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 안점순 할머니 시민사회장 장례식 열려

 

용담 안점순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모인 300여명의 추모객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비장하다. 평생을 여자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여성인권평화운동가로 살아오시다가 33090세로 영면하신 할머니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숨소리조차 크게 나지 않는 추모제장은 그저 안타까운 사람들의 모습만 가득할 뿐이다.

 

"소중한 우리 수원시의 시민인 안점순 할머니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힘쓰셨지만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할머니를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할머니가 받지 못한 사과를 반드시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점순 할머니의 영면으로 이제 29분의 성노예 할머니들이 생존해 계실 뿐입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로 인한 할머니들의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조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가끔 목이 메는 듯하다. 이날 고 용담 안점순 할머니의 추모제는 할머니의 장례식장인 아주대 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서 거행되었으며 개회선언에 이어 묵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대표의 약력보고, 고 안점순 할머니의 추모영상, 조사(염태영 시장, 수원시의회 김진관 의장, 국회의원 김진표 의원), 정수자 시인의 추모시 등으로 이어졌다.

 

 

평화로 귀향 하소서

 

황의숙 수원평화나비 공동대표가 조사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자 누군가 황 대표는 끝까지 못 읽고 울 것이라고 한다. 황의숙 대표는 울지 않겠다고 했지만 끝내 목이 메는 듯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추모제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은 듯 사람들의 입에서 가는 숨을 토해내고 있다.

 

평화로 귀향 하소서

입이 없는 듯 귀가 없는 듯 혼자 떨며 지내오다

이제 더는 못 참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석순희라는 이름으로 실은 안점순 님의 이름 석 자 새로 받은 양 힘주어 펼쳐들고

무덤까지 잠그려던 입술을 뜨겁게 뜨겁게...

 

정수자 시인의 추모시 평화로 귀향 하소서를 낭송할 때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듣고 있다. 간간히 운이 끊어지는 추모시가 오히려 더 가슴을 싸하게 만든다. 수원시민사회장례위원회 이성호 집행위원장은 추모제가 처음이라 진행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했지만 추모제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고 용담 안점순 할머니의 일생을 되새기면서 슬픔을 달래고 있다.

 

 

이제 모든 슬픔 내려놓고 영면하소서

 

용담 안점순 할머니는 1928년 서울 마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복사골 동네에서 태어났다. 14세가 되던 1941년 서울 마포구 복사골에서 어머니가 보는 가운데 일본군에게 끌려 내몽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일본군성노예 생활을 시작했다. 18세인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이 되자 8개월간 북경에서 체류하다 다음 해 천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23세가 되던 1950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을 내려갔으며 65세기 되던 1992년 수원에 정착했다. 다음해인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한 후 2014년부터 수원평화나비 여성인권평화활동가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시다가 33090세로 영면에 드셨다.

 

 

지난해 12월 고 용담 안점순 할머니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청춘은 돌아올 수 없다. 피해자들 곁에 와서 말 한마디라도 하는 게 원칙 아니냐. 이제라도 사죄 한마디 하면 다 끝날 일이다"라며 일본 정부의 사과를 거듭 요구했다.

 

슬픔과 고통을 정의로 승화시키고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 채 떠나신 고 안점순 할머니. “다시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보고 싶어요라는 생전에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힌다. 얼마나 그 말속에 진한 아픔이 있는 것일까? 이제라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한 영연에 드시기를 두 손 모아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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