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쌀과 자기, 땅콩과 고구마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조선조에 여주 출신의 황후가 많기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으며 이 지역이 명소가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조선시대에 여주의 시장분포 사항을 살펴보면 여주장, 천령장(천양장이라 부름)과 억억장(후에 흥천장)이 제일 먼저 생기고 가장 번성하였다. 그 다음으로 안평장(후에 청안리로 옮김), 곡수장, 궁리장(금사면 궁리)등이 생겼고 그 후에 다시 태평리장이 생겼다.

 

해방 후에는 대신장, 북내장, 주암장, 상품장 등이 생겼으나 해방 후에 생긴 시장은 몇 년 후에 폐장되었다. 이곳에서 외지로 수출되는 수출품은 도자기 이외에 가내공업품으로 한지, 자리, 약초 등이었다. 1965년도에는 시장수가 11개였고 70년대 이르러 여러 종류의 잡화를 다루는 도매업, 소매업 등의 상점이 늘어나 시장수가 줄어 현재의 가남장과 대신장, 여주장만 서고 있으나 여주장은 그 규모가 다른 장에 비할 데 없다.

 

여주장에 대하여 옛 문헌에 기록된 것은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시장이 없는 곳에 장이 생기기 시작하여 생활필수품을 거래하게 되었고 쌀, , 은 등이 화폐의 대행을 이루는 물물교환이 성행하여 정책적으로 교환율을 정하기도 했고 폭리에 대해서는 사법제도를 만들어 범법자를 처벌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 여주의 생산처로서 지금의 대신면 지역에 등신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정확한 위치나 생산품이 무엇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그 외에 방곡 근처(점동면 처리), 신지리(능서면 신지리), 신근리(흥천면 신근리)등이 있었다. 조선 초 농본정책이 중시되고 상업이 억제되었으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사행상이 두드러지게 되고 지방의 시장도 그 수효가 증가하여 점차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한강의 이용수단이 생기게 되었고 그에 따라 관선, 병선, 사선이 생기게 되었다 세종 년간에 들어오면서 여주 양화군에는 정조250석 적재적량의 조선이 15, 그 이하 사선포함 20여척이 있어 이때 이미 상공업이나 교통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 같다. 한강을 이용한 상선들은 주로 농산물, 수산물, 임산물 등을 수송했으며, 올 때는 해산물(생선, 새우젖, 소금)을 외지에서 수입해왔다. 이것이 여주 최초의 시장인 양화장이다.

 

여주읍 하리 일대에 서는 여주장은 매 5일과 10, 15, 20, 25, 30일 서게 된다. 주요품목으로는 쌀, 고추, 마늘, 참깨, 채소류, 의류, 어류, 그릇, 신발, 잡곡, 잡화류 일체 등이며 계절에 따라 특산물인 고구마와 땅콩, 고추 등을 구매할 수 있다. 여주 5일장은 청정 농산물이 생산되는 지역으로서 인근 이천, 양평에 비하여 그 규모가 타 시장보다 커서 산지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시장 진입에 있어 현재 여주 상권 살리기 일한으로 추진하는 중앙통 차 없는 거리로 실시로 현재 차량 진출입이 없어 중앙통내 의류 및 먹거리 쇼핑에 일번지로 대두되고 있으며 중앙통 거리를 지나 여주 5일장 구경을 하면 어느 관광지에 비하여 더없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여주를 찾았다. 평소와는 달리 폭염으로 인해 장이 영 활기를 잃은 것 같아 조금은 썰렁한 느낌마저 든다. 1시가 넘어서인가 사람들도 북적거리지 않고 장사꾼들의 고함소리만 시끄럽다. 왜 이리 한가하냐고 물었더니 벌써 파장분위기라고 설명을 한다. 농촌지역인 여주장은 딴 곳과는 달리 아침 일찍 북적거리다가 점심시간이 지나면 거의 파장 분위기라는 설명이다. 조금은 허탈한 감도 있으나 이 날은 꼭 장만을 구경하자고 간 것은 아니기에 조금은 위로가 된다. 장 구경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려고 길을 잡았다.

 

 

여주장 길 건너편 강 쪽으로는 대로사(大老祠)가 있다. 여주군 여주읍 하리 200-1에 소재한 대로사는 온통 꽃으로 장식을 하고 있다.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0호인 대로사는 우암(尤菴) 송시열(宋詩烈)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정조 9년에 김량행(金亮行)등 유림에 명하여 건립하고 동년에 사액(賜額)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본전 24, 강당 57, 비각 8, ·외 삼문 12평추향제 39평등이 있다.

 

1785년에 왕명으로 창건되어 대로사라 사액되었는데 1873(고종10)에 강한사로 개명되었다. 경내에는 사당과 내 ·외삼문이 일렬로 배치하고 있으며 강당은 주축에 직교되게 위치하고 있다. 비각은 외삼문 밖에 있는데 담장이 둘러져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정면 3,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인데 전면에는 개방된 퇴간(退間)이 있고 측면과 후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감실이 있다.

 

부재형태와 가구수법은 18세기 익공형식의 기준이 될 만큼 완벽하다. 이 사당은 다른 사당과는 달리 서쪽을 향하여 효종의 영릉을 바라보고 있다. 송시열은 효종이 북벌을 꾀하였을 당시 선생에게 북벌을 논의하던 가장 신임하는 신하이며 왕의 대군시절 스승이었다. 김자점의 무리가 청나라에 효종이 새 사람을 등용하여 장차 항거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하니 청은 병력을 국경에 집결하고 사신을 보내어 추궁하였다.

 

 

이에 선생은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효종 9(1658)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다음해 효종이 승하하였다. 그 뒤 효종의 장례 때 대왕대비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윤구(尹口)3년설()에 맞서 기년설(1)로 시비가 분분하다가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덕원, 태천, 거제, 청풍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였다. 숙종 15(1689)에 왕세자 책봉문제로 상소하였는데, 숙종의 비위를 거슬러 노여움을 사서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5년 만에 복관(復官)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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