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은 서두르지 않는 기다림에 있다
깊은 기억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모노톤의 색조와 긁고, 쌓는 반복적인 작업과정을 통해서
마음에 새겨진 이미지를 표현하려 한다.

2월 27일 오후, 어느 화가의 작업실 앞에 붙여진 문구이다. 수원시 팔달구 화성 행궁 인근에는, 화성 행궁을 한편으로 비켜 서 있는 낡은 건물 한 채가 있다. 벽에는 온통 칠을 해 놓은 듯하다. 이 건물은 레시던시 입주작가들이 들어 와 작업을 하는 곳이다. 건물 안에는 극단을 비롯하여 총 24개 팀이 들어와 있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방법

건물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 한편에 ‘초이(草而)’라는 작가의 경력이 보인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과 졸업, 개인전 5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국내, 외 단체전 40회 이상, 현재 한국미술협회, 전업작가협회 회원, 행궁동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 중이다.

최경자(여, 54세)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29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잠시 쉰 것을 제하면, 한 번도 그림과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그림이 그녀의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습관적으로 숨을 쉬고 밥을 먹으며, 잠을 자는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한단다.


이곳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곳 레시던시 입주 작가들을 보는 주민들의 시각이 많이 달라졌죠.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들을 바라보듯 했었는데, 그동안 주민들과 많은 소통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주민들도 이 오래된 건물 안에서 적업을 하는 작가들을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그야말로 그림을 그리면서 인생을 즐긴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 중 90%는 그림을 대하는 시간이고, 남은 10%만이 남들과 같은 일상이라는 것이다.


열정으로 그리는 그림

스스로의 그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제 그림은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 속에서 생동하는 기운을 그림에 담아내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기(氣)’라고 하는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려고 합니다. 기운이 생동해야 사람이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늘 만족하지는 못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만족을 하면 늙은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언제나 조금은 부족한 듯한 생각에서 더 한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다가 힘들고 좌절이 올 때는 시장을 간단다. 그 안에서 만나는 시끄러움과 같은 것들에서 기운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씩 조금은 멈추었다 싶으면, 밖으로 나가 새 기운을 얻어 작업에 임한다는 것.


작가에게 그림을 잘 보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특별히 그림을 잘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저 본인이 그림을 즐길 수만 있다면 된다는 것. 즐긴다는 것은 그림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한단다. 조금은 낡고,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나는 작업실. 커피 한 잔의 향이 온 방안에 가득 찬다.

인생이라는 여정을 그림을 그리듯 그려갈 수만 있었다면, 아마도 정말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을 것만 같은 최경자 작가. 49살이라는 나이에 대학원을 진학한 것도, 그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간다. 그래서 벽에 걸린 작품들에서 또 다른 생동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나 아닌지.

 윤한흠 옛 수원화성 그림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여우가 죽을 때는 자신이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수원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면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고향의 옛 모습을 기억해내는 그림전이 열렸다.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월 23일 오후 2시 30분에 개막식을 가진, ‘윤한흠 옛 수원화성 그림전 - 용(龍)을 품은 도시 수원화성’전이 바로 그것이다. 4월 1일까지 열리는 그림전을 돌아보았다.

윤한흠 선생이 그린 화성 종로

90세의 노 화백 윤한흠 옹의 고향

그림전을 연 화가는 윤한흠 선생이시다. 1923년 수원시 남창동에서 태어나셨으니 올해 90이시다. 선생은 수원과 화성의 아름다움을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 선생 스스로의 기억과 토박이 어르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원화성의 옛 모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생은 1938년 현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화성학원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조국의 광복이 되던 1945년에 귀국하셨다.


귀국 후에는 수원역 앞에서 양화점을 경영하였으며, 1957년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앞 영동시장에서 식품점인 천덕상회를 경영하였다. 1981년부터는 종로사거리에서 화홍예식장을 운영하셨다.

선생이 수원화성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50대 중반인 1977년부터라고 한다. 그림들은 1980년까지 그렸으며, 이 그림들을 수원시에 기증하였다.



개막식 광경

옛 감성을 그대로 살려낸 그림


기획전시실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보면 ‘푸르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시작품마다 숲이 표현되어 있다. 그냥 숲이 아니라 용트림을 하고 올라가는 울창한 소나무들을 표현했다. 정조 이산을 화성 곳곳에 솔씨를 뿌렸다. 자그마치 이만 섬이나 되는 솔씨를 뿌렸다고 한다.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방문하는 길에도 소나무를 심었다.

그것은 정조의 푸른 꿈이었다. 선생의 그림 속에는 그런 정조의 뜻이 담겨져 있다. 전문적인 회화 교육을 받지도 않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는 정조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푸른 화성, 그리고 감성에 배어있는 그림들. 그 안에는 옛 풍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만큼 고심을 한 흔적들이 보인다.



