 요소가 강한데 비해, 해가는 신라시대 민간에 널리 전승이 되어, 액을 막고 소원성취를 비는 기원성이 짙은 노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두 노래 모두 집단가무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모여 부르는 이러한 노래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곳의 구지가, 서로 달라

 

그런데 이 해가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에 보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인 <구지가>가 있다. 이 구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구워서 먹으리)

 

이와는 달리 삼척지방에 전하는 해가사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라고 되어있다. 해가사의 창출근거를 보면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바위 산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뒤에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좌우를 향해 "누구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 하였다. 모시던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절벽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부인에게 바쳤다. 일행은 명주를 향해가다가 그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순정공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나 계책이 없었다.

 

그 때 또 한 노인이 말하되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이 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하여 속세의 요리가 아니다.’ 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기가 풍기었다.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라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용이 아닌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도 용이고, 노래를 듣고 다시 수로부인을 놓아준 것도 용인데, 왜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난 속 좁은 소견으로 이렇게 유추해본다. 첫째는 우선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해하려는 음모로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둘째로는 우리 설화 등에 보면 거북이는 용왕의 사자로 많이 표현이 되고 있다. 별주부전 등을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거북이가 뭍에 오른다. 즉 용왕의 충실한 사자인 거북이를 해하는 것이 두려운 용왕이 수로부인을 다시 되돌려 보냈다는 생각이다. 이런 향가 한수에도 당시 사람들의 심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동해시에서 삼척을 향해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삼척MBC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증산해수욕장과 수로부인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고가도로 밑을 통과해 좌회전을 하게 된다,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에 성황당사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원한 동해가 펼쳐진다. 사기에 적힌 ‘임해정(臨海亭)’은 2004년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조그맣게 꾸며져 신라 때 이곳을 지나던 수로부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작은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흡사 당시 막대기로 언덕을 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저 편에 서 있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는 그 때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용의 화신은 아닐는지.

 

 

이곳을 경주에서 명주(강릉)로 가는 길목 중에 해가사의 장소로 여기는 것은 설화를 배경으로 유추한 것이다.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헌화가와 해가를 불렀던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임원해수욕장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이 수리봉, 혹은 수로봉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역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지면 그때는 좀 더 근접한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수로부인과 해가의 장소인 임해정은 그렇게 동해를 바라보며 다소곳 자리하고 있었다.

수서역 기점으로, 중앙선 이용보다 26분 단축

여주∼원주 철도를 건설하면 KTX 수서역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장까지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렇게 되면 서울 강남의 호텔에 숙박하고 당일코스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

경기개발연구원 조응래 선임연구위원은 <수서∼평창 철도연결 방안>을 통해 서울 수서에서 강원 평창까지 기존 계획보다 26분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중앙선보다 여주~원주 철도 이용하면 26분 단축

정부는 인천공항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장까지 인천공항철도를 이용해 서울역이나 용산역에 도착한 다음 중앙선으로 원주까지 가는 교통편을 제시했다. 이 노선은 인천공항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선수와 대회 관계자에게는 최단거리지만, 수도권 인구 3분의 2이상이 살고 있는 한강 이남지역 주민들이 경기관람을 위해 평창으로 가기에는 매우 불편하다.

KTX 수서역을 기준으로 할 경우 분당선 왕십리역까지 가서 중앙선으로 환승한 다음 평창으로 접근하는데 86분이 걸리는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여주~원주 철도를 건설하면 KTX 수서역에서 평창까지 59분 만에 이동이 가능해 정부가 제시한 방안보다 26분 단축할 수 있다.


현재 공사 중인 성남∼여주 철도는 2015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원주에서 평창을 거쳐 강릉까지 연결되는 철도는 올해 5월 착공해 2017년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여기에 여주에서 원주까지 22km 구간이 추가로 연결되면 성남(판교)에서 평창까지 직행 운행 시 51분만에 도착할 수 있다. 성남∼여주 구간은 시속 160km, 여주∼원주∼평창 구간은 시속 22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서에서 이매 구간은 기존 분당선을 이용할 경우 17분이 소요되지만, GTX 수서∼동탄 구간의 판교역이 생기면 11km 구간을 시속 200km로 달려 3분 30초 만에 이동할 수 있다. 성남∼여주 철도로 환승하는 시간 5분을 고려하더라도 수서에서 평창까지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강남역에서 출발해도 판교역에서 신분당선으로도 갈아 탈 수 있기 때문에 70분이면 도착이 가능하다.

