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보공예작가 김난영의 칠보사랑

칠보란 ‘금·은·구리 바탕에 유리질의 유약이나 그 혼합물을 발라 구워서 여러 가지 무늬를 나타낸 세공’을 말한다. 보석의 대용품으로 처음 등장한 칠보는 후에 영구적인 색감과 독특한 기법으로 예술적 경지에 다다르는 칠보화(七寶畵)·갑옷, 장신구, 성배, 성골함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걸쳐 다양한 모습의 장식 목적으로 널리 발달되어왔다.

이 칠보에 마음을 뺏긴 사람이 있다. 수원시 팔달구 '아름다운 행궁길‘에서 나녕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난영 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제 칠보를 시작한지는 7년 정도이지만, 누구보다도 칠보에 대해서만큼은 뒤처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말하기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표현을 할 정도이다.


다양한 칠보의 아름다움

칠보의 기법은 다양하다. 가는 금속선을 디자인의 외곽선을 따라 바탕금속 위에 붙이고 이 외곽선 안쪽을 유약으로 채워 소성시키는 기법인 유선칠보. 유선칠보는 식은 다음 표면을 연마하여 광을 내며, 금장신구에 많이 쓰인다. 유선칠보(有線七寶 cloisonné)· 조금칠보(彫金七寶 champlevé)는 유선칠보와 반대 기법으로, 금속물의 표면을 디자인대로 파내고 그 안에 주엽을 채운 후 소성하는 것이다.

채유칠보는 칠보색이 금속의 외곽선이나 선으로 그려진 홈에 의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기법은 앞에서 언급된 기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기법에서는 젖은 유약을 쓰더라도 우선 건조시켜야 하는데, 이는 젖은 상태에서 유약이 흘러 서로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한 7년 정도 되었나요. 원래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처음에는 악세서리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칠보의 매력에 빠져들었죠. 2006년도에 처음으로 공방을 개설하였는데, 이상하게 저는 적자를 보지는 않았어요. 만들어 놓으면 많은 분들이 좋다고 사가고는 했으니까요.”

왜 초보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것일까? 아마도 작가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좋으면 남들도 좋다는 말이 정설인 듯해요. 저는 처음부터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었어요. 상품과 작품을 철저히 구분을 한 것이죠. 그러다가 보니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 되었죠.”



철저한 프로근성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칠보공예를 배우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작품을 만들기 시작헸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이렇게 칠보공예에 빠지게 된 것은 스스로도 놀랍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을 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예요. 작업을 하느라고 해와 달이 어떻게 뜨고 지는지를 몰랐다고 하면, 남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도 저는 계절이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그저 칠보공예의 화려함에 빠져 들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칠보는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작업에 몰입을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1년을 했으면서도 남들의 10년같이 작업을 했다는 김난영. 벌써 자신에게서 칠보공예를 배워 나간 사람들 중에 사범이 될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 15명, 그리고 100여명의 제자들이 있다고.



“저는 정말이지 제가 생각해도 칠보공예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을 해요. 작업만 하고 있으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에 밀려 오거든요. 이 칠보공예는 결국 제 인생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죠”

칠보공예 박물관을 이룩하고 싶은 꿈


김난영의 경력을 보면 재미있다.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쓰기 위해 뒤늦게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들어갔다. 창작 21 문학 동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칠보공예에 빠져 든 2006년부터응 온통 칠보에 관한 내용을 수를 놓고 있다. 본격적으로 공방을 차리고 칠보공예를 시작한 2007년부터의 경력이 A4용지 두 장에 빼곡하다.

“문학은 칠보공예를 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글을 쓰고 표현을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칠보공예를 설명을 할 때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는 김천에 박물관을 짓는 것이 꿈이에요. 난영칠보박물관을 짓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죠. 앞으로 몇 년 후면 아마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을 해요”

참으로 이야기를 해도해도 끝이 없을 듯하다. 아마도 몇 년 후 칠보공예가 김난영을 보기위해 김천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동안 노력을 해온 결과가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주요약력)

