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수원박물관 이종학 특별전

 

내가 생전에 사운 이종학 선생을 만나 뵌지도 꽤 오래되었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독도는 우리 땅이다. 간도도 우리 땅이다. 우리는 벌겋게 두 눈을 뜨고 우리 땅을 빼앗긴 못난 민족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세우지 않으면, 아마도 이 다음에 우리 자손들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한 선조가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 이종학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10년이 흘렀다. 8월 14일 오후 3시,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소재한 수원박물관 기획전시실 앞에서는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이란 기획전의 개막식이 열렸다.

 

 

선생님은 진정한 애국자요, 사학자입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수원박물관의 한동민 기획팀장은

 

“이번 기획전은 내일이 8,15 광복절이라 특별전으로 마련했습니다. 이종학 선생님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료를 입수하면서부터 우리 민족과 영토에 대한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신 분입니다. 저희 수원박물관에 기증하신 자료만도 2만점 정도가 됩니다. 선생님은 자비를 들여 자료수집을 하셨으면서도 관련자료를 박물관 등에 무상으로 기증을 하시고는 했습니다. 평생을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독도에 관한 자료는 거의 다 독도박물관에 기증을 하셨고, 그 외에도 경기도박물관, 동학혁명기념관, 이순신기념관, 토지박물관 등에 수많은 자료를 기증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늘 한, 중, 일 삼국의 관계를 영토분쟁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국과는 간도문제를, 일본과는 독도문제를 늘 이야기를 하셨죠. 선생님은 평생 학자로 사신분이십니다. 책을 손에서 놓으신 날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독도박물관 앞에서 영원히 독도를 지키실 것입니다”

 

 

유가족 인삿말을 하는 동안 염태영 수원시장(우)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좌)이 함께 하고 있다(사진 위) 개막식의 테이프 커팅(아래) 

 

사운 이종학 선생의 나라사랑

 

오후 3시 특별기획전이 마련된 전시실 앞 중앙로비에서는 염태영 수원시장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을 비롯하여, 미망인을 비롯한 유가족들과 100여명의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이런 전시는 국가차원에서 해야 할 것이다. 이종학 선생은 수원을 사랑하신 분이고, 평생 자비를 들여 나라를 굳건히 세우겠다는 뜻 하나로 사신분이다. 이런 분이 수원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이 전시는 수원시민들과 공무원들은 물론,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도 꼭 보았으면 한다. 선생님의 나라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전시중인 사운 이종학 선생이 수원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들

 

사운 이종학 선생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고서점을 운영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했다. 선생의 호 ‘사운(史芸)’도 ‘역사를 김매기 한다.’는 뜻이다. 선생은 늘 그렇게 역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사료를 무기삼아 뛰어들었다.

 

선생은 평생에 가장 기쁜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내 생애 가장 기쁘고 통쾌한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그 하나는 1945년 조국 광복이요, 또 하나는 1990년 7월 2일 시마네현에서 관계자로부터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 땅‘이라는 항복을 받고 온 일이다" 라는 것이다.

 

 

사운 이종학 선생의 친필 자료정리본(위)과 1844년 발행된 신제여지전도의 부분. 프랑스인이 1835년에 만든 세게지도를 참고해서 미쯔쿠리 소고가 제작한 지도. 조선과 일본사이의 바다가 '조선해'로 표기되어있다. 사운 선생은 늘 동해가 아닌 조선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해오셨다 


 

사운 이종학 선생의 독도에 대한 끊임없는 자료수집과 연구는 앞으로 계속되어야만 한다. 평생을 일본 스스로가 ‘대한민국 독도’를 인정하는 자료를 모았으며, 방위개념의 동해가 아닌, 고유명칭인 ‘조선해’로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의 노력으로 1997년 ‘독도박물관’이 개관하게 된다.

 

간도도 빼앗긴 우리 땅

 

사운 이종학 선생은 살아생전에도 늘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했다. 일본에 의해 우리 땅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빼앗겼다는 것이다. 간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보면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간 백두산 정계비를 설치하고, 입록강과 토문강에 이르는 선을 국경선으로 정함. 조선후기 조선 유민들이 이주 정착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에 대한 봉금을 해제하고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면서 간도 영유권 문제 발생

1902년(광무 6) 대한제국 정부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 한인보호에 힘씀

1904년(광무 8) 북변간도관리사 이범윤 소환

1907년(융희 1) 일제의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 설치. 간도는 한국의 영토로 규정

1909년(융희 3) 일제는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보장받는 댓가로 청나라의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을 인정하고 ‘간도협약’을 체결. 대한제국은 영유권 주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 간도를 빼앗김.

