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기복 선생 흉상제막식 거져

 

한산 세모시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우리네 삶이 암울했던 시절에 나옴직한 소리다. 한산 세모시를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을 가잔다.

 

안성 청룡이란 서운면에 있는 고찰 청룡사를 일컫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안성 청룡이었을까? 그 곳은 예부터 남사당패들의 근거지였다. 칠사당패라고 불리던 남사당패들이 청룡사 밑에 자리를 잡고 봄이 되면 길을 떠났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돌아와 그 곳에서 한겨울 동안 기예를 익힌 후 다시 길을 떠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안성남사당패는 그 기예가 출중하기도 했지만 남사당의 원류로 알려져 있다.

 

남사당패의 시원(始原)은 신라 때부터 전해진 예인집단(藝人集團)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랑집단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조선조 말기로 보고 있다. 청룡사는 과거 살기가 암울하던 시절 많은 기예인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집단으로 취락을 이루면서 남사당패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된다. 그들이 이 곳에 거주한 것은 안성장이 가까이 있고 정월을 비롯하여 각 절기에 사찰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당놀이를 통하여 최소한의 생활대책이 되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꼭두쇠를 정점으로 뭉친 남사당패

 

남사당패의 조직을 보면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으로 4050명이 한패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기획을 맡아본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글()곰뱅이쇠다.

 

다음으로는 뜬쇠가 있다. 뜬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트장이나 수석의 역할을 한다. 뜬쇠는 14명 내외로 구성이 되며 상공운님(상쇠징수님(수징고장수님(수장고북수님(수북호적수·벅구님(소고상동무님·회덕님(선소리꾼버나쇠·얼른쇠(요술쟁이살판쇠(땅재주꾼어름산이(줄꾼덧뵈기쇠·덜미쇠 등 각 부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뜬쇠의 밑에는 몇 사람의 기능을 익힌 가열이 있으며, 밑으로 초임자인 삐리를 둔다. 저승패는 나이가 먹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꼭두쇠는 패거리에 의해 선출되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잘못이 있어 신임을 잃으면 바꾸게 된다. 협의를 통한 다수결의 방식을 통해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는 없다.

 

 

남사당패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안성지역에 전해지는 소리이다. 꼭두쇠 바우덕이(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라 전함)는 능력이 있는 꼭두쇠로 그가 이끌던 남사당패를 개다리패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꼭두쇠였던 그는 남사당패를 최고의 기예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복만이패(꼭두쇠는 안성출신 김복만)1935년 당시 가장 활발하게 한수 이북을 누빈 유랑집단이었다. 복만이패를 이은 원육덕패(여주출신)는 해체된 복만이패 사람들을 규합하였으며 1939년 멀리 북간도까지 들어가서 활동하다 해체되었다. 복만이패가 해체될 때 유일하게 안성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이원보패를 마지막으로 유랑집단으로서의 기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꼭두쇠 이원보의 맥을 이은 김기복 선생

 

8살의 어린 나이에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으로 남사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기복 선생(2015년 작고,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돌모루 출생). 마을의 두레에서도 그의 기량은 뛰어났다.

 

어려서 남사당패에 가담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학교도 늦게 졸업을 했어요. 17세가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쇠가 치고 싶어서 빈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두드려가면서 장단을 익혔죠

 

2004년 경기도의 한 일간지에 소리연재를 할 때 만나 뵌 김기복 선생은 쇠가치고 싶어 주체를 못했다고 술회하셨다.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어디서 걸립패가 떴다 하면 그 길로 집을 나서곤 했다는 것이다. 꼭두쇠의 기질을 갖고있던 선생은 안성 풍물팀을 이끌고 이승만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보다는 쇠를 치고 걸립을 다니는 일이 더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조직한 안성남사당 풍물놀이팀이 1988년에는 전주대사습에서 농악부분 최우수상을 받았고, 다음해인 1989년에는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해 선생은 남사당 풍물놀이팀 상쇠로 참가하여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결국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1997930일 안성남사당풍물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지정되자 선생은 기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2002년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 창단하여 꼭두쇠를 역임하였다. 2015820일 새벽 420분경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생은 꼭두쇠였다.

 

김기복 선생의 흉상 제막식 가져

 

23일 오후 3. 안성시 보개면에 소재한 남사당공연장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김기복 선생을 그리는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흉상을 제작하고 그 제막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는 황은성 안설시장과 이동희 전 시장, 안성시의회 권혁진 의장, 양정평 안성문화원장과 고 김기복 선생의 유족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상철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제막식은 식전행사로 김기복 선생의 제자들로 구성된 광주시립풍물단의 난타공연으로 막을 열었으며 개회선언과 내빈소개, 김기복 선생 약력과 흉상건립취지, 감사패 및 공로패 증정, 남사당보존회장의 기념사와 내빈축사, 흉상제막, 축하공연 순으로 이어졌다.

 

이날 감사패와 공로패는 황은성 안성시장, 김학용 국회의원, 권혁진 의장, 양장평 문화원장이 감사패를, 이동희 전 안성시장, 김종해 봉산탈품보존회부회장, 처음으로 안성남사당을 기록해 저서로 남긴 하주성 등이 공로패를 받았다. 김기복 선생의 미망인과 아들은 인사를 통해 아버지의 흉상을 겅립하고 이런 행사를 갖게 된 것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평생을 안성 남사당의 복원과 전승, 웃다리농악의 보존을 위해 몸바친 김기복 선생. 선생을 기리는 흉상 제막식을 갖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선생은 영원한 스승으로 남을 것이다. 늘 선생이 쇠가락을 치던 남사당공연장 한편에서 선생은 그렇게 제자들의 풍물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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