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인돌이 있던 곳에서도 성돌을 채취했나?

 

쐐기란 커다란 바위나 돌을 쪼개기 위해 깊은 구멍을 낸 것을 말한다. 예전 화성을 축성할 때 커다란 바위를 쪼개 성돌로 이용하기 위해 바위에 줄을 지어 판 쐐기자국이 있다. 이렇게 쐐기구멍을 낸 후 그곳에 바짝 마른 밤나무와 참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놓으면 나무가 불어나면서 그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쪼개낼 수 있었다. 지금처럼 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렇게 바위를 절개해 낸 선인들의 지혜에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수원의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는 화성을 축성할 때 성돌을 조성하기 위해 큰 바위에 조성한 쐐기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든 곳에서 바위를 쪼개 화성 축성장으로 옮겨 화성을 쌓았다. 그런데 광교박물관 뒤편에 있는 고인돌을 돌아보다가 그 고인돌 한 기의 받침돌에 쐐기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광교박물관 야외 측면에는 두 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 중 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은 이의동 작은 안골 마을 논 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또 한 기는 광교박물관 주치장에서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는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쐐기자국이 선명한 고인돌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그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처럼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수원에는 팔달산에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팔달산 고인돌군과 수원박물관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금곡동 고인돌, 그리고 광교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이의동에서 옮겨온 고인돌 등이 소재하고 있다. 이 세 곳의 특징은 모두 물과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즉 청동기시대 인류의 주거지는 물이 있는 곳이었을 것이고, 고인돌도 물이 흐르는 주면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서 옮겨왔다는 지석묘의 덮개석 옆에 놓인 받침돌에 쐐기 흔적이 보인다. 이 돌이 나중에 고인돌의 형태를 조성하기 위해 딴 곳에서 가져왔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덮개석과 재질이 흡사하다는 점이다. 하기에 이 고인돌의 쐐기자국은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쐐기자국의 진위 밝혀낼 수 있을까?

 

8일 오후, 광교박물관 2층에 자리한 사운 이종학 선생의 자료를 찾아보기위해 방문한 광교박물관 야외에서 만난 고인돌. 위편에는 무수한 성혈의 흔적이 있는 이 고인돌 한 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덮개석 옆에 놓인 돌에 쐐기흔적. 이 흔적이 쐐기흔적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후일 누군가에 의해 조성이 된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그 쐐기흔적 하나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일은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고인돌 쐐기자국에 대해 질문을 해봐야 할 듯하다. 역사란 밝혀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우연히 찾아본 고인돌 쐐기자극 하나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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