 

 

특별전시관에는 모두 7가지로 구분을 하여 전시를 한다. 1. 프롤로그 전시개요와 이종학 연보, 2. 역사의 김매기를 시작하다. 3. 충무공 이순신과의 만남, 4. 한줌 재 되어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 5. 우리 강역지키기(일제 대륙침략사), 6. 내 고향 수원, 7. 에필로그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이다. 이번 전시는 2012년 8월 14일부터 10월 14일까지 계속되며 매월 첫째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른들이 계신 방에 들어가면, 벽에 온각 색으로 꽃이며 나비, 해와 달 등 각종 채색으로 이름이며 가훈 등을 쓴 액자나 족자를 볼 수 있었다. ‘혁필화’라고 하는 이 그림과 글씨는, 납작한 가죽을 이용해, 여러 빛깔의 색을 내는 것이다.

 

오늘 아침 갑자기 혁필화 생각이 났다. 가끔 이렇게 오래전에 본 것들이 갑자기 생각이 나고는 한다. 아마 천상 이런 버릇에서 못 벗어날 것만 같다. 처음 혁필화 사진을 찍은 것이 2003년도였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국민속촌 장터 안에서 본 기억이 나 민속촌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혁필화를 그리는 분이 민속촌을 떠난지 꽤 오래 되었다는 대답이다.

 

 2003년 한국민속촌에 가서 혁필화를 그리시는 어르신을 만나뵈었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집집마다 한 점씩은 벽에 걸렸던 그림

 

예전에는 집집마다 방문을 하거나, 혹은 장거리 등에서 가끔 물감을 꺼내놓고 혁필화를 그리는 화가를 볼 수가 있었다. 혁필화는 조선조 초기인 1,600년경에 유덕공 선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많은 혁필화가들이 활동을 하였다.

 

일설에는 18세기 유득공이 버드나무 가지로 쓴 비백서에서 기인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혁필화가 언제부터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혁필화가들은 1930년대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에는 혁필로 쓴 이름이나, 가훈, 상호, 고사성어 등을 집집마다 한두 장 지니고 있었다. 혁필화가들이 적은 수로 그 명맥을 유지했던 것은 대우문제에도 있다.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정상적인 화가들에 대해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화가들에게서도 냉대를 받아

 

또한 화가들 중에서는 혁필화가들은 화가의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아마 그들을 장거리로 내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혁필화는 빠른 시간에 그려내야 한다. 가죽이라는 특성상 물감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픔이 있다. 한 장이라도 더 그려야 먹고 살수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화가들처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싼값에 그려야하는 혁필화가들로서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빠른 작업만이 살길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사양길에 들어선 혁필화는 이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혁필화에 대한 올바른 가치가 정립이 안되었기 때문에, 혁필화를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사동에나 가 보아야 가끔 만나볼 수가 있는 혁필화. 재빠른 손놀림으로 화려하게 그려내는 혁필화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혁필의 끝에서 뿜어져 그려대는 나비며, 꽃이며 각종 나무들이 온갖 색을 만들며 화선지 위에 춤을 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려낸 혁필화. 그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화가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는 이들은 그저 탄성만 흘려낼 뿐이다.

 

그 당시 어르신이 쓴 혁필화가 지동 고성주 전안의 벽에 걸려있다

 

참 이제 와서 생각을 하면, 그동안 내가 문화예술인들을 만나면서도 참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 당시에 혁필화를 그리시는 분의 존함조차도 물어보지 못했는지. 오늘 10년 전 같이 민속촌에 가서 쓴 혁필화 글씨를 전안에 곱게 모셔놓고 있는 아우의 집에 가서, 새삼 옛 기억을 더듬어본다. 하나씩 사라져가고만 있는 우리의 소중한 풍물이 오늘따라 마음이 아프다.

