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이 되면 무엇보다 바다로 피서를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 중에도 물이 깨끗하고 시원한 동해안이 가장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며,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에 소재한 최북단 화진포 해수욕장을 시작으로 동해안을 끼고 가는 곳마다 해수욕장이다. 여름철이 되면 방을 구하기조차 힘들다고 하는 동해안 고성의 해수욕장은 사람들로 넘쳐나야 하지만 워낙 뜨거운 날씨 때문인지 정작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화진포 해수욕장은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를 출발해 영동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하거나, 2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고속도로와 국도 등, 속초를 경유해 고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수원에서 어느 도로를 이용하던 간에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물론 한 여름 피서철에는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나는 여름철 고성을 갈 때는 주로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다. 여주에서 양평을 거쳐 강원도로 들어서 홍천, 인제, 원통, 진부령을 넘는다. 찾아가는 길에 절경을 만날 수도 있고 여기저기 볼 것이 많아 구경도 하고 중간에 먹을거리도 찾아보며 천천히 간다. 피서라는 것이 더위를 피하는 것인데 굳이 마음 급하게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화진포의 성 등 볼거리 많아

 

화진포를 찾아가면 주차장 안쪽 동해를 바라보는 돌로 축조한 건물이 보인다. 바로 김일성별장이라고 하는 화진포의 성이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은 김일성 일가가 이곳으로 피서를 다녀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화진포의 성은 독일건축가 H. Weber1938년에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한편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진포의 성은 1948년 이후 북한이 귀빈휴양소로 사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 등이 묵고 갔다고 하여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애초 독일의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5,25 한국전쟁 때 훼손이 된 것을 2005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는 일 년이면 적어도 5~6번 정도는 찾아가는 곳이다. 화진포 인근에 볼일이 생기기 때문에 찾아가면 일부러 화진포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도 이곳의 경치도 일품이지만 주차장 주변으로 펼쳐진 노송 숲과 화진포의 성 등 만나기 힘든 경관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인근에는 이승만의 별장과 이기붕 별장도 자리하고 있어 이곳의 경관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금구도 광개토태왕의 무덤일까?

 

화진포 해수욕장 앞쪽인 초도리 앞 500m 정도 해상에 1,000여 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농파라고 하여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화진포팔경 중 한 곳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은 이름이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였으며 즉위년에 관미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2년에는 황해도지역에 있는 백제 북쪽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하였다.

 

396년에는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404년에는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407년에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그 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하였다. 412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성문화원 향토사학자 김광섭에 의하면 고구려 연대기에 광개토태왕 3년인 3048월 경 이곳 거북섬이라는 금구도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장수왕 2) 929일 광개토태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인 금구도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태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태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화진포 앞 동해에 있는 금구도는 섬 위에 대나무가 가을이 되면 금빛을 띤다고 하여 금구도라고 한다. 금구도는 여러 문헌 기록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초도(草島)‘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초도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 중 후반 무렵에 이르러 지금의 '금구도(金龜島)'라는 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화진포 팔경을 느껴볼 수 있는 곳

 

1997년 고성군문화원에서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화진포 팔경 제1경은 원당리 마을 앞에 호수에 비친 반달 그림자와 누런 가을곡식,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월안풍림(月安楓林)'이라 했으며, 2경은 화포리 찻골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한 폭 그림 같다하여 '차동취연(次洞炊煙)'이라 했다.

 

3경은 호수 주변 모래밭에 피는 빨간색 해당화가 봄에 피는 모습이 영롱하여 '평사해당(平沙海棠)', 4경은 호수동편에 있는 장평부근에 찾아오는 많은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청명하여 '장평낙안(長坪落雁)', 5경은 화진포 앞바다에 떠있는 금구도(金龜島)의 모습이 한가로워 '금구농파(金龜弄波)', 6경은 화진포 호수의 물이 바다로 빠지면서 바닷물과 부딪치며 물길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용()이 물을 차는 듯하여 '구용치수(龜龍治水)'로 정했다.

 

7경은 풍암별장에서 보이는 돛단배가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정겨워 '풍암귀범(楓岩歸帆)'이라 했으며, 8경은 모화정리(茅花亭里:지금의 죽정1)의 호수변의 모래밭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어 '모화정각(茅花亭閣)'이라 칭하는데 조선시대의 풍류시인인 김삿갓이 화진포에 머무르는 동안 이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금구도는 신라시대 수군기지가 있었단 곳으로 밝혀졌다.

 

 

시인묵객이 사랑한 곳, 화진포

 

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위 시를 지은 채팽윤(1669(현종 10)1731(영조 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이며 자는 중기, 호는 희암, 은와이다. 현감 시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중창비와 대흥사사적비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으며,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채팽윤이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아 읊은 시이다. 화진포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 말의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 화진호(花津湖),화진포(和眞浦), 화진포(華津浦), 포진호(泡津湖)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고 한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사랑한 곳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 이곳 해수욕장에 널린 백사장을 밟아보면 밀려드는 파도로 인해 폭염의 햇볕과는 달리 동해바다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오고가는 길이 조금 버겁기는 하지만, 이 여름 화진포를 찾아가면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시원한 동해의 너른 바다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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