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반가운 사람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은 나이가 먹어 세상을 하직할 때가 되면 고향을 그린다고 한다. 고향을 그리는 것은 그곳이 바로 자신이 태어나고 조상 대대로 살던 뿌리가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26일 오후 6. 서울시 서초구 사평대로 160에 소재한 쉐라톤 서울팔레스 강남호텔 1층 로얄볼륨을 찾아갔다. 때 아닌 고문으로 추대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고문이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35년 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날 이곳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십이체장고춤보존회(이사장 한혜경) 자축연 및 출범식이 열렸다. 그 십이체장고춤보존회 출범식에 고문으로 추대가 되었으니 꼭 참석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월요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바쁜 날이다. 망설이다가 서울로 향했다. 비가 오는 길을 나선다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약속을 했으니 어찌할 것인가?

 

행사장에는 원탁테이블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다 식이 시작한지가 30여분이 지났기 때문에 한창 축사가 이어지고 있다. 십이체장고춤보존회 한혜경 이사장을 만난 것은 꽤 시간이 흘렀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 2017322일자로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공식적인 시단법인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장고춤의 원류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 전국을 헤매

 

장고춤보존회가 처음으로 발족을 하고 연수회를 시작할 때부터 인연이 되었다. 그 후 한헤경 이사장의 장고춤의 원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함께 거들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참으로 길고도 지루한 여행이었다. 오랜 시간을 전국을 답사하면서 그 원류를 찾아나섰기 때문이다.

 

장고춤을 우리는 농악에서 파생한 춤이나 신무용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장고춤은 불교 각종 미술작품에 나타나고 있어 이미 신라 때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농악에서 파생한 춤으로 보기보다 불교의식 무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불교미술에서 장고를 이용한 춤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석탑이나 부도탑 등의 비천인이 연주를 하는 모습에서,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비천인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비천인상 중에,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이 있다. 아마 이 때는 장고가 춤이 아닌 단순한 악기였을지도 모른다. 그 뒤에 나타난 보물 제85호 강릉 굴산사지 승탑에도 연화대 위에 앉아 장고를 치는 비천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 굴산사지 승탑은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비천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고를 비롯해 훈, 동발, 비파, , 생황, 공후, 적 등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비천인상이나 고분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장고춤의 형태를 보면 이미 고려조부터 장고춤은 완전한 춤의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장고춤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사찰의 벽화가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에 그려져 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송광사의 대웅전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인 1857년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 상단 내벽에 보면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비천인상에는 무당춤을 비롯해, 장고춤, 북춤, 승무, 바라춤 등의 그림이 보인다. 이 모든 춤들은 당시에 추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단순히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속화된 풍물을 그린다는 점으로 볼 때, 고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난 장고춤은 조선조에 들어서 상당히 격화되고 빠른 동작을 필요로 하는 경쾌한 춤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작은 소장고를 이용해 춤을 추면서 군관모자와 같은 관을 썼다. 화려한 장식에 힘이 있는 모습의 장고춤을 역동적으로 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고춤의 역사를 찾기 위해 많은 날들을 전국을 누볐다. 그 뿌리를 찾기 위함이다.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한 것이 바로 한혜경 이사장이다. 그런 연유로 인연이 되 보존회의 고문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5세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한 한 이사장은 구한말 대정권번의 명무 김취홍으로부터 전승된 한혜경류십이체장고춤 보존 전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결실을 맺는 자리가 바로 시단법인 출범식 및 자축연인 셈이다.

 

반가운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

 

국립국악원 경연대회, 동아음악콩클,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대한민국 무용제, 인천시립무용단 창단공연 등 작곡과 무용음악을 창작하면서 관계를 맺은 부문들이다. 그리고 1982년 인천시립무용단의 창단공연작인 굴레야·굴레야라는 작품의 곡을 쓰고 무용음악작곡과 관계되는 모든 일을 접었다.

 

그렇게 35년이란 세월을 작곡이나 음악과는 담을 쌓고 산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우연히 지난 5월 팔달문시장 다문화가요제의 심사를 맡아본 후, 다시 한국십이체장고춤보존회의 고문으로 추대가 되었다. 이 나이가 먹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여우가 자신의 굴을 항해 고개를 향하듯 그렇게 음악과 다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일까? 당분간은 혼란스럽겠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35년 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수구초심이란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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