사극 드라마 등에서 가끔 등장하는 여인들의 정절을 지켜내는 작은 칼이 있다. 장도라고 부르는 이 칼은 여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장도는 대개 옛 상류사회에서 애용해온 일종의 작은 칼로 패도와 낭도의 복합어로 실용을 겸한 장신구의 일종이다. 장도 가운데 허리에 차는 것은 패도라고 하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은 낭도라고 불렀다. 장도는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경주 황남대총 북분출토의 금제과대에는 장도와 흡사한 소도가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이미 장도와 같은 개념의 도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도는 남자들은 허리띠나 옷고름, 혹은 포의 술띠 등에 차고 다녔다. 이와는 달리 여자들은 치마허리에 걸거나 옷고름(겉고름과 안고름)에 찬다.

 

 

여자의 경우에는 호신용의 구실도 하여 부녀자의 정절을 지켜주는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다. 특히 임진왜란(1592) 이후부터는 사대부 양반가문의 부녀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장도를 휴대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장도가 신분을 상징하는 표시가 되기도 해, 장도의 장식이 점점 사치품으로 변하자 연산군과 중종 대에는 장도를 금제절목으로 삼아 서민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친 장도

 

장도는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남녀의 애용품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실생활에서도 사용했지만, 장식용과 호신용으로의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장도 중에서 은저가 달린 첨자도는 음식의 독을 분별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으니, 실생활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호신용으로 많이 애용되기도 했다.

 

 

전통장도는 그 재료에 따라, 금, 은, 동, 철, 흑단, 향나무, 대추나무, 흑각. 화각, 서각, 소뼈, 상아, 옥, 호박, 비취 등이 사용되었고, 공작석, 금강석 등도 사용되었다. 장도의 장인은 만난지가 벌써 꽤 오래되었다(2004년 9월 24일 취재). 풍기읍 동부리 507 거주하는 김일갑 장인은 장도를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 1990년 8월 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을 받았다.

 

오직 전통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켜 온 세월

 

어린 시절부터 금은패물공방에서 기능을 연마한 김일갑 장인은 우리 전통장도에 대해서는 남다른 식견을 지니면서 장도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김장인은 이들을 모두 다루기는 하지만 고급 호화품은 특별한 주문이 있지 않는 한, 대개 수요에 쫓아 소뼈나 먹감나무를 사용하여 대중성이 있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김장인의 풍기장도는 원통형과 사각도, 육각도 등을 주로 생산한다. 장도의 모양새도 칼자루와 칼집의 머리를 바로 마무리하는 평맞배기, 대칭으로 꼬부리는 乙자맞배기, 칼집에 첨사를 끼우는 첨사도 등 세 종류가 있다. 칼집에도 남자의 경우는 누각, 운학, 박쥐, 용 등 장생문을 사용하고, 여성은 나비, 국화, 난, 매화 모양의 장식을 붙인다.

 

그리고 칼등 쪽에는 자신의 호가 들어있는 글자를 새겨 자신의 작품임을 나타낸다. 이는 자신이 만드는 장도 한 자루마다 생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작품 하나마다 장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이다.

 

이제는 마음의 장도를 품어야 할 때

 

장도 한 자루를 만드는 데는 모두 23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모든 공정에 전혀 기계를 쓰지 않고 거의 원시적인 공법으로 정성을 쏟고 있어, 대개 한 자루를 제작하는데 4, 5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요즈음 들어 장도는 그저 ‘여인의 정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있지만, 실은 실생활과 호신용, 그리고 장식용 등 다양하게 시용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여인의 정절을 지켜주던 의미로서의 장도가, 그저 장식용으로 사용이 될 뿐이다. 세상이 변하면서 정절에 대한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면서 장도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한 어르신은 이렇게 말한다.

 


“장도 한 자루에 무슨 정절이 지켜지겠습니까? 그것도 옛날 이야기죠. 지금은 마음의 장도를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참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난잡하게 변하겠죠. 모든 여성들이 마음의 장도를 품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평택이 판소리의 고장이다’ 라고 한다면 거개의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판소리사에서 평택이란 곳은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는 곳이다. 평택이 판소리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 이 곳은 판소리와 함께 예술적으로 뛰어난 경기시나위의 한 류파가 발생을 한 곳이며 풍물의 본거지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에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던 평택이기에 자연 많은 소리와 민속이 전승이 되었으며 그만큼 지금까지도 많은 민속이 전승이 되고 있기도 하다.

