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우두산 일대와 주암리 뒷산인 옥녀봉. 그리고 서원리 뒷산을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은 굴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상교리 뒷산인 우두산에 만도 어림잡아 40~50여개는 넘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굴은 자연적인 굴이 아니다. 모두가 일제에 의해서 파여진 인공적인 굴이다. 굴 중에는 군인들에 의해서 군 작전상 막아놓은 것들도 있다.


굴은 대개 땅을 아래로 파 들어가 그곳부터 옆으로 굴착한 것들이 있고, 처음부터 암벽을 평행으로 파 들어간 것 등 다양하다. 이 굴들은 주변에 바위를 뚫고 들어간 것인데, 깊은 것은 수 십 미터에 이르는 것들도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많은 굴들을 이곳 여주군 북내면 일대 산에 뚫어놓은 것일까?


금광채취를 위해 뚫어놓은 굴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즘골 뒤 우두산.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금광이 있었다 

다음지도에서 본 금광굴이 집단으로 있는 위치

옥녀봉 방향 뒷산은 눈이 많이 쌓여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할 수없이 북내면 상교리 ‘즘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즘골이란 예전에 가마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눈길은 아무래도 위험할 듯 해, 카메라를 소지하고 오르기를 포기했다. 우두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쌓여있는 낙엽과 녹지 않은 눈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엔 새들이 앉아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시끄럽다. 눈이 녹은 나무 밑에는 한겨울을 보낸 영지버섯 하나가 추위에 떨고 있다. 생명의 끈질김을 본다. 눈길에는 고라니를 비롯한 짐승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있다. 낮에도 사람의 발길에 놀란 고라니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으로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산 중에 축대를 쌓은 듯한 돌담들이 보인다. 잘 다듬어진 돌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 집이라도 있었는가 보다.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서 파 놓은 굴 옆에는, 지금도 알아볼 수 있는 축대가 있다. 금광을 채굴하던 사람들이 묵었던 막사를 지었던 곳이었나 보다.



산으로 오르다가 보면 집터인 듯한 곳이 보인다. 주추돌인 듯한 돌들과 축대가 있다.

한 때는 60호가 넘는 집들이 있던 곳


즘골의 뒤편에 있는 우두산은 ‘소머리산’이다. 이 즘골로 들어가는 곳에는 유난히 소를 키우는 목장이 많다. 현재 즘골에는 16호 정도의 집들이 있다. 하지만 금광을 한창 채굴 할 당시에는 60여 호나 되는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산에서 캔 광석을 잘게 부수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 와서 채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 우두산은 산세가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이 산은 명산이라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우두산은 가히 인재를 키워낼 만한 산이었기에, 인근에 ‘고달사지’가 자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우두산이 일제강점기에 무수히 파 놓은 굴로 인해, 그 명산의 혈이 모두 끊겨버렸단다. 그래서 즘골에는 인재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금광굴의 흔적. 이 사진들은 모두 핸드폰으로 촬영하였다.

가시지 않는 상처


산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본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무수히 많은 굴들이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금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도 한다. 산 중에 축대를 쌓고 관리를 하는 집까지 지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상당한 금이 묻혀있었던 것 같다. 산 위에도 여기저기 예전 집터가 보인다.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와 재화를 찬탈해간 일제. 그런 점도 마음이 아픈데 이런 흔적들이 전국에 수도 없이 널려있는 것을 보아야 하다니. 언제나 이 아픔이 그치려는지 모르겠다. 마을의 어르신들조차도 “죽어도 그 원수는 갚아야 혀. 너무 많이 고통을 받았어. 우리 민족들이” 라고 분노를 표한다. 산을 내려오는데 철모르는 딱따구리 한 마리가, 가지만 남은 오동나무가지를 쪼아댄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난 야생동물이 지나다닌 흔적과 영지버섯

고사로다 고사로다 고사덕담을 들어보소(중략)

