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명당

 

명당이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길지(吉地)를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은 명당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집터가 명당이기 때문에 그 집안의 자손들이 출세를 했다거나 조상의 묘를 명당에 써 후손들이 고거에 급제하고 입신양명하여 자손이 번성하고 집안에 재물이 많이 쌓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고로 살아서는 좋은 환경을 갖춘 집에서 살기를 원하고, 죽어서는 땅의 기운을 얻어 영원히 살기를 원했다. 이런 사람들의 사고가 논리화된 것이 바로 풍수지리설이다. 풍수는 그만큼 자신은 물론 후손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명당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런 명당에 대한 집착은 비단 나라의 큰 인물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선호하고 자신의 집을 명당에 세우기를 원했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한다리길 39(유계리)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인 정순왕후 생가는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 시절인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은 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정순왕후 생가를 찾아갔던 때는 시간이 괘 흘렀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4월초였으니 말이다.

 

 

서산시 김기흥 전 민선시장 소유

 

정순왕후가 태어났다는 서산 정순왕후 생가. 잡 앞에는 수령 400여년이 지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정순왕후가 어린 시절 꿈을 키워주던 나무라도 한다. 현재 보호스로 지정되어 있는 느티나무를 마주하고 솟을 대문이 서 있다. 마침 앞마당에는 정순왕후의 16대손인 민선 1, 2기 서산시장을 지냈던 김기흥 전 시장이 마당에 늘어놓은 화분을 손질하고 있다.

 

이 앞쪽이 다 이집 땅이었어요. 지금은 다 딴 용도로 사용하고 이 터만 남았지만요

꽃을 손질하고 있던 김기흥 전 시장은 자신이 이 집에서 16대를 살아온 후손이라고 말하면서 집은을 돌아보아도 좋다고 승낙을 한다. 솟을 대문을 마주하고 사랑채가 서 있고 측면에 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를 만날 수 있다.

 

 

자 집으로 꾸며진 안채와 사랑채가 잇대어 잇어 전체적은 규모는 자 형의 가옥이다. 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다락방이 있고 그 밑에 아궁이가 있다. 부엌을 지나 안방이 자리하고 있고 세 컨 대청이 중앙에 있다. 집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상당히 아늑하고 운치가 있는 집이다. 이곳이 명당터라는 것은 후손들이 입신양명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이곳을 아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정순왕후의 본관은 경주이다. 정순왕후 조선 영조 21년인 1745 11월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오흥부원군 김한구이고, 어머니는 원주 원씨 원명직의 딸 원풍부부인이다. 김한구의 가문은 효종시대 관찰사를 지낸 김홍욱의 후손으로 충청도 서산에 세거하였다.

 

정순왕후는 정성왕후의 사망 뒤인 영조35년인 1735에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서산에 세거하면서 산림 가문답게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있었던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국혼 후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를 필두로 정계로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한다.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였으며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남당을 이루어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북당과 대립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서진, 한지민 등이 출연한 MBC 77부작 대하드라마 이산을 보면 정순왕후는 이상 정조와 많은 갈등을 빚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축성하고 강한 왕권과 백성의 편안함을 생각하면서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모두를 포용했던 현군이다. 그런 이산에서 보이듯 정순왕후는 그저 영조의 계비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정조의 승하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할 정도로 여장부다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정순왕후가 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살았다는 서산 정순왕후 생가. 마당 한 가운데 자라고 있는 향나무 한 그루가 그 때이 역사를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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