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리사 은행나무가 주는 교훈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인 오산 궐리사는 오산시 궐1147에 소재한 조선 후기의 사당이다. 궐리사는 공서린(孔瑞麟) 선생의 사당으로, 원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서린 선생은 당시 뜰 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나무가 자연 고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정조대왕이 화산에서 남쪽 멀리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들므로, 괴이하게 여겨 그곳에 행차해 보니 죽었던 늙은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정조 16년인 1792년 이 곳에 사당을 짓게 하고, 이곳의 지명을 궐리로 고치게 하였다. 또한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게 하고 궐리사(闕里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궐리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수세가 당당한 궐리사 은행나무

 

무덥던 날 찾아간 궐리사.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하늘 높게 솟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볼 수있다. 보기에도 당당한 것이 나무의 생김새로 보아 수령이 꽤 되었을 것만 같다. 공서린 선생이 식재했다고 하는 이 은행나무는, 공서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 36년인 1541년에 함께 고사했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심고, 이곳에 북을 매달아 놓고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공서린 선생. 그가 죽은 후 200여년이 지나 옛 은행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일 년에 수 길씩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미 500여 년 전에 심었던 은행나무가 죽고 살기를 반복한 것이다.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은행나무

 

날이 무덥다. 잠시 나무 옆에 마련한 의자에 걸터앉는다. 땀을 닦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바람 한 점이 불어온다. 이런 바람 한 점도 고마운데, 은행나무 그늘이야 더욱 고맙지 아니한가? 잠시 은행나무의 푸른 잎들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은행나무를 보면서 인간이 참 간사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잠시의 더위를 참지 못해 나무그늘로 찾아들고, 그리고 바람 한 점과 그늘에게 다시 감사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표리부동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매사에 감사를 한 뒤에도 언젠가는 돌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은행나무보다 못한 인간들이 세상천지에 깔려 있는 모양이다.

 

요즈음 세 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서로 마주하고 웃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엔가 얼굴을 붉히고 으르렁댄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가차 없이 내민 손도 거절해버린다. 이것이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다. 주변에 들리는 이야기마다 한심한 사람들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궐리사 은행나무는 달랐다. 공사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고사했다. 말 못하는 한 그루 나무에 불과하지만, 선생에 대한 예의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후 다시 소생을 했다. 그 나무는 지금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죽고 살기를 반복했지만 나무 본연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궐리사 은행나무 옆 비문에 적혀있는 글을 읽으면서 괜히 낯이 뜨거워진다. 부끄러운 것이다. 나무보다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남을 폄훼하고 말을 만들기 전에, 먼저 궐리사 은행나무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곳에 가서 사람답게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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