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제일교회 노을빛 갤러리서 전시회 열어

 

고 주기철 목사는 1897115,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 있는 농가에서 부친 주현성과 모친 조재선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였다. 8세 때 개통학교에 입학한 주기철 목사는 나이도 어리고 몸도 허약하였지만 성적은 월등하게 뛰어나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동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기복(주기철 목사)이 개통학교에 다닐 때 당시 20세인 춘원 이광수가 부산 지구로 순회강연을 나왔다가 개통학교에 들러 학문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니 젊은이들이 열심히 배워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들의 미래도 열린다.”는 말을 하면서 오산학교를 소개했다. 주기철 목사는 그 말을 듣고 1,500리 길이나 되는 길을 걸어 사촌형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고향을 떠나기 전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다.

 

주기철은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는 이국땅에 와서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열망이 서린 주기철은 19263월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그렇게 임직이 된 주기철 목사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죽음을 불사하며 신앙을 지켜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타협과 박해 죽음까지도 불사한 주기철 목사의 흔들림 없는 신앙적 신념을 이어가고자 순교 72주기 추모기념으로 주기철 목사의 어록과 설교 말씀을 감성적 글씨인 캘리그라피로 표현한 어록 작품전이다.

 

 

 

청현재이 캘리그라피 어록전시회

 

청현재이 캘리그라피 어록전시회는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어록전시회이긴 하지만 예술적 감성으로 그려낸 어록작품들이다. 주기철 목사의 어록전시회는 서초동에 소재한 산정현교회에서 전시를 시작하여 주안장로교회, 시냇가푸른숲교회로 이어졌으며 이번에 지동에 소재한 수원제일교회 노을빛 갤러리에서 열린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반대를 하시다가 결국 그들의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신 분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성도들이 신사차배를 하지 않으면 못을 박은 널빤지를 깔아놓고 그 위를 걷게 하겠다는 일제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온 발에 피를 흘리면서 걸어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죠.”

 

그런 고 주기철 목사의 어록이라는 점에서 이 전시는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단지 종교적인 면으로 접근을 하기보다는 일제의 신사참배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살다가 떠난 분이기 때문에 그 어록 한 마디 한 마디가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님을 내 대신 잘 모시오 주오. 나의 유체는 고향에 옮기지 말고 평양 석박산 교회 공동묘지에 묻어주오. 내 어머니도 세상 떠나시거든 내 무덤 곁에 묻어주오. 따스한 숭늉물이 마시고 싶소. 나는 하나님 앞에 갑니다. 하늘에 가서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1944420일 부인 오정모의 마지막 면회에서 간수의 등에 업혀 나온 주기철 목사가 부인에게 전한 마지막 유언의 내용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의 의가 있습니다. 의에 죽고 의에 살으사이다(하략).”

1939년 주기철 목사의 최후의 유언 설교 5종목의 나의 기원 중에서 한 대목이다. 주기철 목사의 어록은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해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캘리그라피로 아름답게 쓰인 주기철 목사의 어록전시를 찾아가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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