천지간 가져갈 때 하늘 열려 땅 생기니

일월성신 갖추었구나

만물이 생겨나고 모든 생명 피어날 때

하늘에 명을 얻어 우리조상이 생겼구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김혜란 창)


천지현황 조판 후에 혼돈세계 길탄말가

일대국이 건설되고 건부곤모 가결하니

음과 양의 조화로다. 태양태음이 일월이요

산수조공을 살펴보니 인황씨가 조종이라

학을 눌러 대궐 짓고 대궐 앞에는 육조로다

육조 앞에는 오영문, 오영문 앞에는 삼각산인데

각도 각읍을 마련할 제 인왕산이 주산이요 종남산은 안산이라

(가장 보편적인 고사덕담의 사설)



‘고사덕담’이 있다. 말 그대로 고사를 드리면서 덕담을 하는 것이다. 고사덕담은 대개 정초에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신밟기를 할 때, 마을의 풍물패 중에서 소리를 잘하는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는 한다.


말 그대로 일 년의 평안을 축원하다.


고사덕담을 정월에 하는 이유는, 이렇게 정월에 덕담을 들어야 그 해가 평안하다는 속설 때문이다. 고사덕담을 할 때는 북이 옆에서 장단을 넣어준다. 고사덕담은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처음에는 그 가정이 생긴 내력부터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손축원과 액을 막아주는 달거리인 홍수맥이를 한 후, 풍년을 축원하는 농사풀이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고사덕담을 할 때는 집집마다 대청에 고사상을 차린다. 고사상은 소반에 쌀말이나 함지박에 쌀을 가득 담고, 그 위에 촛불을 켠다. 북어를 한 마리 꽂은 후 실타래를 걸쳐놓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루떡을 해 같이 올리기도 한다. 이때 올려지는 쌀은 모두 풍물패들이 가져간다. 주인은 특별히 풍물패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해주기도 한다.


쌀을 올려놓는 것은 집안의 풍요와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며, 북어는 만복을 기원한다. 실타래는 자손들이 수명장수 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시루떡은 축귀를 의미한다. 이렇듯 그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풍물패들은 고사덕담을 하면서 그 집안의 평안과 풍농, 그리고 자손창성을 기원한다.


이댁 가중 전에 어린 아기씨

날이면 물이 맑고 밤이 되면 불이 밝아

부귀공명 발원이요. 자손창성 축원이라

부모님께는 효자동이 형제간에는 우애동이

친척 간에는 화목동이 이웃 간에는 귀염둥이



서로에게 나누어 주는 덕담


그렇게 준비를 한 음식과 술은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쌀과 축원에서 나온 돈은 마을을 위하여 사용을 한다. 고사덕담 안에는 마을 전체가 함께 잘 되기를 바라는 공동체가 있다. 누구나 함께 한다는 공동체 속에, 무엇 하나라도 나눈다는 ‘우리‘가 있는 것이다.


고사덕담은 애가 복을 갖는 것이 아니다. 마을 집집마다 고루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심성이다. 이런 우리의 전통적인 정초 문화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이기주의와 물질숭배주의가 팽배해 있다. 본연의 우리모습을 잃은 것이다. 올 신묘년 한 해 모든 가정에 고사덕담을 축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본질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우리나라의 민속은 정월에 중점적으로 연희가 된다. 이렇게 모든 기원성 민속이 정월에 몰리는 것은, 일 년을 시작함에 있어서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 등을 얻기 위한 뜻이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난 뒤, 초이틀은 ‘귀신 날’이라고 하여서 문밖출입을 삼가고 집안에서 근신을 한다.  

초사흘서 부터는 하늘에서 ‘평신’이 내려오는 날이라고 하여서, 마을의 풍장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그렇게 지신밟기를 하는 풍장패들이 길에서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싸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정월 열나흘날 밤에는 횃불싸움, 석전, 줄다리기 등이 이웃마을과 벌어진다. 또한 달이 뜨기를 기다려 달집태우기를 한다. 이렇듯 정월 초사흘부터 시작하는 놀이는 정월 열나흘에 정점에 오른다.