2007, 1, 17 나녕공방 개업
2007, 10, 12 금하칠보 지도자과정 수료
2007, 12 제12회 온고을 전통공예 전국대전 장려상 및 입선
2008, 12 제2회 불교문화상품 공모전 특선
2009, 2, 27 제30회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입선
2009, 4, 21 불교 탬플스테이 홍보관 개관식 및 수상작 입점
2010, 7, 두 번째 김난영 칠보공예전
2011, 11, 10 남원 실상사 가을바람전
2012, 2, 24 제34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장려상

참 당차다.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에게서 느낀 생각이다. 두 마리 토끼를 쫒기에는 참 왜소하다. 가냘프기만 한 사람이 어찌 그리 당찬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 3월 8일 오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1-2에 소재한 ‘임 아트 갤러리’에서, 이곳의 대표이면서 섬유공예 작가인 임하영(여, 38세)을 만났다.

작은 10평 남짓한 갤러리 안에는 벽면을 그리 크지 않은 그림들이 채우고 있다. 갤러리라고 하기보다는, 마음 편하게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면 좋을 듯한 분위기이다. 벽면에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득하다. ‘누드스케치 18인전’이 한창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연신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 와중에도 반갑게 사람들을 맞이하는 그녀 임하영은, 올 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단다.


 


섬유공예, 양모작업에 빠져버렸네.

임하영은 상지대학교 공예학과에서 섬유공예를 전공하고, 건국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텍스타일디자인을 전공하였다. 그동안 많은 그룹전들을 해오면서 지역에서는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섬유공예가이다. 사실 섬유공예란 낯선 부문이다. ‘섬유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 공예. 또는 그 작품. 직물, 편물, 염색, 자수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는 것 정도의 사전적 지식이 내가 알고 있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섬유공예를 하게 된 것은 회화를 그리다가, 대학에 들어가 그 섬유가 주는 질감의 감촉에 반한 것이죠.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런 매력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섬유공예를 택하게 되었죠. 이제 섬유공예를 시작한지는 한 15년 정도가 되었나요? 아직은 이렇게 내 놓을만한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닌데요.”


누드스케치 18인전이 열리고 있는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1-2 <임 아트갤러리> 내부 


스스로의 길을 열어가는 사람, 임하영

우선 임하영의 면면을 살펴보자. 임 아트갤러리 대표인 임하영은 수원미술협회 회원이면서 수원섬유예술연구회 회원이다. 섬유공예가라고 하기보다는 ‘섬유예술가’라는 말을 즐겨 쓴다. ‘공예가’와 ‘예술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의 대답에서 쉽게 들을 수가 있다.

“저는 아직 공예가란 말을 쓰기가 버거워요. 적어도 공예가란 말은 그 분야에 장인의 경지에 올라, 깊이 있는 작품을 낼만한 분을 지칭하는 것이란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고,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이죠. 그리고 예술가란 말에 재미를 느끼는 것은, 섬유를 갖고 하는 설치미술이 재미도 있고요”



요즈음 들어 섬유를 이용한 설치미술에 푹 빠져 있단다. 1999년부터 설치미술로 많은 전시회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드린 그녀이다. 2004년 수원화성연극제의 일환으로 장안공원 성벽일대에 설치미술을 펼쳐 호평을 받았다. 2005년 경기도 문화의 전당과 수원미술전시관, 2006년 화성 행궁 봉수당, 2007년 수원미술전시관, 2010년 수원화성홍보관 등에서 설치미술로 사람들과 조우를 했다.

섬유공예 작품으로 그룹전도 매년 거르지 않았다. 2006년에는 대안공간 눈에서 제1회 개인전 ‘꽃들의 초대’를 열었으며, 2011년에는 제2회 개인전 ‘화성행궁에서 혜경궁마마를 알현하다’를 자신이 운영하는 임 아트갤러리에서 열었다. 날마다 변화하는 작품세계를 즐긴다는 그녀. 자신은 항상 더 나아지는 작품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고 한다.


“작가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작품을 관람하러 오는 관객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 늘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자세라고 생각을 합니다. 직물을 갖고 하는 섬유공예를 하다가 보니, 양모의 감촉과 아름다움에 반해버렸죠. 그렇기에 섬유공예는 무한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작품을 구상하고 작업을 하다가 보면,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작품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생각보다 미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 밖의 작품 하나를 만들었을 때의 희열이 있어 늘 작품을 구상하게 된다는 것.


