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날을 잘 잊어버린다. 흔히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 말일게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을 좀 벌면 꽤나 허세를 부리고 다닌다. 그럴 때 사용하는 말이다. 사람은 곧잘 일부러 잊어버리기를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 후에는 언제 그랬느냐고 반문도 한다. 사람의 한 생은(한 일대) 보통 30년을 잡는다. 그래서 3대를 대물림을 했다고 하면 100여년 정도의 시간을 흘렀음을 안다.

 

100여 년 전 우리들의 생활상을 어떠했을까? 요즈음에는 많은 자료사진들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진으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속사정을 보면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뜻이야 그런 말이 아닐지라도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100여 년 전이면 한참 살아가기 힘들었을 시기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또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빨래터는 여인네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빨래터는 아침밥을 해 먹고 난후, 집안일과 간단한 텃밭 등의 일을 마친 여인들이 오전 10시쯤 되어서 많이 모인다고 한다. 그 시간에 얼른 빨래를 해서 널어야 낮 햇볕에 빨래를 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빨래터에서 만난 여인들은 그저 간단하게 빨래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정보를 여기서 공유하게 된다.

 

 

지금이야 시골에 가도 여럿이 함께 모여서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지난날에는 공동 빨래터가 샘가나 개울가에 만들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이곳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는 했다. 하지만 빨래터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이웃집 흉도 어지간히 보았다고 하니 여인들의 만단설화(萬端說話)가 이곳에서 나왔으리라.

 

물은 생명과 직결된다. 물이 없다고 하면 인간은 단 하루를 살아가기도 힘들다. 예전에는 꼭 우물이 아니라고 하여도 흐르는 냇물을 마실 수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 때가 그립기도 한다. 지금이야 어디 아무 물이나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있겠는가? 물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요즈음엔 물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사대부 집에는 물을 길러 다니는 머슴들이 있었으며, 북청 물장수까지 생겨났다. 마을에는 공동우물이 있어 전체 주민들이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공동우물을 잘 보존하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일 년에 두어 차례씩 청소를 하고는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정월이 되면 마을 우물가에서 용왕제(龍王祭)나 수신제(水神祭)를 올려 일 년 내내 물이 가물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고는 했다.

 

 

100여 년 전의 장터에는 생명력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5일장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지만 당시 장은 지금처럼 개성이 없이 어느 장을 가든지 다 같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즉 장마다 각기 그 장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고 하니 그것들을 이용한 장돌뱅이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인가 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5일장들을 보면 충남 한산의 모시장, 충남 금산과 경북 풍기, 경기 강화의 인삼장, 충남 강경과 홍성의 젓갈장, 경북 안동의 안동포장, 서산의 마늘장, 영양의 고추장, 청양의 구기자장 등 그 지역의 특산품들과 거기에 따른 부수적인 상품들이 주 거래품목이었다.

 

5일장은 우리네 정서에는 그냥 물건을 사고파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 곳에서 모든 세상의 일이 다 이루어졌던 곳이 바로 5일장이다. 오죽하면 장마다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파는 각설이패가 다 생겨났을까. 그들이 주로 부르는 것이 장타령인데, 장타령은 대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일자에서 장자까지 셈을 하면서 자마다 구절을 만들어 부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각 장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사설을 엮어가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여인네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만 했던 시기다. 더구나 농사를 주로 짓던 우리네 살림에서 여인네들이 감당을 해야 하는 일이란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빨래하고, 아이들 건수하고 나면 새참을 머리에이고 들로 나간다. 들에서 돌아오면 다시 점심을 준비해야 하고 집 앞에 있는 텃밭이라도 맬 양이면 도대체 아이에게 젖을 물릴 시간도 부족하다. 오죽하면 누나 등에 업힌 아이에게 그대로 젖을 물렸을까? 그래도 젖을 빨면서 한 손으로 나머지 젖을 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정겹다. 분유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즈음보다 훨씬 인간답지 않은가? 그래서 어르신들 중에는 예전이 지금보다 훨씬 인간미가 넘쳤다고 하시는가 보다.

 

널뛰기는 도판희(跳板戱)’라고도 한다. 두툼하고 긴 널빤지 한복판의 밑을 괴어 중심을 잡은 다음, 널빤지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힘을 주어 다리를 굴신 한 후 튀어 올랐다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발을 구르면 상대방은 그 반동으로 솟아오르게 된다. 이렇게 번갈아 두 사람이 솟구쳐 올랐다 발을 굴렀다 하는 놀이로, 높이 오를 때는 56척까지도 위로 솟구쳐 오른다. 놀이가 없던 지난 날 널뛰기는 여인네들의 운동으로 참 적합하였으리라는 생각이다.

 

널뛰기의 유래에 관하여 최남선(崔南善)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이 유희는 후세의 산물이 아니고 대개 기마(騎馬격구라도 자유로이 하던 우리 여성 고세기 이전에 있었던 것이니 고려 이전의 민속임은 살피기 어렵지 않다고 했으니 대개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널뛰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일설에는 옥중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던 여인이 남의 도움을 받아 널을 뛰면서 옥사 담장 안으로 남편을 바라본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또 하나는 밖으로 출입을 자유롭지 못한 여인네들이 널을 뛰면서 담장 밖 세상을 보기 시작한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지만 둘 다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아마 그보다는 고려 때 기마격구처럼 과격한 운동을 즐기던 여인들이 발의 튼튼함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이와 같이 100여 년 전 우리네 살아가는 방법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세상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그에 따른 풍속도 바뀌는 법이니 그것이 세상 순리 아니겠는가? 새삼 지나간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과 비교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하면서 개구리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리느라 우리 옛것을 잃어버리고 정체성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들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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