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어머니의 정성에 감복을 하였으면, 직접 탑을 조성하고 스스로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조성하였을까?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있는 ‘효대’는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조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인해 효를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보 제35호인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화엄사에 조성한 것으로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를 봉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사자 삼충석탑은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화엄사 서북쪽의 제일 높은 대지에 조성을 했으며 이 석탑이 있는 효대에는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형상이라는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다. 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신라 최고의 걸작품 3층 석탑

2단으로 꾸며진 기단의 아래층에는 각 면에는 천인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의 천인상이 새겨져 있으며,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공양물을 들고 있다. 이 기단석만으로도 뛰어난 걸작품이다. 그 위에는 사방에 암수 사자가 입을 벌리고 밖을 향해 앉아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자들에 둘러싸인 스님의 입상이 서 있다. 이 스님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형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 앞에 석등을 머리에 이고 한 무릎을 세워 앉아있는 공양상은, 손이 공양물을 받쳐 들고 있다. 연기조사 스스로가 어머니를 위한 공양을 올리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하며, 공양물은 차로 어머니에게 향한 연기조사의 효심을 알아볼 수 있는 조각상이다. 이 두 가지의 조각품을 합해 사사자 삼층석탐이라 하며, 국보 제20호인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룬다고 한다.





조각예술의 극치라는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

3층의 몸돌에도 뛰어난 조각이

3층으로 구성된 몸돌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조각했다. 사면에 각각 조각을 한 상들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5단씩의 받침으로 평평하게 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만 살짝 치켜올려 여유로움을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과 엎어놓은 그릇과 같은 복발만이 남아있다.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몸돌의 위에 올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엄사를 찾아갈 때마다 오르는 효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지난 날 어머니께 효도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 효대를 찾아 무릎을 꿇을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차라리 이 잎 석등 안에 쪼그리고 앉은 연기조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삼층석탑의 석탑부와(위) 석탑 앞 석등의 공양상(가운데) 공양상은 연기조사 본인이라고 전한다(아래)
 
전국을 다니면서 수 없이 많은 석조물들을 보아왔지만, 이 효대에서 만나는 사사자 삼층석탑은 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다. 공양상인 석등 뒤편에 마련한 자리에서 고개를 떨어트리고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대단한 조각품을 조성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 옛날 손으로 일일이 돌을 다듬어 만든 사사자 삼충석탑. 기단부에 돋을 새김한 비천상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고, 1층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들은 바로 문을 열고 박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다. 넋을 뺐기고 보고 있는데 저녁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보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동행한 일행의 재촉하는 소리에 석탑을 뒤로하고 떠나면서도, 마음은 그곳에 두었나보다. 조금이라도 그 모습을 더 보려는 안타까움에.

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 배례석 하나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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