위로부터 영화정과 만석거, 매향교, 세류동 서낭

변해버린 세상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어

윤한흠 선생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급격하게 변해버린 도시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옛 수원화성의 모습들 속에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옛 기억을 되살려 낼 수가 있다. 일일이 어릴 적 기억과,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2월 23일 오후 2시 30분 개막식에는, 윤한흠 선생을 비롯하여 강장봉 수원시의회 의장, 이달호 화성박물관장 등이 참석을 했다.



위는 거북산, 아래는 창룡문 주변

동춘서커스단, 유일하게 남아있는 70년 전통의 서커스단이다. 1925년 조선인 박동춘은 일본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다 마침내 30여명의 조선 사람들을 모아 '동춘서커스단'을 창단하였다. 1927년 전남 목포시 호남동에서 첫무대를 올린 동춘서커스단은 그 뒤 수많은 공연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960~1970년대는 동춘 소속 단원들만 2백 50명이 넘을 정도로 서커스가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이때 박 단장과 무대에 섰던 이들로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씨 외에 가수 정훈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스타가 배출됐다.


한 때 해체의 위기까지 맞이했던 동춘서커스단은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정성으로, 다시 무대를 열었으며 진주 '개천 예술제', 진해 '군항제', 밀양 '아랑제', 강릉 '단오제', 경주 '신라문화제', 공주 '문화제', 충무'한산제', 등이 열릴 때마다 감초처럼 빠짐없이 찾아다니고 있다. 2년을 주기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공연을 하고 있는 동춘 서커스단이 포천시 소흘읍 대보름 축제에 찾아들었다.

그 공연 중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40개의 훌라후프를 갖고 하는 묘기였다. 색색의 훌라후프와 여체가 하나로 되면서, 표현해 내는 아름다움. 마치 훌라후프가 몸에 붙은 듯 신체의 각 부분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훌라후프를 돌려대는 모양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이다. 40개의 훌라후프로 표현하는 아름다움,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동춘의 훌라후프 묘기를 소개한다.











수원시립교향악단 신임악장 한경진.

“음악은 나에게는 인생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음악과 나는 별개로 떼어놓고는 생각을 할 수가 없죠.”

우리나이로 33세. 많지 않은 나이에 수원시림교향악단의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한경진. 2월 2일(목) 오전,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연습실에서 만나보았다.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들의 영향을 받아 접하게 된 바이올린이 인생의 반려자가 된 셈이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잡아

“부모님들이 모두 바이올린을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음악과 접하게 되면서, 스스럼없이 바이올린을 선택하게 되었죠.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크지 않은 병원이지만, 그곳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피아노도 없는 작은 병원의 무대이긴 했지만, 아마도 그런 연주를 통해 사람들에게 들은 칭찬이 오늘을 있게 한 듯합니다. 그 때 사람들이 ‘정말 잘한다.’, ‘감동을 받았다’ 혹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음악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춘기에도 방황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말 잠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외에는 음악과 함께 생활을 했다.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영재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독일의 베를린 국립음대, 라이프치히음대를 졸업하였다.

“독일로 건너가 바로 몸이 상당히 안 좋았어요. 그래서 한 일 년 정도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죠.”

어릴 적부터 영재로 소문이 나

한경진은 어릴 적부터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7세 때 월간음악콩클을 비롯하여, 일본 시모노세키콩클, Nuri 바이올린 국제콩쿨, 세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부산음악콩클, KBS신인음악콩클 등을 석권하였다. 젊은 음악도의 등용문이라는 동아음악콩클까지, 이렇다 할 모든 음악콩클에서 수상을 하였다.

그녀는 9세 때 서울시향과의 협연으로 음악계에 데뷔하였으며, 그 후 KBS교향악단, 수원시향,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 부산시향, KNUA 오케스트라등과 협연하며 가는 곳마다 이슈가 되곤 하였다.

한국 최고의 명교수 김남윤의 지도하에 예원학교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입학 및 예술사를 졸업한 그녀는, 독일 베를린국립음대(HDK) Diplom 취득(최우수졸업), 라이프치히국립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을 교수 만장일치 만점 졸업하였으며, Meisterklassenexamen 을 전액 장학생으로 최우수 졸업을 하였다.

유학중 유럽의 교향악단들과의 협연기회도 많았다. 학교 내의 정기연주회는 물론이고, Jena Philharmonie , MDR(중부독일방송교향악단), Istanbul Chamberorchestra 와의 협연으로 이미 프로 연주자로서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실내악과 오케스트라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24세 때는 세계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함께한 독일 방송교향악단(Deutsches Symphonie Orchester Berlin)에서 준단원을 역임하였다.


