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고도 경주는 늘 그리운 곳이다. 젊었을 때 그곳에서 잠시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던 나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 한편에 싸한 그리움이 샘솟는다. 지금이야 다들 어른이 돼서 벌써 손자, 손녀들을 본 나이이니 이제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가 보다. 하기에 제자라고 해도 당시에 20대 초반이던 나에게는 불과 7~8세의 차이밖에 나질 않았던 제자들이다.

 

몇 년 전인가 경주에 들렸을 때 제자들을 잠깐 만나본 것을 끝으로 그 이후 연락을 하지 못했다. 살아간다는 것이 바쁘다가 보면 내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버거울 수가 있다. 하물며 벌써 40년 이상이나 지난 옛 이야기를 끄집어내어야 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경주는 지금에 와서는 아예 눌러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늘 눈에 밟혀

 

경주에 그런 그리움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경주는 늘 머물고 싶은 곳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 그리고 백제의 고도인 부여와 공주. 두 곳을 비교하자면 문화도 다르고 그들이 조성해 놓은 많은 문화재 역시 다르다. 하지만 내가 경주를 더 선호하는 것은 1천년 세월을 지켜 낸 신라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문화유적이 오롯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문화재 중에서 경주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포석정이다. 포석정은 사적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시 배동 454-3에 소재한 포석정은,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알려진 곳이다. 굳이 이곳까지 와서 포석정이라는 석조 구조물을 만들어 놓은 것도,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포석정은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때로 본다. 경주 남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불교유적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신라는 당대의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자리한 포석정은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어무상심(御舞詳審)’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의 춤을 추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신비의 인물이다. 재위는 10년 남짓이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야기들은 인간이 아닌 신들과의 조우이다. 헌강왕 2년인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헌강왕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했을 때, 어디서 왔는지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남산의 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 혹은 어무산신이라 한다.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신과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라 했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해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신라의 멸망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외에 처용설화도 전한다. 왕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처용가(處容歌)>가 만들어졌다. 이 처용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 이슬람 상인이나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기도 한다. ‘만파식적에 관한 설화역시 헌강왕 때의 일이다.

 

()과 한()의 장소 포석정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셨다고 한다. 이런 잔치를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 했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 따서 만들었다는 것이다.포석정에는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 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나 잔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경애왕 4년인 927년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한 곳인 포석정. 그리고 신라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이 935년에 즉위를 마쳤으니,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최후를 맞이한 지 8년 만에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 아픔이 있는 곳이지만 물이 흐르지 않는 포석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저 편 남산 아래로 누군가 덩실거리며 춤을 추고 나타날 것만 같다.

 

5월 말 수원의 행사가 마무리가 되는 날 가방 하나를 등에 메고 길을 떠나야겠다. 경주로 달려가 그동안 보고 싶었던 경주를 낱낱이 돌아보고 싶다, 아마도 며칠간은 남산일대를 돌아치겠지만 말이다. 그 중에는 포석정을 빠트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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