풍농을 유도하는 의식인 볏가리 대 세우기

논 가운에 세우는 볏가리 대

정월 열나흘날 낮이 되면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신밟기를 마친 마을의 풍장패가, 먼저 대동우물에 찾아가 우물고사를 드린다. 그 사이 마을 사람들은 널따란 논 한 복판에 높이 짚으로 감싼 대를 세운다. 그 대의 끝에서 논바닥까지 짚으로 엮은 줄을, 세 갈래나 다섯 갈래를 늘인다. 그리고 그 갈래가 진 줄에는 벼, 기장, 수수, 콩 등 오곡을 봉지에 넣어서 매달아 놓는다.

마을마다 이 볏가리 대를 만드는 방법은 약간씩 다르다. 그렇게 줄을 늘여놓은 다음, 볏가리 대 밑에는 쌀가마를 갖다가 놓는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제상을 준비하고, 마을에서 선정된 제관이 제를 지낸다. 정월 열나흘날의 볏가리 대를 세우는 의식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음력 2월 초하루가 되기를 기다린다.

영등 날에 내려 풍농을 기원하다

음력 14일에 세운 볏가리 대는 음력 2월 초하루에 내린다. 2월 초하루는 영등할미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날이라고 한다. 이날 바람이 많이 불면 그 해는 가뭄이 든다고도 한다. 이날 마을 주민들은 모두 볏가리 대 주변으로 모여, 볏가리 대 주위를 돌면서 풍장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춘다.

그런 다음에는 제상을 차리고 제를 올린다음, 볏가리 대를 내린다. 주머니 안에 있는 곡식을 꺼내 싹이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고, 그 해의 풍농을 점치기도 한다. 내린 볏가리 대에서 떼어낸 주머니는 ‘천석이요, 만석이요’라고 외치면서 가마니 안에 집어넣는다. 이런 행위는 모두 천석만석의 소출을 내게 해달라는 기원이다.  

2005, 2, 9 한국민속촌

태안군 이원면 관리에서는 마을에 있는 무속인이, 볏가리 대를 세우는 날 우물에 가서 축원을 한다. 그리고 대나무에 한지를 오려 붙인 신장대를 마을주민이 잡으면 경을 읽는다. 신장대는 마을 돌아다니면서 마을에 있는 사악한 귀신들을 쫒아낸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정월의 민속은 기원성을 띠고 있다

‘가리’란 단으로 묶은 장작이나 볏섬 등을 차곡차곡 쌓은 것을 말한다. 또한 곡식이나 장작 따위를 세는 단위이기도 하다. 한 가리는 스무 단을 말하는데, 볏가리 대란 이렇게 곡식을 쌓아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정월에 연희가 되는 민속은 대개가 기원적 성격을 띤다. 줄다리기, 장치기, 볏가리 대 세우기 등 이 모든 것은 다 풍농을 얻기 위한 방법이다.

한국인의 생활에서는 풍농이나 풍어, 혹은 마을과 가내의 평안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년이 들어서 모든 식솔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런 사고가 이렇게 다양한 정월의 놀이문화를 창출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도 농촌에서는 그러한 마음속의 바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부엌은 음식을 만드는 곳이고, 부엌이라는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은 집안의 주부가 된다. 부엌에는 ‘조왕신’이 좌정을 하고 있다는 곳이다. 조왕신은 ‘불의 신’이다. 이는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할 때, 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집안의 난방을 위해서도 불을 땐다. 그런 점으로 조왕신을 불의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들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방으로 간다. 이는 밖에서 혹시 나쁜 것이라도 따라왔으며, 모두 태운 후에 집안에 들어간다는 속설 때문이다. 이렇듯 조왕은 집안에 드는 모든 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하기에 부엌 안에서는 나름대로 조심하는 행동들이 있기도 하다.