그녀는 Leipzighochschul orchester 악장을 역임,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과 유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여만든 Berlin Soloistkammermusik orcherster 에서 부수석 주자로, Berlin 교수협회, 학회, 대사관주체 초청연주 등 활발한 활동뿐 아니라 Mendelssohnhaus, Schumannhaus, Maarkleeberg, Jardhaus 등 초청독주회와 금호아트홀 챔버뮤직 소사이어티의 객원단원역임, Prof.Meinel 과의 Leipzig Trio 등 수많은 실내악 연주로 탁월하고 집중력 있으며 매혹적인 소리를 가진 음악가라는 평을 받았다.

앞으로 최고의 교향악단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싶어

“독일에서 10년 동안 생활을 하다가, 2010년 10월에 돌아왔어요. 귀국 후에는 예술의 전당 아티스트로 발탁이 되어, 2011년 4월 8일 예술의 전당에서 독주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금호 챔버뮤직소사이어티 연주와 앙상블 pan의 리더로도 활동을 했죠. 수원시향과는 협연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는데, 공연을 관람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 어느 유수한 오케스트라와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번 수원시향의 악장으로 취임을 하게 된 것도 너무 기쁘다고 한다. 물론 심적인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란 다짐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수원시향은 이미 정상의 위치에 있는 교향악단입니다. 역사도 30년이나 되었고요. 제가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했을 때쯤인 1982년에 수원시향도 창단을 하였습니다. 저와는 참 많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이곳에서 제가 지금까지 다져왔던 모든 것으로, 주춧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남들과 어울리지를 못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본인은 잘 어울린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 한다.’고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한경진. 앞으로 그녀의 더 좋은 무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혜석, 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름이다. 도대체 나혜석이란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실체를 안다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지 못한 사람은 힘든 일이다. 혹여 글 하나로 인해 지난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월 26일,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한다. 영하 10도를 조금 밑돈다고 하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더 추은 듯하다. 수원박물관에서 12월 23일(금)부터 2012년 2월 26일(일) 까지 열린다는 ‘2011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인 ‘나는 나혜석이다’를 보기 위해서이다. 개막식을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조용히 나혜석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수원박물관 특별기획 전시 '나는 나혜석이다'의 입구


수원출신의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 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특별전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갔던 신여성인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1인칭의 시점으로 되돌아보는 자리로 마련을 하였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제목이 말해주 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나혜석에 대한 사고를 바꾸어 놓기 위한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원에서 태어났다'의 나혜석의 학창시절, 학교에서 사용했던 양금과 아코디언, 그리고 가계도


‘여자도 사람이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시집살이라는 올무에 갇혀 음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들에서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던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전시회에서 우리가 나혜석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문학가이기도 했다. 많은 책들에 실린 니혜석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나혜석이다”

나혜석 특별전은 모두 6개의 파트로 구분이 된다. 나혜석의 연보를 알아볼 수 있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 ‘나는 신여성이다’로 이어진다.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는 나혜석의 가족사진과 학창시절의 학적부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나는 신여성이다 에는 나혜석 소개영상을 준비했다.

다음으로 ‘나는 세상에 말하고 싶다’에서는 나혜석의 문학작품 및 유화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인연을 맺었다’에는 구미와 프랑스의 여행기와 교류작가 자료 등을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에서는 수원과 나혜석에 대한 자료 등을 만나볼 수가 있다.


나혜석은 유화를 그리기 전 삽화작업도 했다. 아래는 나혜석의 유화가 소개된 책들


전시실에는 나혜석이라는 존재를 알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많은 글과 그림 등을 통해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꿈과 이상을 만날 수가 있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자신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조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나혜석의 이혼고백장, 1934년 삼천리)」

이 한 구절의 이야기가 어쩌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조선의 남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을 자신들의 아래에 두고 비하시키는 그러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온 나혜석. 그녀는 오늘 “나는 나혜석이다.”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40세 때인 1935년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 다솔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나혜석이 그린 유화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한 나혜석의 흔적


10여 년 동안 절집을 돌아다니면서 나혜석은 세상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1948년 53세의 나이로 서울 시립 자재원에서 세상을 떠난 나혜석은, 아직도 세상에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수원박물관 학예팀의 이동근의 말이다.

“나혜석에 대한 자료는 많지가 않습니다. 그 자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모았습니다. 오늘 이 자료가 나혜석이라는 한 여성을 재조명하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최린(위),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나혜석은 아픔을 당하고, 사회에서 나혜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나는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115년. 사람들은 나를 신여성, 최초의 여성유화가, 문학가, 민족운동가, 여성해방론자라고 말한다. 나는 예술적 삶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충실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에 살면서 나는 그림과 글을 통해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특별전시 팸플릿 중에서)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