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지도 크지도 않은 산이다. 서호를 내려다보는 구릉처럼 솟아있는 산, 바로 여기산이다. 여기산(麗岐山)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04.8m의 산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세가 크지 않고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다워서 '여기산(麗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토축산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발 104.8m로부터 10m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전형적인 머리띠 모양의 테뫼식으로 성 길이는 약 453m이다.

 

여기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선사유적지가 발견이 된 곳이다. 이 여기산은 산 전체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중요한 문화재의 거점이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숭실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이곳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전기까지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낮은 산 전체가 문화재의 보고

 

여기산은 수원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다. 하지만 정문에서 방문 목적을 이야기를 하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이곳 농촌진흥청 자리에는 앞으로 수원시와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어업역사문화체험관을 조성할 것이기 때문에, 그 때는 여기산 선사유적지의 관람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입구 안내판을 보면 서호 일대 저습지대에서는 오래전부터 벼농사를 지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곳에 농촌진흥청이 자리를 했던 것도, 여기산에 우장춘 박사와 정남규 박사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여기산은 낮고 크지 않은 산이지만, 수원시의 벼농사 기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곳이다.

 

 

 

 

자연숲이 나그네를 반기는 곳

 

여기산 선사유적지 숲길로 접어들면 숲의 싱그러운 냄새가 난다. 도심에서 각종 오염원에 찌들었던 가슴속이 심호흡 한 번으로 말끔히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발밑에 밟히는 흙길의 감촉이 발바닥으로 전해진다. 숲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인적이 끊긴 곳이라, 그저 아무렇게나 풀들이 자라고 나무들이 마음대로 자라있다.

 

바람에 그런 것인지 숲길을 향해 반쯤 누워있는 나무도 있다. 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숲으로 들어가면 시원한 바람이 분다. 바람이 없다고 해도 싱그러운 나뭇잎만 만나도 시원함이 느껴진다. 조금 올라가면 우장춘 박사의 묘소가 보인다. 잠시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숲길은 좌우로 갈라진다.

 

우측 길로 접어든다. 그곳에는 그저 자연인 길이 있다. 좌측으로는 여기산의 정상부가 우측의 아래로는 서호가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삐죽이 내민다. 발밑에서 지난 해 떨어진 마른 나뭇잎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푸드덕하면서 날아간다. 조용한 숲길에 낯선 이방인이 들어 온 까닭이다.

 

 

 

 

거대한 바위에 화성 돌을 뜬 흔적이

 

길 우측 아래로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뜬 곳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본다. 바위의 크기가 엄청나다. 어른 키의 몇 배가 되는 거대한 바위에 돌을 떠내기 위한 쐐기자국이 보인다. 절개된 바위 면에 선명하게 쐐기를 박기 위해 파 놓았던 구멍이 있다.

 

큰 바위 주변에는 어지럽게 쪼개진 바위덩어리들이 굴러다닌다. 어떻게 이 큰 바위를 쪼개 화성을 쌓는 곳까지 옮겨간 것일까? 새삼 화성이라는 축조물에 대한 경외심이 인다. 2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은 강한 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이곳에서 흘렸을까? 서호의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여기산의 돌을 떠 성을 쌓았다.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조대왕의 마음이 이 곳에 있었다.

 

그 마음을 알아서일까? 더운 날씨에 흐르는 땀을 서호에서 불어 온 바람이 시원하게 해준다. 아마도 이 숲길에 어린 정조대왕의 마음이 바람이 되었을까? 괜스레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암벽을 돌아보고 위로 올라오는 길. 전문가가 아니라면 이곳이 토축산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

 

 

 

 

토축산성, 여기산에는 수원의 역사가 있다.

 

산 정상부를 싸고 있는 토축산성은 길게 아래로 뻗어있다. 아마도 방비가 허술한 산성을 견고하게 방어하기 위해 이렇게 조성을 한 것인 듯하다. 여기산은 서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의 중요 거점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주변 들판이 훤히 조망이 된다. 당연히 낮은 곳이지만 방어를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 주변으로는 물이 있어 수자원이 풍부하고 천연적인 방어를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산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는가 보다. 더구나 이곳에서 화성을 축성하기 위한 성돌을 떴다면, 여기산에는 자연적으로 적을 피해 은신할 수 있는 곳이 많았을 것이다. 그 많은 돌을 떠가고도 아직도 큰 바위가 남아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산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 숲길. 그 끄트머리 작은 바위에도 쐐기를 박았던 흔적이 있다. 숲길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길. 이곳에서 만난 정조대왕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누가 이렇게 백성을 생각했을까? 오늘 이 낮은 여기산의 숲길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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