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안곡서원과 은행나무는 무슨 관계일까?

 

명현들의 위패 모신 전각엔 그 흔한 현판 하나 달지 않았다. 홍살문을 지나 서원 솟을대문 앞에 이르니 우측에 안내판이 보인다. 안곡서원은 조선조 현종 7년인 1666년 남양 현감으로 부임한 민기중이 지방 유림들의 공의를 받아들여 기묘명현인 도원재 박세희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안곡사를 창건한데서 비롯한다.

 

도원재 박세희는 조선조 성종 22년인 1491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박세희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이회, 호는 도원재이다. 할아버지는 미창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 사화이며, 어머니는 연기현감을 지낸 신복담의 딸이다.

 

박세희는 중종 9년인 1514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515년에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1517년에 정언에 임명된 후 이조좌랑과 충청도도사, 장령, 홍문관응교를 역임한 후 1519년에 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상주로 유배되었다가 강계에 이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액을 받은 안곡서원

 

안곡사는 현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화성시 서신면 장안리 585번지에 소재한 안곡사는 마을 안쪽에 수령 400여 년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그루 서 있고 그 맞은편 산자락에 자리한다. 처음에는 향사를 위해 마련한 안곡사에는 현종 9년인 1668년 박세희의 백형으로 향리에 은거하면서 학자와 효자로 일생을 보낸 송촌 박세훈(1488~1553)을 배향하였다.

 

처음에는 향사의 기능을 갖고 있던 안곡사는 경종 1년인 1721안곡(安谷)’이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선현 배향과 함께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서원의 기능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종 8년인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안곡서원은 현재 화성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른 시간부터 화성 곳곳을 다니다가 보니 어쩌다 안곡서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은행나무의 위용에 끌려 들어갔다가 만나게 된 안곡서원이다. 서원이나 향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문을 닫아놓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찾아갔는데 다행히 문이 열려있다. 이럴 경우 괜히 반갑기도 하고 관리를 하는 사람에게 인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다.

 

 

 

 

조촐한 강당, 이곳에서 묵고 싶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앞에 강당이 자리한다. 세 칸 팔작지붕으로 된 강당은 계단 위 선영을 모신 재실을 마주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강당의 뒷벽을 바라보아야 한다. 몇 단의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앉은 강당. 크지 않은 강당은 문을 열고 안을 보니 한 편에 게판이 걸려있다.

 

이곳에서 제향을 지내기는 하는 것일까? 강당 안은 그리 많은 서생들이 모였을 것 같지는 않다. 농번기라 사람들을 만나기조차 힘든 시골마을에서 누구에게 질문을 할 수도 없다. 다만 이렇게 조용한 강당 안에서 며칠이고 묵으면서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책이라도 실컷 잃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마음이 맞는 지인과 함께 밤새 세상을 논하고 싶은 그런 강당의 형태이다.

 

강당 앞에서 계단 위를 바라보니 재실의 문도 열려있다. 안으로 들어가 잠시 머리를 조아린 후 문을 열어보니 안으로 다 걸려있다. 어떻게 닫은 것일까? 문 밖에는 그 흔한 잠을통 하나 걸려있지 않은데 말이다. 재실 안 모습이 궁금하지만 여기까지 들어온 것만도 고마울 수밖에. 강당으로 내려오려다가 건너편을 바라보니 은행나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은행나무 안곡서원과 어떤 관계가 있나?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한다. 전국의 향교와 서원을 다니다가 보면 반드시 주변 가까운 곳에 은행나무가 한두 그루 씩 서 있었다. 그렇다면 안곡서원과 마주하고 있는 이 은행나무 역시 서원과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안곡사를 처음으로 신축한 것은 1666년으로 350년이 되었다.

 

은행나무의 수령은 400여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곡사를 지을 때 이 은행나무를 함께 식재한 것은 아니었을까? 주변에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괜한 생각하나가 머리를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현재 안곡서원의 경우 옛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욱 사액서원이라고 하면 현재의 모습보다는 더 넓었을 것이다.

 

저 은행나무와 안곡서원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혹 저 은행나무가 서 있는 장소까지 안곡서원이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 사액서원이었다는 설명이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음 일정 때문에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 장안리 일대를 더 돌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 화성시 답사를 나갈 때는 다시 한 번 이곳에 들려 안곡서원과 은행나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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