부뚜막에 앉으면 경친다.

어릴 적에는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꽤나 좋아했다. 부엌에 들어가면 우선은 따듯한 점도 있겠으나, 딴 형제들보다 먹을 것을 먼저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엌에 들어가면 부뚜막이 그렇게 따듯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얼른 부뚜막에 올라가 앉는다. 그러다가 바로 경을 치기 일쑤다. “부뚜막에 올라앉으면 조왕할머니한테 경친다.”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다. 부엌에는 조왕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계시다는 것이다.

아마도 할아버지이기 보다는 할머니가 맞을 것 같다. 부엌에서 주로 생활을 하는 것이 집안의 여성들이고 보면, 할머니라야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조왕신이 좌정을 하고 있는 곳이, 부엌의 선반 위나 부뚜막이 되는 것이다. 하기에 부뚜막에 올라앉으면, 조왕신의 자리에 엉덩이를 들이 민 것이나 경을 칠 수밖에.

부엌에 있는 조왕단지. 안에는 쌀을 넣어 놓는다.

다양한 형태의 조왕신의 신표

부엌에 모시는 조왕신의 신표는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 대개는 조왕단지리고 해서 항아리를 부엌 한편에 두고, 그 안에 쌀을 넣어놓기도 한다. 이는 부엌은 집안에 음식을 장만하는 곳이기 때문에, 집안 식구들의 재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즉 먹을 것이 항상 넘치게 해 달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또한 집안사람 중에 먼 길을 떠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밥그릇에 밥을 담아 부뚜막에 올려놓는다, 이는 항상 따듯하고 굶지 말라는 뜻이다. 부엌의 부뚜막은 따듯한 기운이 있기 때문에, 춥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또한 밥그릇에 밥을 떠서 부뚜막에 놓는 이유도, 식은 밥을 먹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중부지방에서는 대개 그릇에 정화수를 한 그릇 떠서 부뚜막에 올려놓는다. 이 정화수는 매일 아침 주부가 제일먼저 갈아 놓는다. 이렇게 물을 놓는 이유는 정성이기도 하지만, 불을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화재를 막는다는 뜻도 포함이 되어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대나무 가지를 꺾어 병에 꽂아놓기도 한다. 대나무 잎은 늘 푸른 것이기 때문에, 항상 집안이 그렇게 변함없이 먹을 것이 넘쳐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렇듯 조왕은 우리네 실생활에서 불의 신이면서도 재액을 막아주고, 집안을 배부르게 하는 직능을 갖고 있다.

조왕신에게 치성을 드리기 위한 고사상
 
집안에서 가장 소탈한 조왕신

사실 집안에 있다는 많은 가신(家神) 중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조왕신이다. 물론 그 신을 섬기는 주제가 집안의 주부이기는 하지만, 가장 많이 드나들게 되는 곳이 바로 부엌이다. 비록 주부만이 아니고 집안 식구 역시 부엌만큼 자주 드나드는 곳은 많지가 않다. 물을 한 그릇 먹으려고 해도 부엌 안에 있는 물독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아파트로 보더라도 물과 같은 것은 주방에 있는 냉장고를 이용한다. 그 주방이라는 곳이 바로 예전 우리 가옥의 부엌에 해당하는 곳이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조왕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소중한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출입이 빈번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조왕신은 그렇게 표시가 나게 섬기지를 않는다. 그저 정화수 한 그릇에도 만족해하기 때문이다. 섣달그믐에 그릇에 쌀을 담고, 그 앞에서 주부기 비손을 한다. 집안에 모든 식솔의 허기를 채워주고, 집안에 드는 나쁜 액을 막아달라고. 그렇기에 조왕신은 아무리 사는 곳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도, 언제나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신격으로 남아있다.


