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남문시장 문화의 메카로 변신하다

 

시장은 북적여야 한다. 먹을거리가 넘치고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즐거워야 시장을 찾는다. 양반들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조선조 말, 장시는 한 때 전국적으로 상당한 숫자가 개설되어 있었다. 만기요람에는 19세기 초 우리나라의 장시는 8327개 군, 현에 1,061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장시 숫자가 인구수에 비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장시가 있었던 것은, 지금처럼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근에 있는 장시를 이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임원경제지를 살펴보면 순조 30년인 1830년에는 전국에 1,052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장시가 조선조 말에 들어서는 단순히 장의 기능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조 말 장시의 형태는 금전을 이용한 거래보다는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서로 물건을 갖고나와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는 물물교환의 형태로 거래가 되었다. 이 당시의 장시에는 비슷한 처지의 민초들이 모여서 양반들을 비판하거나, 나라의 정책에 대한 불신을 토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는 전통 장시(場市)

 

양반들의 수탈과 과도한 조세 등에 불만을 품던 민초들은 이러한 불만이 쌓이다가 보면 장날과 장터가 집회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즉 장시가 장의 기능 외에도 정치적 기능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시에서는 그 기능도 다양했다. 우선 장시의 기능은 중매터이기도 했다. 서로 5일마다 한 번씩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 마을의 사람들을 소개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중매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시장은 정보통이기도 했다. 장시를 떠도는 장돌뱅이나 보부상들에 의해 팔도의 정보가 장시로 흘러들게 된다. 큰 점포를 가진 대상들이 상대적으로 정보에 밝아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전국의 장시에 자신의 사람들이 다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장시의 흐름에 빠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장시는 이제는 전통시장혹은 재래시장이라는 명칭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 전통 장시의 인심 하나는 그 어느 곳도 따를 수 없다. 그것은 오랜 세월 장시의 인심이기도 하다. 걸인들까지도 사람취급을 해주는 곳. 그것이 바로 장시였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는 전통시장의 인심이 시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자원이기도 하다.

 

 

주말마다 이어지는 남문시장의 공연 열기

 

수원남문시장은 정조대왕이 자신의 내탕금을 내주어 만든 시장이다. 현재는 수원화성 팔달문 앞의 시장 전체를 아울러 남문시장아리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9곳의 시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장이 글로벌명품시장으로 3년간 국가의 지원을 받아 활성화 사업을 펼치면서 9곳을 합해 남문시장이라 한 것이다. 이는 팔달문 앞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팔달문을 흔히 남문(南門)’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남문시장은 전국의 전통시장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특히 주말이 되면 앞 다투어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곳은 먹을거리와 볼거리, 즐길 것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15일과 16일 지동교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15일은 팔달구에서 마련한 버스킹 공연이 열리고, 16일에는 남문시장 글로벌사업단이 주말이면 계속하는 음악이 흐르는 밤공연이 열렸기 때문이다.

 

장은 흥청거려야 한다. 개장한 지 223년 쨰인 수원 남문시장은 그런 흥청거린다는 표현이 들어맞는 시장이다. 시장 통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큰 도로에는 푸드 트럭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남문시장 고객센터와 지동교 위에서는 각종 공연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이런 남문시장을 좋아한다. 찾아오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바닥이라고 하지만 그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곳, 그곳이 바로 수원남문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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