한편 6,329억 원이 소요되는 여주∼원주 철도는 현재 기획재정부에서 예비타당성조사 중에 있으며 4월 중순께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동계올림픽 개최까지 6년이 남았기 때문에 서둘러 추진하면 2017년 말까지 완공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장 주변 과도한 숙박시설 건축 필요 없어

조응래 선임연구위원은 여주∼원주 철도가 건설되면 경기장 주변에 과도하게 숙박시설을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유치제안서 기준으로 대회운영을 위한 86,000실 규모의 숙박시설은 기존 및 계획 시설로 확보할 수 있다. 관람객을 위해 추가 확보하겠다고 밝힌 숙박시설 14,000실은 서울 강남과 경기도, 이천, 여주 등에 위치한 호텔 및 콘도 76개, 11,330실의 숙박시설을 활용하면 추가적으로 건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조응래 선임연구위원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제안서에 여주∼원주 철도사업이 포함된 만큼 경기도와 강원도,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가 협력하여 중앙정부에 적극적으로 사업추진을 건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여주~원주 철도 건설로 향후 KTX 광명역, 인천공항으로 이어지는 시속 220~230km의 동서 간선철도 노선이 만들어지면 수도권과 원활한 연결체계를 갖게 될 것”이라며, “급행운행이 가능하도록 역사 내 대피선 및 신호체계가 시급히 정비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주) 이 기사는 경기도 보도자료임

강릉 선교장. 우리 전통가옥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고택이다. 선교장은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효령대군의 11대 손인 가선대부 이내번이,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해와 1703년에 건립한 집이다. 벌써 300년이 지난 고택이다.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교장은, 안채, 열화당, 행랑채, 서별당, 동별당, 곳간채와 솟을 문 앞에 따로 떨어져 선교장의 품위를 높이는 정자인 ‘활래정’으로 꾸며졌다. 10대에 걸쳐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옥으로 유명한 선교장. 그 앞에 서 있는 활래정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정자일까?


100년이 지난 뒤에 건립한 활래정

활래정은 선교장을 짓고 난 뒤 100여년이 지난 1816년에 건립이 되었다. 선교장 안에 있는 사랑채인 열화당으로서는 아마도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했었는가 보다. 앞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선교장의 멋을 한층 더 높게 만들고자 했던 마음이 그대로 반영이 된 정자이다.

서쪽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 그 물을 그대로 경포호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선교장의 동별당보다 아래편에 연못을 파고, 그 물을 가둔 것이 오늘 날 활래정이 있게 만들었다.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활래정에 잠시 머물다가, 경포호로 빠져 나간다. 결국 활래정은 항상 맑은 물이 고인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다고 표현을 해야 맞을 것이다.



손님을 맞는 다실도 겸해

활래정이 딴 정자보다 운치가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다실을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어느 정자나 그 안에서 차 한 잔 마시거나, 술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활래정은 다르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석축으로 쌓은 연못의 한편에 세 칸을 걸쳐 놓고, 한편은 물 위에 뜬 듯이 장초석을 받쳐 띄워놓았다.

ㄱ 자 형의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하고, 사방을 창호를 달았다. 사방 어느 곳에서나 주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자 밖으로는 좁은 툇마루를 놓고, 모두 난간으로 둘러 멋을 내었다. 그리고 연못에는 갖은 수초들을 심었다. 계절마다 연못 속에 있는 수생식물들이 피우는 꽃들이 활래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활래정은 축대 위에 걸친 부분에는 두 개의 연결된 방과 한 칸의 누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꺾인 부분의 연못 위에 장초석을 받친 방은 큰 누마루를 깐 방이다. 겨울에는 따듯한 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여름이면 누마루방에서 시원한 경포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태장봉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에 시 한수를 띄워 보낼 수 있도록 꾸민 정자이다.

정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다

그런 아름다운 정자에서 괜한 술로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는지, 그저 차방을 만들고 차 한 잔에 온갖 정담이 오고갔을 것만 같다. 이번 1월 30일 답사 때와 2007년 2월 6일의 답사 사진을 비교해 본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연못 안에 수위뿐이다. 그 때는 장초석의 일부가 물이 차 가려져 있었다.



해가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는 선교장과 활래정. 그래서 이 집이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지켜내는 후손들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언제 날이 풀려 활래정의 연못에 꽃이 가득한 날, 활래정에 올라 향이 가득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은 것은, 바로 옛 모습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해 내보고 싶어서이다.