절구는 곡식을 찧는 농기구의 일종이다. 절구 외에도 곡식을 찧는 기구는 방아가 있다. 방아는 연자방아, 통방아, 물레방아 등이 있다. 그 모습들은 저마다 다르고, 이용하는 방법도 다 다르다. 그러나 절구는 쇠절구, 돌절구, 나무절구로 구분을 하지만, 그 형태나 사용하는 방법은 같다.

사실 절구만큼 우리네 실생활과 밀접한 농기구도 그리 흔하지 않다. 절구는 곡식을 찧는 외에도 콩을 삶아 찧어서 메주를 만들거나, 그 외에 여러 가지 식물을 찧을 때도 사용을 했다. 그런 절구통은 예전에는 집집마다 한 두 개씩은 다 있었다. 이 절구를 요즈음은 인테리어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과거의 절구는 여인들과 가장 가깝게 실생활에 사용이 된 농기구 중 하나이다.


성을 기억해 낼 듯한 우리의 절구


흔히 우리는 나이 먹고 뚱뚱한 사람을 비유할 때 ‘절구통’이라고 표현을 한다. 절구 중에는 ‘통절구’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위아래가 굴곡이 없이 밋밋하게 만들어진 절구를 말한다. 아마도 그런 통절구라면 이런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통절구는 대개 나무절구로, 둥근 나무를 중앙을 둥글고 깊게 파들어 간다.

돌절구나 쇠절구는 아래받침 부분을 잘록하게 만들어, 유한 선을 만들어 낸다. 이 절구는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절구질을 할 때 필요한 홍두깨인 ‘절구공이’이다. 이 절구공이를 갖고 절구통 안에 있는 곡식을 찧으면, 껍질이 벗겨지게 되는 것이다. 절구질을 할 때는 혼자하면 ‘외절구’요, 둘이하면 ‘쌍절구’ 혹은 '맞절구'라고 부른다.


은밀한 성을 노래하는 절구질

사람들은 왜 절구질을 하면서 ‘방아타령’이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방아타령이라는 것이 정말로 방아를 찧으면서 하는 소리이기보다는, 절구질을 하면서 하는 소리이다. 즉 남녀 간의 ‘성(性)’을 표현하는 것인데, 절구질을 하면서 이런 소리를 한다.

쿵덕쿵 쿵덕쿵 찧는 방아 이방아가 뉘방아냐
건너 마을 김서방네 벼를 찧는 방아로다
건너 마을 김서방은 밤이 새도록 찧는다는데
우리네 서방은 어쩌자고 초저녁잠만 늘어가나
 

저기 가는 저 할머니 딸이나 있으면 사위삼소
딸이야 있지마는 나이 어려서 못 삼겠네
아이고어머니 그 말씀마소
참새는 작아도 알만 잘 낳고
제비는 작아도 강남을 가오
고추가 작아도 씨가 많고
가재는 작어도 돌팍만 인다오


민초들의 작업요에는 성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네 소리는 특별한 양식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일을 하면서 힘든 노동을 잊기 위해 부르는 소리이다. 하기에 이 '방아타령‘이라고 하는 사설은, 방아타령과 여타의 노동요 사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저 힘든 절구질을 하면서, 그 힘든 작업에서 오는 고통을 잊기 위한 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그 소리 안에는 성(性)이 있다. 이웃집 남정네는 밤새 방아를 찧는다고 표현한 것이나, 우리 집 서방은 초저녁잠이 많다는 것은 모두 성을 빗댄 표현이다.

뒤이어 나타나는 사설도 마찬가지이다. 나이가 어린 소녀가 아마 시집이라도 가고 싶었는지, 아니면 평소 흠모하는 사내가 있어 마음이 들뜬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니 세상에 작은 것들을 들먹이며, 자신은 능히 성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빗대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곡식을 찧는 기구인 절구. 그저 단순히 농기구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노동을 해야 하는 농기구를 이용해, 우리네 여인들은 많은 소리를 창출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은연중 남녀 간의 성을 빗댄 소리로 전해졌다. 그것은 우리 민초들의 소리문화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것 하나를 갖고도,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네의 풍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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