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께서는 민속연구가로서 안성남사당풍물놀이도보 발간 및 많은 방송과 신문기사를 통해 안성남사당놀이의 우수성을 대내외적으로 그동안 널리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셨기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이 패에 담아 드립니다. 영원히 기억하며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 20161223일 경기무형문화재 제21호 안성남사당보존회원 일동>

 

사람이 한 우물을 파면 무엇인가 이루는 날이 온다고 했던가? 우리음악을 전공했던 나로서는 그동안 우리민속에 관한 꽤 많은 저서를 썼다. 대개는 지역의 소리와 민속, 제의식 등에 관한 저서들이다. 안성시청(당시군청)에서 남사당풍물놀이에 대한 책을 의뢰받고 안성에서 6개월 정도를 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읍내에서 서운면 청룡사까지 수도없이 발걸음을 했다.

 

서운면 청룡사는 충북 진천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고찰로 당시는 교통편이 상당히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1987년에 안성시에서 발간한 이 책은 공식적으로 나에게는 가장 먼저 저서라고 내놓은 60P 분량의 소책자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꽤 많은 고생을 했다. 내가 김기복 선생을 처음 만난 것도 이 때이다.

 

 

안성남사당 꼭두쇠 김기복 선생을 만나다

 

당시는 안성남사당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을 때라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 묻고 기록하기를 수도없이 반복해야 했다. 그때 서운면 한 학교에서 풍물팀을 지도하고 있던 김기복 선생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동안 남사당풍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남사당의 여성 꼭두쇠였던 바우덕이는 물론, 남사당의 역사를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안성남사당의 꼭두쇠였던 이원보패에 들어가 8살부터 상무동으로 시작한 김기복 선생은 안성남사당이 전부였으며 뼈 속까지 꼭두쇠였다. 선생은 늘 남사당의 복원과 전승에만 관심이 있었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선생과 인연이 되어 그동안 수도없이 안성을 드나들며 남사당에 대한 기사를 쓰곤 했다,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1997930일 안성남사당풍물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지정되자 선생은 기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2002년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 창단하여 꼭두쇠를 역임하였다. 2015820일 새벽 420분경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생은 꼭두쇠였다.

 

 

그동안의 노고에 공로패를 받아들다

 

얼마 전인가 안성남사당에서 연락이 왔다. 12월에 김기복 선생의 흉상제막식을 하는데 그날 공로패를 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가 공로패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김기복 선생의 흉상을 제작하여 개막식을 한다는데 그보다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23일 오후 3시 안성시 보개면에 소재한 남사당공연장에서 열린 흉상제막식에 참석을 했다.

 

이 자리에는 황은성 안성시장과 이동희 전 시장, 안성시의회 권혁진 의장, 양정평 안성문화원장과 고 김기복 선생의 유족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감사패와 공로패는 황은성 안성시장, 김학용 국회의원, 안성시의회 권혁진 의장, 양장평 문화원장이 감사패를, 이동희 전 안성시장, 김종해 봉산탈품보존회부회장, 처음으로 안성남사당을 기록해 저서로 남긴 본인 등이 공로패를 전달 받았다.

 

 

공로패는 안성남사당답게 꽹과리에 글을 쓴 것이다. 안성남사당의 영원한 꼭두쇠인 김기복 선생을 기리는 공로패이기에 더 의미가 깊다. 흉상 제막식을 마치고 그 앞에서 판굿을 하고 있는 선생의 제자들인 남사당보존회원들을 보면서 새롭게 감회에 젖는다. 김기복 선생이 이런 제자들의 판굿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 “사람이 한 우물을 파다보면 언젠가는 그 빛을 보게 된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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