2011년 제2회 개인전 "화성행궁에서 혜경궁마마를 알현하다 전"에서 선을 보인 작품들(위는 양모)


“올해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요.”

공예작품을 하기 위해 필요한 양모는 국산이 없단다. 모두 수입을 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양모를 이용한 작품을 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경비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충당을 한단다. 늘 바쁘게 살아가는 임하영이 당차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래서인가 보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학비도 벌어야 하고, 저도 재료 등을 구입해야 하니까요. 지금도 아이들을 일주일에 두 번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적은 돈이긴 하지만, 제 작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니까요. 이 갤러리도 원래 작업실로 쓰려고 했는데, 위치도 그렇고 제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곳을 갤러리로 꾸몄죠. 친구들과 함께 일일이 제 손으로 다 꾸몄어요.”

갤러리 운영과 섬유공예 활동을 다 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눈에 잠시 우수가 깃든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지만, 아마도 작업을 하다가 닥치게 되는 어려움 때문인가 보다.



“처음에 이곳에 문을 열었을 때는 하루 종일 기다려도 한 두 사람도 들어오지를 않았어요. 그래도 일 년 동안 꾸준히 문을 열고 전시를 하다가보니, 입소문으로 이제는 고정 관람객들이 늘어났죠. 올해는 갤러리에 정말 색다른 작품들을 전시하려고 고민을 하고 있어요. 제 개인전도 준비를 하고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임하영.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으면서, 벽면을 채운 그림을 설명을 한다. 참 저 작은 체구에서 어찌 그런 열정이 나오는 것일까? 그 노력으로 인해 올 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집을 날마다 해체하는 여인이 있다. 도대체 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화가 박남희(여, 49세,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왜 그냥 집이 아니라, 집을 모두 펼쳐서 그림 안에 집어넣었을까? 3월 3일 오후에 평촌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나의 조형예술은 ‘집’을 바라보는 시각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집이란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기에 집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것을 바라보고 관심을 갖는 대상은 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일상은 ‘일탈’을 도출하는 ‘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화가 박남희.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귀인중학교 앞 작업실에서 만났다


‘꿈’을 집이라는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화가

화가 박남희는 그 동안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3년 성보갤러리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연 후, 2008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2회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2009년에는 관훈갤러리에서 3회를, 2010년에는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갤러리에서 현대미술 초대전을 열었다. 그동안 단체전도 열심히 했다.

1999년 전통과 현대의 만남전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 것을 비롯하여, 2008년 중국에서 한일문화교류전, 2009년에는 공주 원골에서 예술과 마을 설치제, 2010년 2010 Project- C전 등 20여 회의 단체전을 열었다. 현재 서울미술협회 회원이면서 아트플래시의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저는 그림을 늦게 접했어요. 어려서부터 시작을 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늦게 그림을 시작했죠. 30대 초반에 시작한 그림이, 이제는 전업화가가 된 것이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는데, 46세에 졸업을 했으니 참 늦은 셈이죠.”

그런 그녀가 그림에 푹 빠진 것이다. 집을 풀어 그림으로 표현을 하는 그녀의 작업은 늘 꿈으로 가득하다.

“꿈을 집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죠.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사고나 감정이죠. 하지만 그림 속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가능하죠. 집을 바라보는 시각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고, 그것을 펼쳐 놓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그 안에 ‘꿈’을 그려 낼 수가 있는 것이죠,”

'집의 조각들'이란 개인전을 관훈크럽에서 기졌을 때의 작품 


그림속의 색채의 조화로움에 희열을 느껴

화가 박남희, 그녀의 그림 속에는 집안의 모든 것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 속의 이미지보다 오히려 색채를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색채의 조화를 그려내다가 보면, 현실의 표면적인 현상보다도 본질과 자아의 내면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 그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미지로 규칙과 제약이 없는 일정한 질서 속에 자유로움을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죠. 화가는 만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끝없이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면서 그 작업 안에서 느끼는 희열이 없다면, 아마도 아무도 그림을 그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좌절과 희열이 반복되면서, 나의 무의식이 하고 싶은 것과 원하는 것을 가장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남희 작 <다섯 개의 구름기둥>. 그녀는 집을 평면화하여 그 안에 꿈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한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인 집이라는 건축이미지를 해체하여 평면화 시키고 있다. 그 안에 친숙하고 구상적 이미지인 하늘이나 식물 등의 이미지를, 평면과 입체의 이중적 공간을 다시 한 화면 속에 안착시킨다. 그것은 사물에 대하여 낯설음과 익숙함을 동시에 깨달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림은 내 영원한 동반자, 돈으로 따지고 싶지 않아