 

평양 능라도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명창 모흥갑의 그림 - 적벽가에 능한 모흥갑은 덜미소리를 내면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초기명창 모흥갑의 고장 평택

 

소리의 고장 평택. 일찍 우리는 조선 판소리사에서 평택 출신의 명창인 모흥갑을 만날 수 있다. 모흥갑(1822~1890)은 진위 출신으로 조선조 순조, 헌종, 철종 삼대에 걸쳐 전국의 소리판을 풍미한 명창이다. 모흥갑의 소리는 흔히 통상성이라고 하여서 고음처리가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강산제와 춘향가, 적벽가 등에 능하였다.

 

평양 모란정에서 덜미소리 한번을 내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며 모흥갑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중고제(中高制)는 판소리에서, 조선 헌종 때의 명창 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를 말한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띠며, 첫소리를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다시 낮추어 끊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성행하였다.

 

우표로도 발행이 된 모흥갑의 판소리그림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신위의 『관극시』, 송만재의 『관우희』,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나 ‘무숙이타령’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림속에 남아있는 모흥갑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는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리하는 광대가 모흥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하도 유명해서 판소리학회지인 『판소리연구』 표지를 위시해서 여러 판소리 관계 문헌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그림이 소리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른 시기에 명창들이 야외에서 소리를 할 때 어떻게 했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모흥갑이 어디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경기도 진위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주 난전면 귀동(지금의 구이 부근)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모흥갑은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던 모양이다.

 

 

 

소리꾼들은 득음을 얻기위해 폭포독공이나 동굴독공 등 힘든 학습에 열중했다. 남원 운봉에 있는 '국악의 성지'에는 동굴독공을 익힐 수 있도록 조성을 해놓았다. 겉으로 본 동굴독공 학습장(위) 입구(가운데) 북 등이 놓여있는 동굴 안 학습장소(아래) 

 

그래서 모흥갑의 소리는 학이나 봉황의 울음소리에 비유되었다. 다만 모흥갑의 덜미소리나 그 청이 동, 서편제보다는 당대의 전해지는 중고제의 명창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모흥갑은 평택 진위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모흥갑의 소리를 ‘설상에 진저리친 듯’하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모흥갑이 고음을 잘 내어 그것으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잘했다고 하나,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하는 이별가 한 대목이다. 지금도 조상현이나 성창순 등이 부르는 보성소리 ‘춘향가’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는데,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를 반복하면서 점점 음정을 높여, 마지막에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평택은 명창들과 인연이 있는 고장

 

더욱 평택은 조선조 말 명창 이동백(충남 서천군 종천면 출생)이 이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다가 영면한 곳이다. 이동백은 판소리사에서 ‘전무후무한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록 광대의 족건을 완벽하게 갖춘 소리꾼이었다. 처가인 평택의 한 야산에 올라 소리를 한 후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동백명창.

 

이렇듯이 평택은 우리나라 판소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경기 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의 초기 대명창과 말기 대명창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영면을 했다는 것은 평택이 우리소리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에 평택 진위에 모흥갑 기념비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혜민스님은 미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출가를 해 스님이 되셨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한 마디로 잘 나가는 대기업에 있다가, 환경운동가로 돌아서 수원시장이 되었다. 두 사람 다 범상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6월 10일 오전 10시 30분. 수원시 팔달구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야외무대. 특이한 경력을 가진 염시장과 혜민스님이 대한불교청년회 회원 600여명과 조우를 했다.

 

이 자리에서 사회자의 질문을 대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청년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 행사는 대한불교청년회 창립 92주년 기념으로 열린 ‘정조의 꿈, 孝 문화강국을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전국불교청년대회로 열렸다.

 

 

환경운동을 한 시장과 하버드대를 나온 수재 스님의 조우

 

11시가 넘어서면서 기온은 30도 가까이 올랐다. 그냥 앉아있기만 해도 땀이 흐른다. 야외무대 주변에는 나무들이 있다고 하나, 바람 한 점이 없는 날이다. 종이모자로 겨우 햇볕을 가렸다고는 하지만, 흐르는 땀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이다. 패널로 초대가 된 혜민스님이나 염태영 수원시장 두 인물이, 결코 평탄치 않은 세상을 살아왔기에 할 이야기도 많은 듯하다.

