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인데도 장맛비처럼 비가 쏟아진다. 빗속에서 찾은 오죽헌, 입구에 서 있는 검은 대나무는 이 곳이 오죽헌임을 알려준다.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 초기의 별당건축인 오죽헌은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본래 1452년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고택에 딸린 별당으로, 이이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이름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집으로 대청과 온돌방, 그리고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놓고 기둥 윗몸으로부터 쇠서를 내어 결구한 이익공 집이다.

 

쇠서의 밑면은 초각(草刻)되었고 그 끝은 수서로 되었으며, 도리방향으로는 첨차를 놓고 소로를 두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전면은 띠살 창호를 달았으나 측면에는 골판문을 달았다. 간살은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에 걸고, 이 위에 첨차로 된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쳤으며 다시 이 위에 첨차가 있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대청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나 합각머리 밑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조선 초기의 별당 또는 사랑채 건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현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죽헌은 원래 수재 최응현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인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인 용인 이씨에게 상속되었다.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둘째 딸의 아들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외할머니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했는데, 이것이 오죽헌의 유래가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전기 민가의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다. 조선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 외에도, 이 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남으로써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1963년 1월 3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 경내에는 문성사, 사랑채, 어제각, 율곡기념관이 있다.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시호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율곡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어제각이 있었으나 어제각을 북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였다. 어제각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과 율곡 이이선생 유년기에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한 유품 소장각이다. 1788년 정조임금의 명으로 건립되었다가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사업 때 철거되었으며, 다시 1987년에 복원되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을 따 호를 <율곡>으로 했으며,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름은 이,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아명은 현룡이다. 어머니 사임당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의 나이에 어머니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어머니의 산소를 지켰으며 이때 불교를 배우기도 했다.

 

 

율곡 선생은 ‘뜻이 서 있지 않고는 원하는 생을 살 수 없고,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며 살았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고 예조좌랑, 이조좌랑, 청주목사,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저서로는 『만언봉사』 『성학집요』 『시무육조』 『격몽요결』 『자경문』 『율곡전서』 등이 있다.

 

큰 변란에 대비해 군대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 배치해야한다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와 '기'라는 두 개의 축이라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 퇴계 이황과 달리 '이'와 '기'는 하나로 융합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내세웠으며 이로 인해 조선유학은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이후 영남학파는 남인으로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맞섰다. 1548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파주 자운산에 묻혔다.

 

 

오죽헌 이곳저곳을 하나라도 더 찍으려고 하는데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붓는다. 관람을 하러 들어온 학생들과 일반인들도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었다. 곳곳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정겹다. 비 오는 날의 오죽헌은 또 하나의 풍광을 보이고 있고, 나는 색다른 여행을 즐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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