“저는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고 따듯한 느낌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그림을 보면서 본인의 현실적인 일탈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죠. 책장 속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 같은 계단, 또는 반복적인 패턴화 된 층계, 안과 밖이 모호한 문 등,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구성을 그런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다가 말고 너무 오랜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죄스럽다. 하지만 그림을 바라다 볼수록 자꾸만 빠져드는 이상한 마력 같은 것을 느낀다. 아마도 화가 박남희의 말대로 그 그림 속에서 나의 일탈을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어떻게 하느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가정이 있으니 가족들의 도움도 받고, 초대전도 해서 충당하고 있다는 대답이다. 그림을 그릴 때는 팔기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대답을 한다.

“저는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돈이 목적이 된다면 그 안에 참다운 사고가 피어나질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예술은 신선해야 아름다운 것 아닌가요?”

되묻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그저 세상 속물인 기자 하나가 예술가의 자존심을 건드렸나보다. 3~4월 경에 그룹전이 있어 요즈음은 하루에 7시간 이상을 작업에 몰두한다는 화가 박남희. 그 전시회가 기다려지는 것은 또 다른 건조물의 펼쳐짐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상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항상 설명을 듣고 늘 바라보고는 있지만, 도대체가 알 수 없는 것이 화폭에 그려진 그림을 보는 것이다. 얼마나 더 공부를 하고 작가와의 만남에 임해야 하는 것인지, 화가들을 만날 때마다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를 않는다. 그래도 열심히 듣고 열심히 배우다가 보면, 언젠가는 알아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다.

3월 1일. 남들은 쉬는 날이라고 좋아하지만, 이날도 작업실에 나와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화가 김은영(여, 41세. 서울 자양동 거주). 그저 그림이 좋고, 그림 안에서 무엇인가 해답을 얻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원색의 물감들이 화폭에 이리저리 선과 원을 그리면서,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그림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화가 김은영의 작업실은 수원 행궁 앞 레지던시 건물 안에 자리한다. 이 건물 안에 입주한 딴 작가들이 쉬고 있는 날인데도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한 집안의 살림을 맡아하는 주부이면서도, 전업화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하지만 벌써 개인전을 7회나 치러 냈다고 한다.

“개인전을 한다는 것이 조금은 버거울 때도 있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98년도 부터였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조금 늦었다가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바빴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리를 하다가 좌절을 하기도 했죠.”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김은영은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찾아 고민을 한다. 자신의 그림의 특징을 묻는 기자에게, 참 알아듣기 어려운 화두를 하나 던진다.

“그림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나는 무한한 여행입니다. 제 그림은 각자가 갖고 있는 기운을 찾아 떠나는 것이죠. 색, 물감, 그리고 그 덩어리들이 갖는 기운입니다. 화면 안에 있는 기운이 그림을 보는 각자의 기운과 상충작용을 하면서, 좋은 기운을 얻어가기를 바라는 것이죠.”

하루에 6시간 이상을 작업을 하고 있다는 김은영은, 한 남자의 부인이자 두 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뒤처지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만큼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전업화가 오히려 여자가 더 힘든 작업

집안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듯하다. 그것도 작업실이 집에서 1시간 30분이나 소요하는 거리에 있으니. 그러나 항상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경비가 필요할 텐데 어떻게 감당을 하느냐고 물었다.


“사실은 집에서 손을 벌릴 수가 없어요. 아직 제 위치가 대단히 명성을 날리는 사람도 아니니 충분한 비용을 버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다가 보니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해야죠. 대개 사람들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을 하죠. 그래서 여성화가들이 남성들보다 더 편하게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와는 정 반대죠.”