강릉시 운정동에 가면 초당두부집들이 줄지어 있다. 그 곳에는 보물 제183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자인 ‘해운정’이 자리 잡고 있어, 정자의 풍취를 느끼게 해준다. 그 해운정과 낮은 담을 사이로 두고 집이 한 채 자리하고 있다. 바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9호인 강릉 심상진 가옥이다. 이 집은 17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당은 조선 광해군 때 강릉지역에 삼척부사로 역임한 허엽(1517~1580)의 호이다. 허엽은 허난설헌과 허균의 부친이다. 초당 허엽은 집 옆의 맛 좋은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경포호의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두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두부의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허엽은 두부에 자신의 호인 ‘초당(草堂)’을 붙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보물 해운정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가옥

초당 허엽이 초당두부를 처음 만든 것은 500년 전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뒤 운정동에 있는 심상진 가옥의 주인도 초당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월 30일 강릉지역을 답사하다가 오랜만에 해운정에 들렸다. 강릉을 갈 때마다 해운정에 들리는 이유는, 정자로서의 남다른 품위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해운정을 돌아보다가 시간을 보니 점심을 먹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답사를 하다가보면 언제나 때를 놓치기 일쑤다. 그래도 이렇게 바로 옆에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초당두부야 언제나 입맛을 즐겁게 한다. 더욱 해운정 바로 옆 심상진 가옥에서 하는 초당두부는 딴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그러니 어찌 이곳을 마다하고 길을 나설 것인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답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더구나 밥 때를 앞에 두었다면 더할 것이다. 그래도 이왕 이것을 왔으니, 심상진 가옥부터 찬찬히 둘러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담장이 없는 ㅁ 자 형태의 집

심상진 가옥은 담장이 없다. 아마도 이런 풍광에 집을 짓는다면, 굳이 담장을 둘러야 할 필요가 없을 것도 같다. 담장이 없는 ㅁ 자 형태의 집이면서도, 나름 고택의 정취를 잘 간직한 집이다. 집 앞에는 ‘400년 전통’ 운운하는 현수막이 높다랗게 걸려있다. 심상진 가옥 바로 옆에 초당두부집은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직도 살고 있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심상진 가옥. 앞으로는 세 칸의 사랑채가 장대석 축대 위에 자리한다. 이 사랑채는 바로 옆에 있는 해운정과 더불어 정자와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든다. 세 칸의 사랑은 바라보면서 좌측 두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 한 칸은 대청으로 드렸다. 강릉 지방의 대청은 일반적으로 문을 달았는데, 그것은 아마 해풍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퇴청 마루를 놓고, 뒤편으로는 수직으로 두 칸의 온돌방을 드렸다. 사랑채는 ㄴ 자형의 평면 팔작집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앞으로 보이는 풍광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을 한 사랑채. 특별한 꾸밈은 없지만, 나름 넓게 펼쳐진 경포호를 감상하기에는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통 건축미를 볼 수 있는 집

사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는 중문은 굴곡이 있는 문턱을 달아내었다. 넓지 않은 집이면서도 멋을 부릴 만큼 부린 집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의 아궁이가 있고, 바람벽을 판자로 달아내었다. 그러나 그 바람벽조차 꽁꽁 싸매지 않았다. 심상진 가옥의 여유는 이런 것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안채는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이다. 바로 옆 해운정이 중종 25년인 1530년에 강원도 관찰사인 심언광이 지었다는 것을 볼 때, 이 집은 심언광의 후손이 뒤늦게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에 옆 해운정의 풍취를 넘어서지 않도록 지었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담을 두지 않은 것도, 해운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부엌과 두 칸의 방을 두고, 그 옆에는 대청을 두었다. 대청 옆에는 한 칸의 방을 마련했는데, 이 방은 툇마루에 난간을 둘렀다. 아마도 이 방을 안사랑으로 이용한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에서 꺾어진 방 사이에는 일각문을 두어, 바깥출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주변 경관을 해하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 있어

안채에서 달아 낸 곳간채는 중문과 연결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막힌 ㅁ 자의 집이다. 안채와 달아낸 곳간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내어, 집안에는 중문을 포함해 모두 3개의 문이 있다. 집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동선을 최대한 편리하도록 꾸민 집이다. 안채의 앞으로는 넓지 않은 툇마루를 연결한 것도, 동선의 구성을 가장 편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상진 가옥은 안채를 먼저 짓고 난 후 사랑채를 지었다고 한다. 옆에 두부집을 운영하면서 이 집에서 사람들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집안에는 온기가 배어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맛보는 초당순두부. 그 담백한 맛은 기분 좋게 집을 둘러보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답사를 하면서 가장 좋을 때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둘러 본 후,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닐 런지. 그래서 난 아직도 속물이란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