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수원화성에는 공심돈이 두 곳이 소재한다.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북쪽 가까이에 자리를 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가 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공심돈과 남수문 사이에 남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안문은 일종의 시구문이다. 화성 안에서 형벌을 받고 참수당한 죄인이나 성안 백성이 죽으면 이 남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런 시구문 역할을 하는 남암문도 사라진 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팔달문 앙 편 끊어진 곳에 자리했던 남공심돈, 남암문, 은구는 찾을 수가 없다.

 

공심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여 적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 활용되던 곳이다. 공심돈은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수원화성에 중에서 높게 조성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공심돈의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총안과 현안 등을 통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남공심돈은 남암문의 동치 위에 있다. 그 제도는 모두 서북공심돈과 같으나 약간 작다. 치의 동남 두 면에 각각 현안 둘을 내고 위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다. 면마다 두 개의 총안을 뚫어놓았다. 장 내 3면에는 각각 3척쯤에 공간을 두어 군사들이 기예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가운데 돈을 벽돌로 쌓고 그 가운데는 비웠다.

 

남암문은 팔달문 동쪽 793척 도는 곳에 있으며 남쪽을 향해 역간 후미진 곳이 있다. 과에는 사잇문을 후미진 곳에 드어 적들이 그 길을 아라지 못하게 하고 사람, 가축, , 양식을 모드 이 암문을 이용해 성 안으로 들여왔다. 암문은 흙으로 문을 막으면 성과 같이 되어 폐쇄할 수 있도록 대비하여 임기웅변을 할 수가 있었다.

 

 

남암문의 위 덮개판을 대고 관 위에는 회를 더 붙여 안과 밖을 여장으로 끼워 쌓았다. 밖은 비예(성 위에 쌓은 낮은 담)만을 설치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흙을 채우고 잔디를 덮어 성 위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문선(문짝) 안은 쇠로서 빗장을 설치하였는데 정문과 같게 하였다.

 

수원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만날 수 없는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은구 등.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복원을 마쳐야 수원화성이 완전해 질 수 있다. 수원시에는 앞으로 이 사라진 시설물을 모두 복원하고 팔달문 양편과 끊어진 화성을 잇는다고 한다. 완전한 수원화성의 모습을 하루 빨리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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