한 마디로 남자들이야 그냥 옷만 걸치고 다니면 된다지만, 여자들은 꾸며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힘들다는 것.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작업을 할 때 구상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저는 모든 주변의 사물과 자연에서 구상을 합니다. 어떤 때는 작업을 하다가 전율을 느낄 때도 있어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요. 아마도 그런 것 때문에 수도 없이 좌절을 했다가도, 새로운 기운을 얻어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럴 때면 거의 광기를 느끼기도 하고요”

올 가을 쯤 다시 개인전을 준비를 한다고 한다. 바쁘게 생활을 하면서도, 늘 그렇게 작업에 열심인 화가 김은영. 새로운 기운을 얻으러 거리로 나간다는 그녀의 뒷모습이, 휴일 행궁 앞에서 연을 날리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다

아름다운 행궁 길’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다가 보면, 괜히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다.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딱히 그 해답을 얻기가 힘들다. 그래도 좋은 것은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나고 다녀야 하는 직업이니, 이왕이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00-1. 아름다운 행궁 길 안에 자리한 호두야자. 전사 인쇄를 하는 전문업소를 운영 중인 박선우(여, 35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오래지 않은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람 같다고나 할까? 편안하게 사람을 만드는 재주라도 있는가 보다.


전사인쇄 전문업소 ‘호두야자’ 운영

‘아름다운 행궁 길’에는 전통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흔히 ‘공방(工房)’을 운영하는 작가들이다. 그런데 박선우가 하는 전사인쇄는 전통은 아니다. 하지만 꼭 전통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물인 전사인쇄를 하지만, 전통문양을 이용한다면, 굳이 전통과 현대를 가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연신 웃어댄다. 아마 그 웃음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인가 보다.

“저는 즐겁게 살아요. 원래 금융권에서 일을 하다가, 지난 해 6월 1일부터 행궁 길로 들어와 이 작업을 시작을 했어요. 이런 작업이 재미있어요. 사람들도 만나고요”



그저 매 순간이 재미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공방 길의 걱정도 하고, 행궁 길 축제에 대한 의견도 이야기를 한다. 밤이 되면 어두우니, 그런 기사도 좀 써 달라고 한다. 주차장이 많이 있으니 많이들 오라고도 써 달란다. 취재를 하러 갔다가, 많은 부탁만 받은 셈이다. 전사인쇄는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란다. 우선은 컴퓨터를 잘 다루어야 하는데 워드만 익혀서는 안되고, 그래픽을 익혀야 한다는 것.

“전사인쇄를 배우는 과정은 한 1년 정도 배워야 해요. 물론 전문가가 아니라면 6개월 정도만 배워도 되지만요. 기계가 열을 올려야 하는데 200도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문성을 가져야만 하죠. 아이들에게도 체험을 하게하고 싶지만, 정말 위험해요”

일일이 알아듣기 좋게 설명을 하다가 직접 시연도 해 보인다. 이런 일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내 중심상권이 있는 곳보다는 수입이 덜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으니 그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있겠느냐고 한다.



일을 하다가 보면 보람된 일도 많아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하지만 박선우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한지는 아직 1년이 안되었지만, 그동안 참 많은 일을 당했단다.

“한 번은 어느 분이 오셔서 티셔츠 앞뒤에 ‘사랑해’라는 말을 넣어 달래요. 그런데 값을 좀 깎아달라고 하면서요. 이유를 물었더니 부인이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 부인에게 사랑을 한다는 표현이 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손해를 보고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그 일 뿐이 아니다. 남은 숨기려고 하는 것조차 숨기지를 않는다.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당찬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호두야자’라는 점포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물어 보았다.

“호두야자라는 식물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식물을 키우면서 이 다음에 제가 가게를 하게 되면, 상호를 꼭 그 이름을 붙이겠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정말 이름을 호두야자라고 붙였어요. 소원이 하나 이루어진 것이죠. 아마 다음에도 제가 소원을 갖게 되면 꼭 이루어질 것 같아요”


늘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까지 기분이 좋게 만들어 준다. 행궁 길 점주들 사이에서도 ‘기분 좋은 사람’으로 통한다고 주변사람들이 귀띔을 해준다.

“사진 잘 나온 것 있으면 한 장 가져오세요. 만들어 드릴게요.”

이참에 사진 한 장 잘 찍어 전사인쇄를 해서 입고 다녀야 할까보다. 아마도 그 옷을 입고 다닌다면 나도 저리 긍정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는지.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