 

“저는 경제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별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막내 동생이 대학이 졸업하고 난 뒤 환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막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돈벌이를 하겠다고 생각을 했기에, 남들이 좋은 직장이라는 것을 떨치고 나온 것이죠. 그 후 10년 동안 급여 없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 당시 여러분들이 조금 전에 지나 온 매향교서부터 지동교까지 복개를 한 다는 이야기를 듣고, 본격적으로 환경을 생각하면서 반대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고, 제가 시장이 된 후로는 수원천 살리기와 남수문 복원 등을 이루어내게 되었습니다. 남수문은 두 번의 홍수로 피해를 입은 지 90년 만에 복원을 하였죠. 여러분들의 역사와 비슷합니다.”

 

수원을 찾은 대한불교청년회 회원들과의 대화를 하는 염태영수원시장(좌)과 혜민스님(가운데)

 

염태영 수원시장의 말에 대한불교청년회(이하 대불청) 회원들은 박수로 환호를 했다. 이어서 마이크를 받은 혜민스님은

 

“대한민국은 참 이상한 곳이다. 딴 나라에서는 그 사람의 능력을 갖고 평가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를 제일 먼저 물어본다. 그 사람의 실력하고는 관계없이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를 더 중시한다. 이런 풍토는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악습이라고 생각한다.”

 

당신들도 외로움을 느끼는가?

 

사회자의 질문에 염태영수원시장은 ‘당연히 외로움을 느낀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연과 함께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친구들과 아울려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에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화성발물관 야외무대에서 패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대불청 회원들

 

“행정이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시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마음 같아서는 모든 분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도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행정입니다. 그럴 때 제 마음과는 달리 서운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럴 때는 참 외롭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라는 대답이다.

 

외롭지 않는냐는 질문에 대해 혜민스님은

 

“내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 때, 나는 그런 뜻으로 하지 않았는데 그 말을 곡해하는 경우가 있다. 일을 잘 하려고 했던 것을 갖고 시기하고 질투를 하는 경우를 만나면 참 외롭다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 나는 우리 마음에 있는 울분을 삭히는 법을 먼저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억울하고 힘이 들 때는 친구들과 대화를 한다. 친구들이야말로 가장 좋은 대화의 상대이다. 내가 억울한 사정을 가장 잘 들어주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동지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외롭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불필요한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염태영 수원시장

 

한 시간 여의 패널로 초청된 염태영수원시장과 혜민스님에 대한 공통적인 질문이 끝나고, 대불청 회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 회원은 ‘가진자들에 대한 횡포로 인해 정신공해를 당했는데, 이럴 때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이 질문에 대해

 

“시민들의 표를 언어서 당선된 시장도 일종의 권력자이다, 하지만 정치인과 행정가는 다르다. 국회의원이라는 정치인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지만, 시장의 권력은 중앙에서 나누어 준 1%의 힘 밖에는 없다. 그런데 행정을 하는 시장은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나는 주민들과 ‘느티나무 밑 대화’를 많이 한다. 그리고 늘 찾아다니면서 행정을 펼친다. 시민들의 사연을 듣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시장이 되려고 노력한다. 하기에 시장에게 권력을 대해 이야기를 하라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한다.”

 

 

헤민스님의 대답은 수행자이기 때문에 염태영시장의 대답과는 달랐다.

 

“나만 피해를 당하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피해를 입게 된다. 그렇다고 상대방만 원망하고 미워한다면, 결국 그 피해를 보는 쪽 역시 나이다. 하기에 먼저 내가 왜 피해를 보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그 다음에 나를 스스로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것이 권력 앞에서 내가 그래도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2시간 정도의 대화를 마친 후 염태영수원시장은 대불청 회원들에게 수원을 자주 찾아줄 것을 부탁 한 뒤, 남원에서부터 새벽길을 나서 짜장봉사를 하러 온 사랑실은 짜장 운천스님’에게 고생이 많다면 위로의 말을 남겼다. 운천스님 또한 수원출신으로 후배이기 때문에 더 반갑다고 기념촬영까지 함께 했다. 스님짜장을 먹고 있던 한 회원은

 

 

짜장면을 먹기위해 늘어선 줄과, 염태영수원시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운천스님 

 

“오늘 참으로 감명 깊은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인구 110만의 자치단체를 이끄는 시장님이 나와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는가 하면, 많은 법문으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신 혜민스님과 같은 자리에서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감사한다. 무엇보다 남원서부터 수원까지 짜장봉사를 와 주신 운천스님과, 선원사 신도님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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